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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47화 (1,448/1,567)

1447화.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2)

얼음장처럼 굳어 멍하니 침묵하던 이들이 급히 서로를 돌아보았다. 마주 본 서로의 눈에 경악이 담긴 것을 확인한 그들은 순간 몸을 떨었다.

여인에게 무학을 익히게 한다.

어떤 곳에서는 딱히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당가에서는 아니다.

소림이 경내에 여승을 들이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여인들만으로 이루어진 문파인 아미나 보타암이 남자 제자를 받아들이겠다 하면 또 어떤 사달이 나겠는가?

지금 당군악이 한 말의 의미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백 년간 이어 온 당가의 법도, 선조들이 당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철통같이 지켜 온 그 법도를 모조리 부숴 버리겠다는 뜻이다.

“가, 가주님!”

모두가 얼어 있는 와중에 당상수가 커진 목소리로 다급히 입을 뗐다.

“가문 내 여인들에게 심법과 권각술을 가르치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

당상수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따지고 보면 당가의 무학은 꼭 용독이나 암기술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당가에도 기본적인 내공심법과 권각법은 분명 존재한다.

물론 이전의 당가는 선택된 몇몇이 아닌 이상, 권각법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그 정도 제한이야 풀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누군가의 뇌리에는 커다란 안도감이 찾아왔고, 또 누군가는 실망을 감추려 애썼다.

하지만 그때 당군악이 단호히 말했다.

“아니다. 당가의 모든 것을 가르친다.”

그의 시선이 당가의 여인들에게 가 닿았다.

“당사자들이 원한다면 말이다.”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거대한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 같았다. 처음 당군악이 선언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 당가인들을 휩쓸었다.

“가, 가주님⋯⋯.”

“불가!”

누군가가 격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살아남은 장로 중 하나, 지은 죄가 있기에 지금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당표였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주님! 여인들에게 독과 암기를 전하지 않는 것은 당가의 오랜 법도입니다!”

당표는 일그러진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 가당찮은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노기 서린 눈빛이었다.

평소라면 아무리 장로라고 해도 당표 따위가 당군악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표의 시선을 받은 이들은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당표가 등에 업은, 선조와 가법이라는 두 단어는 그만큼이나 강하고 견고했다.

순간적으로나마 두 눈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피워 올렸던 당가의 여인들마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버렸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당군악만은 그런 당표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어째서 바꿀 수 없소?”

“가주님!”

“대답해 보시오, 장로. 어째서 불가하오?”

“그걸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당표가 악을 쓰듯 말했다.

“당가의 독은 해독이 되어 버리면 무용지물입니다. 그 독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당가인이 생때같은 목숨을 바쳐 왔습니다!”

“⋯⋯.”

“당가의 암기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검과는 달리 암기는 한번 손에서 떠나면 방향을 틀 수 없는 것! 그 투로가 알려지면 위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당가의 암기는 반드시 독과 함께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무학을 어찌 여인들에게 전한단 말입니까?”

목소리가 격앙되어 떨리고 있었다.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듯, 당표는 연이어 외쳤다.

“혹여 이 모든 것이 당외 장로님을 비롯한 장로들의 부재를 틈타 가주께서 월권을 행하시려 함이라면! 저는 목숨을 걸고 이 일을 막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가주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군악은 화를 내기는커녕 담담히 되물었다.

“내 질문에 답을 하는 게 먼저요, 당표 장로.”

“⋯⋯무슨 뜻입니까?”

“그건 당가의 무학이 가진 약점을 논하는 말일 뿐, 저들이 그 무학을 익히지 못할 이유는 아니오.”

순간 당표는 뒤통수라도 맞은 듯 멍한 얼굴로 당군악을 응시했다. 독고가 불타고 공방이 무너진 충격으로 당군악이 미쳐 버린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주님. 저들은 여인입니다.”

