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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45화 (1,446/1,567)

1445화.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5)

날이 밝고, 간밤에 죽은 듯 곯아떨어졌던 이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따뜻하기로 유명한 사천 땅이건만, 이 들판의 아침은 유난히 쌀쌀했다. 아니, 어쩌면 쌀쌀한 건 기온이 아니라 이 아침을 맞이하는 그들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일단은 떠날 준비를 해야겠죠. 화산으로 간다고 했으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잠자리를 정리한 당가인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당가 사람들과 비슷한 얼굴로 부스스 잠에서 깬 화산의 제자들이 얼굴을 썩썩 문지르며 마른세수하고 있었다.

“으⋯⋯. 입 돌아가는 줄 알았네.”

조걸이 진저리를 쳤다.

사실 들판에서 야영하는 것 따위는 그들에게 딱히 대단한 사건도 아니다. 저 모진 놈을 따라다니느라 길바닥에 드러누워 자는 것 정도는 일상처럼 겪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번엔 유독 몸에 한기가 스미고 쑤시는 건, 지금 그들의 몸이 그만큼 축나 있단 의미일 것이다.

“그래도 어제 당가 분들이 몸을 살펴봐 주셨잖아.”

“예, 사형. 안 그래도 덕담 한마디 해 주시더라고요.”

“음, 그래? 뭐라 하시더냐?”

“서른 전에 요절하고 싶으면 계속 지금처럼 살라고 하시던데요?”

⋯⋯윤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실 지금 오검은 하나같이 몸이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여유를 만들어서라도 요양을 하고 몸을 회복해야 할 상황이었다. 특히나⋯⋯.

“사숙, 괜찮으십니까?”

윤종의 걱정 섞인 물음에 백천이 슬쩍 돌아보았다.

“⋯⋯얼굴이 많이 창백하신데.”

“내 얼굴은 원래 하얗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창백⋯⋯.”

“창백하도록 하얗지.”

“⋯⋯.”

‘부럽냐?’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얼굴 한껏 드러낸 백천을 보며 윤종은 말을 잃고 말았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인간은 그냥 뒈지는 게 나을 것 같다.

윤종이 고개를 돌려 당가 사람들을 흘끗 보았다.

“그보다, 분위기가 말이 아니군요.”

“음.”

그 말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빈자리는 바로 실감 나지 않는다. 저들도 어제까지는 경황이 없어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 휴식을 취한 지금은 실감이 날 테다.

함께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던 이들이 이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 살아남은 이들은 사천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한다.

“걱정입니다. 저분들이 잘⋯⋯.”

“거, 별게 다 걱정입니다.”

“⋯⋯응?”

윤종이 의아한 시선으로 조걸을 보았다. 조걸의 얼굴엔 배알이 뒤틀린단 표정이 걸려 있었다. 윤종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너는 또 뭐가 불만이라 그러냐?”

“거,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화산이 당가를 왜 걱정합니까? 저 양반들이 뭐 전각 몇 개 불탔다고 당장 망할 사람들로 보입니까?”

“⋯⋯.”

“지금도 당가가 화산보다는 사정이 좋을 테니 사형은 우리 걱정이나 하십시오.”

윤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조걸의 말이 그리 틀린 건 아니다. 어쨌든 당가는 싸울 수 있는 전력을 보존했고, 아직 막대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사천당가가 처한 상황은 조걸의 말처럼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중요한 건 저들에게 이제 잃을 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선대와 무학의 정수를 잃은 화산이 몰락 직전까지 내몰렸듯이, 사천당가도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아무리 당군악이 있고, 싸울 수 있는 이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말이다.

지금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를 거듭하여 갈수록, 그 몰락은 거짓말처럼 급격하게 쏟아지듯 다가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가장 고통스러울 이는 가주님이 아니라 소가주님일지도 모르겠군.’

윤종의 시선이 당패에게로 향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노인들을 돕고 있었다.

생각이 많을 것이다. 윤종이 저 입장이었다면, 지금쯤 고민과 부담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터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주님은 어디 계시지?”

“그러게? 아까부터 안 보이시던데?”

화산의 제자들이 당군악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그때였다.

“저기 오신다.”

조금 먼 들판 쪽에서 걸어오는 당군악의 모습이 보였다.

백천이 나직이 신음과도 같은 탄성을 흘렸다. 당군악의 표정이 어제와는 달리 조금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워낙 표정 없는 사람이니 그저 백천의 느낌뿐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당가인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간 당군악은 가볍게 손짓했다.

“소가주.”

“예, 가주님.”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당군악에게 다가간 당패가 고개를 숙였다.

“곧 떠날 준비가 끝날 것입니다. 문제없도록⋯⋯.”

“아니. 일단 모두 하던 일들을 멈추고 모두 한곳으로 모이도록 해라.”

“⋯⋯예?”

당패가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획 들었다. 하지만 이내 당군악의 의도를 이해했다는 듯 답했다.

“예. 무인들을 모으겠습니다.”

“나는 분명 ‘모두’라 했다.”

“⋯⋯가주님?”

당군악이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당씨 성을 가진 모든 사람. 말을 할 수 있고,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이라 해라.”

당패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당군악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아는 한, 당가에선 유례가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사천당가는 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안에선 엄격한 구분이 존재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숨겨야 할 비전이 있고, 그러므로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심지어 각 책임자를 모으는 것도 아니고, 모두를 모으라니.