“알고 있소.”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가주님. 가문의 여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들은 언젠가 가문을 떠날 이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

“다른 가문의 소속이 된 이들이 평생에 걸쳐 제 비밀을 지킬 것이라 누가 장담한단 말입니까? 여인? 여인이라 하셨습니까? 어디 당가의 법도가 여인만을 향해 있습니까? 남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가의 무학을 익힌 이는 살아 있는 한 당씨 성을 버릴 수 없음을 가주 역시 알고 계시잖습니까!”

당씨 성을 버릴 수 없다.

듣기에야 당연한 말 같지만, 당가에서는 그 의미가 다르다. 가문의 비전을 익힌 이가 당가와 반목하거나, 당가에 소속되기를 거부할 때, 당가는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 그를 주살한다. 그게 수백 년간 당가가 자신들의 비전을 지켜 온 방법이다.

당군악이 깊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물론 비전을 지키는 게 더없이 중요하다는 건 나 역시 알고 있소. 하지만 그 방법이 낡고 무의미해졌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 역시 후손의 의무일 터.”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저들에게 무학을 익힐 기회를 줄 것이오. 그게 독이든 무엇이든!”

“가주⋯⋯.”

“단!”

당군악이 단호한 눈으로 당표를 보며 못 박았다.

“당가의 무학을 익힌 여인들에게는 당가의 법도가 똑같이 적용될 것이오. 그들은 출가할 수 없고 당가의 귀신이 되어야 하오.”

“그,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저들을 평생 당가에 잡아 두겠다는 말입니까?”

“안 될 것도 없지 않소?”

당군악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강호에는 평생을 무학을 익히는 여인 문파가 적지 않게 존재하오. 그들이 선택한 길을 당가의 여인들이 선택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그 삶을 강제하겠다는 것이 아니오. 그 삶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길을 열어 주겠다는 것뿐.”

당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머리를 바삐 굴려도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가의 무학을 여인들에게 전하지 않는 것은 비전의 유출을 막기 위함이었으니, 그들이 당가의 남아들과 함께 당가에서 평생을 살아간다면 유출에 대한 위험은 사라지게 되지 않는가.

“하나 그건 선조들께서 정한 방법이 아닙니다!”

당표의 외침에 당군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가인은! 당가 성을 쓰는 이들은 누구라도 당가를 지켜 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주께서 무엇이시기에 당가의 선조들이 오랫동안 고심해 온 방편을 부정하고 바꾸겠다 논하시는 것입니까?”

“⋯⋯.”

“지금 가주께선 본인이 역대 모든 가주보다 뛰어나고, 모든 당가의 선조들보다 위대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외까? 그건 오만이고 패악입니다!”

그 순간 당군악이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당표를 노려보았다.

“내 말을 듣지 못했는가?”

“가주!”

“이미 말하였다. 이들의 삶을 희생하여 얻어 낸 명성과 부강함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지금 가주께서는⋯⋯.”

“선조들 역시 한낱 사람일 뿐, 무결하지 않다!”

“지, 지금 무슨 말을⋯⋯.”

경악한 당표는 말도 채 잇지 못했다. 당군악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문을 바꾸기 위해 그들을 부정해야 한다면 얼마든지 그리하겠다. 가문을 바꾸기 위해 내가 가장 위대한 가주가 되어야 한다면 내 그리되면 된다!”

“가주!”

“끝까지 들어라!”

당군악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답지 않게 격앙된 목소리였지만, 또 그렇기에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의 온몸에 박히는 듯했다.

“나는 가문의 영광을 포기할 수 없다. 그건 내가 당가주가 된 이유다.”

“⋯⋯.”

“하지만 당가의 가주는 모든 가솔들의 어버이가 되어야 하는 자리. 나는 가솔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다.”

당군악이 모두를 하나하나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여인들뿐만이 아니다. 독을 만드는 이, 암기를 만드는 이, 당가에 소속되어 있음에도 당씨 성이 아니기에 천대받는 이들, 그리고 분명 당가의 한 축임에도 없는 듯 살아야 하는 외인들까지도!”

“⋯⋯.”

“현재로는 그들 모두를 품고 당가의 영광을 되찾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입술을 짓깨물었던 당군악이 선언했다.

“당가가 바뀌는 것뿐이다.”

당표가 홀린 듯 되물었다.

“가주께 그럴 능력이 있단 말입니까?”

“⋯⋯.”

“대답해 보십시오. 가주께서 그 모든 걸 품고 당가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능력이 있으시단 말입니까? 역대 어떤 가주도 하지 못한 일을?”

당표를 마주보던 당군악이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그것 보십⋯⋯!”

“하나 당가에는 있겠지. 그렇기에 모두를 모은 것이다. 나 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같이 하면 되니까.”

“⋯⋯.”

“모두 마찬가지다.”

당군악이 단호하게 외쳤다.

“서로에 대해 불만만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꽉 막힌 틀 안에서 내가 조금 더 권리를 얻겠다고 해 봐야 제 살을 깎아 먹는 짓에 불과하다. 너희가 진정으로 싸워야 하는 것은 서로가 아니라! 꽉 막힌 당가의 법도다.”

당가인들이 넋 나간 얼굴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직감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어쩌면 이 순간 그들은 가문이 불타오른 것보다 더 거대한 일을 겪고 있음을.

“생각해라. 생각하고 제시해라. 어찌해야 너희가 하고자 했던 일들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바꿔 주어야 하는지.”

“⋯⋯.”

“그게 나만의 뜻이라면 월권이다. 하나 그게 모두의 생각이라면!”

이제 모두가 홀린 듯 당군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당가의 의지다.”

가솔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한구석에 밀려드는,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격정이 있어서였다.

당표는 이들의 표정만 보아도 이미 대세를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앓는 듯한 소리를 흘리다 억눌린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뱉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가주님.”

당군악이 차가운 눈으로 당표를 돌아보았다.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조들께서 당가의 법도를 만드신 이유도 있을 겁니다. 지금 가주께서 하려는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가주께서는 당가의 역사를 제 손으로 끊은 이로 기억될 것입니다.”

걱정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저주였다. 하지만 그 저주를 받은 당군악은 되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장로께서는 가주가 무엇인지 모르시는군.”

“⋯⋯예?”

당군악의 몸을 감싼 녹빛 장포가 불어온 바람에 펄럭였다.

“그 정도 각오도 없는 이는, 당가의 가주가 될 수 없소이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던 당표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당군악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말하라.”

“⋯⋯.”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소리 내어 말해라!”

당군악의 시선이 당패에게로 향했다.

“소가주!”

“예.”

“말하라!”

당패가 가라앉은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보다 신중히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저희의 생각을 한데 모은다 해서 선대의 현명함을 넘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어째서입니까?”

“뻔한 말을 하는구나. 네가 한 질문이 이미 대답을 담고 있지 않으냐?”

“⋯⋯예?”

당군악이 작게 미소 지었다.

“지금의 우리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선대의 가르침이고, 그들의 노력이다.”

“⋯⋯.”

“그런 우리가 결정한 일이 틀릴 리 없다. 선대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가르치셨을 테니까. 우리의 고민 하나, 생각 하나마다 선대의 뜻이 담겨 있다. 결국 우리의 뜻이 곧 선대의 뜻.”

멀리서 듣고 있던 청명이 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입이 절로 열렸다.

“이어 감이란⋯⋯.”

“이어 감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지 마라!”

그가 한 말을 당군악이 완성했다.

청명이 눈을 감았다.

- 형님. 그래도 나는 결국 당가인입니다.

그가 웃으며 했던 말이 지금 청명의 귓가에 다시 들려오는 것 같다.

당군악의 말에 용기를 얻은 이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한다.

금세 소란스러워진 이들을 바라보던 청명이 눈물 고인 당소소를 돌아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자, 밥이라도 지을까?”

“⋯⋯사형?”

“길어질 거거든.”

청명이 모두에게 둘러싸인 당군악을 흘끗 돌아보고는 웃었다.

“나아간다는 건 그런 거니까.”

청명의 말대로, 그렇게 시작된 자리는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다.

당군악이 오랜 대화 끝에 몸을 일으켜 현종과 마주 선 때는, 떠올랐던 아침 해가 다시금 서산 너머에 걸릴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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