“아직 이해 못 했느냐?”

“아, 아닙니다. 가주님, 이해했습니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당패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당씨 성을 가진 모든 이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이 그 모습을 꽤 떨어진 곳에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딱히 당가 사람들이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 한 적은 없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뭔가 신기한 광경이네요.”

“그렇구나.”

사천의 명문 사천당가. 오대세가에서도 최소 이인자의 자리는 확보한다는 그 명문가의 사람들이 이런 황량한 들판에 다붓하게 모두 둘러앉은 광경을 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말이냐?”

“여기가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잖습니까?”

윤종의 말에 백천이 슬쩍 남쪽을 주시했다.

확실히 만인방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다시 공격해 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특히 저 장일소라면 이 순간에도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수작을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

“가주님이 그런 걸 모르실 분은 아니잖으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둘 중 하나겠지. 절대로 만인방이 다시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거나⋯⋯.”

백천의 시선이 당가 사람들의 중앙에 앉은 당군악에게로 꽂혔다.

“지금 이곳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만인방의 위협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시거나.”

“⋯⋯후자겠네요.”

윤종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이해는 하겠습니다만⋯⋯ 이런 곳에서 저렇게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금방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요?”

“쯧쯧쯧.”

그때, 묘하게 비난이 섞인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종은 떨떠름하게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마귀 놈이 백 살 먹은 노인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나이도 어린 게 어찌 이리 꽈아아악 막혔을꼬?”

“너보다 많아⋯⋯.”

그리고 내가 사형이야, 청명아.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해결책을 찾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 게 중요한 거지.”

“응?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데?”

“그 자리에서 반드시 올바른 결론을 내야 한다면, 입을 열 사람은 정해져 버리거든.”

“아⋯⋯.”

윤종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생각이 있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한 경험 말이다.

“중요한 건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거야. 누구라도 입을 열고, 누구라도 제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 생각이 무시당하지 않게끔 하는 것.”

“⋯⋯그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니냐?”

“그래, 당연한 거지. 그 당연한 것이 당가에서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고.”

당가는 많이 변했다. 분명 이번 생에 청명이 처음 당가에 방문했을 때와는 큰 차이가 생겼다.

하지만 그건 원로원과의 권력투쟁에 승리한 당군악이 청명의 말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일 뿐이다.

만일 당군악이 아닌 당패가, 당패가 아닌 당잔이 청명의 말에 호응했다. 그리고 당군악이 청명을 적대했다?

그럼 당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패나 당잔이나 과거의 당보와 같은 길을 걷게 됐을 것이다.

“철저하게 나뉜 위계로 한계를 정하기보단, 누구라도 가문을 위해 입을 연다.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들으며 더 나은 길을 모색해 간다. 단순히 과거부터 이어 온 것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와 결별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

청명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스쳤다.

그 당연한 걸 위해 당보는 평생을 노력했다. 그리고 끝내 살아생전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이 광경은 당보가 사는 동안 그리고 또 그렸던 광경일지 모른다.

청명은 새삼 당군악에게 감탄했다.

‘대단한 사람이지.’

절망으로 거의 무너졌던 이가 하룻밤 만에 감정을 수습해 내고 다시 나아간다. 결론을 내릴 수는 없어도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청명은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 만일 그놈이 사천당가의 가주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역시⋯⋯.

“⋯⋯당가가 망했겠지.”

“응? 망한다고?”

“아, 아니야.”

청명이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이 순간에도 당군악은 심각한 얼굴로 가솔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당군악이 가주인 건 당가의 입장에선 더없는 천운일지도 모른다고 청명은 생각했다.

그러니 당가인들도 행복하겠⋯⋯.

“저기 싸우는데?”

“응?”

“어어. 비도 날아간다.”

“어?”

“와, 저거 진심 아니냐?”

청명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그간 서로에게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고요하게 시작되었던 자리는 금세 난장판이 되고 있었다.

“가족끼리 모여서 산다고 꼭 사이가 좋은 건 아니구나.”

“사숙이 그런 말을 하니까 우습다?”

“내, 내가 뭘?”

당황하는 백천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럴 만도 하지.’

엄격한 법도와 완벽한 위계, 그리고 가문 내에서만 통하는 신분. 당가인들은 평생 그 겉치레에 시달려 왔다.

그런데 그 법도의 수호자인 가주가 직접 그 위계를 풀어낼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 쌓인 게 터져 나올 만도 하다.

“저, 저거 진짜 난리 나는 거 아냐? 난장판인데?”

“걱정할 것 없어.”

청명이 피식 웃었다.

“당가주님이 뭐 애도 아니고, 이런 것 하나 예상 못 하셨겠냐? 다 알고 계셨겠지. 지금 보나 마나 흐뭇하⋯⋯.”

청명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당가주님?”

모두의 시선이 당군악에게로 향했다.

“⋯⋯저기 저분 말하는 거지? 응, 청명아?”

드잡이질해 대고 있는 가솔들 사이, 당군악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예상 못 하셨나 본데?”

“저거 표정이 ‘살려 줘.’ 같은데?”

“청명아?”

당군악을 빤히 보던 청명이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 하나가 그를 보며 방긋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당가 개판이라니까.

“야, 이 씨⋯⋯.”

이 정도인 줄은 몰랐지. 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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