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3화.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3)
“확실히⋯⋯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
“그게 꼭 가주님이 말한 것처럼, 가문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게 아니라고 해도 말이에요. 분명 있었겠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당군악이 청명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으론 작은 위로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다못해 따끔한 질책이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그에게 위로도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인정했다.
“그래서 힘든 거겠죠.”
“⋯⋯뭐가 말인가?”
“최선이라는 게 있으니까. 어떤 선택을 해도 잘못한 게 있을 테니까. 어쩌면⋯⋯ 어떤 후회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할 기회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사람은 결국 그럴 수 없다는 말을 청명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건 지금의 당군악에게 어떤 의미도 없으리란 걸 알아서.
“그런데 뭘 어쩌겠어요. 일은 이미 벌어졌고, 잡고 있어 봐야 어쩔 수 없는 건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어떻게든 저지른 짓을 짊어지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뿐이죠.”
“자네처럼 말인가?”
청명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군악은 잠시 눈을 감았다.
줄곧 대단하다고 생각해 왔다. 사람으로든, 무인으로든 청명의 대단함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찌 보면 천하에서 가장 청명을 높이 평가하는 이가 당군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 당군악은 그런 높은 평가조차 청명이 걸어온 길을 논하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화산은 근본이라 부를 것이 모두 무너지고, 망할 일밖에 남지 않은 문파였다. 그런 문파를 보며 어떻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풍전등화인 지금의 당가조차도 몇 해 전의 화산에 비하면 사정이 낫다. 당군악을 비롯한 모든 당가의 무인들이 죽어 나가고, 무학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가솔들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있어야 겨우 그때의 화산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지독한 상황에서도 화산은 되살아났다.
그러니 당군악도 그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
“자네였다면⋯⋯.”
이윽고 눈을 뜬 당군악이 청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가의 가주가 자네였다면, 나보다는 나았겠지.”
“⋯⋯.”
“자네라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당가를 다시 반석에 올릴 수 있을 테지. 자네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 말을 들은 청명이 나직이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솔직히 그렇네.”
“정말 제가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온 사람으로 보이세요?”
청명은 고개를 젖혔다. 하늘이 쏟아지기라도 할 듯 눈에 가득 찼다.
당군악은 저 무수한 별이 선조들의 눈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지금 청명의 눈에는 저 별들이 무엇으로 보일까?
“제가 정말로 가주님 말씀대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지나간 과거는 돌아보지 않고, 내린 선택을 의심하지 않고,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 최선이었다고 꿋꿋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잠시 침묵하던 청명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저도 좋았겠죠. 네, 그럼 저도 소원이 없겠네요.”
청명은 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다 믿고 있다 해도, 그건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자네⋯⋯.”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그런 인간이 못 돼요. 오히려 오래전에 떠나 버린 과거만 붙들고 있고, 내가 내린 선택을 끝도 없이 의심하고, 이미 저지른 일을 부여잡느라 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 사람이에요.”
믿지 못할 말에, 당군악은 청명을 빤히 응시했다.
“지금도?”
“네. 지금도요.”
문득 당군악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이 상황이 아니라면 꺼내서는 안 될 물음. 아니,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라도 해서는 안 될 질문.
하지만 당군악은 결국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자네⋯⋯ 해남으로 향했던 것을 후회하는가?”
청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만 물끄러미 올려다볼 뿐이었다. 색깔 없는 침묵. 하지만 그 안에는 너무도 많은 대답이 담겨 있었다.
“글쎄요.”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대답을 하긴 해야겠는데⋯⋯. 네, 후회하죠.”
“⋯⋯.”
“그런데 과거로 돌아간다면, 결국 저는 똑같이 해남으로 갈 거예요.”
당군악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래서 똑같은 짓을 하고 또다시 후회하겠죠. 머저리처럼.”
“⋯⋯어째서인가?”
“가주님은 다르세요?”
물음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당군악은 입을 닫았다.
“모두 겪으셨죠. 그리고 지금 그 결정이 불러온 결과를 두고 신음하고 계시잖아요. 가주님은 하루 전으로 돌아가면 어떤 명을 내리실 거죠? 모두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터전을, 독고와 공방을 지키라고 하실 건가요?”
당군악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실감하고 있다. 그가 무엇을 잃었는지. 당가가 무엇을 잃었는지. 그 대가로 앞으로 사천당가가 얼마나 힘겨운 길을 걸어야 하는지.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결정을 내릴 거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침묵할 뿐이다.
“아니겠죠.”
“⋯⋯.”
“가주님도 마찬가지예요. 후회하고 절망하고, 자기가 내린 선택이 끔찍했다고 저주하면서도 다시 같은 선택을 하겠죠. 그리고 다시 머저리처럼 후회하고 절망하겠죠.”
당군악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할 수 없다.
어떤 것도 잃을 수 없다. 하지만 모두를 지킬 길은 없다.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 그런 선택에서 후회를 남기지 않을 방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실로 가혹하게 느껴지는군. 가주가 이런 자리인 줄 알았더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청명은 당군악의 말을 딱 잘라 부인했다.
“가주기 때문에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람은 누구나 선택을 하고 살잖아요. 손에 쥔 걸 버려야 하는 선택을 말이에요. 잃고 싶지 않지만 그래야만 할 것들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따져 가며, 그렇게 사람은 닳아 가는 거죠.”
그렇게 무뎌진다. 처음에는 살점을 떼어 내는 것처럼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굳은살을 벗겨 내는 것처럼 덤덤해진다.
이곳에 남아 있는 이들은 그저 무뎌지지 못했을 뿐이다.
아직 세월을 덜 뒤집어써서 슬퍼하는 법을 채 다 씻어 내지 못했을 뿐이다.
“어떻게 나아가는가?”
당군악의 눈에 절박함이 넘실거렸다.
“그리 모든 것을 후회하고, 모든 것에 절망하고, 그 하나하나에 닳아 버린 이는 어떻게 다시 나아갈 수 있는가? 대체⋯⋯ 어떻게 다시 자신이 내릴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명이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거꾸로겠죠.”
“⋯⋯거꾸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며, 의지견정한 게 아니라⋯⋯.”
청명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잃는 게 너무 무서우니까, 조금이라도 덜 잃기 위해서 나아가는 거예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면 이제 하염없이 잃는 것밖에 남지 않으니까.”
씁쓸히 뇌까리는 목소리가 고요한 들판에 퍼졌다.
“아마 다들 마찬가지 아닐까요. 남들이 보기에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겠죠. 더 멀리 보는 이들은 남들이 아직 겁내지 않는 일을 미리 겁내는 이들일 테고.”
“⋯⋯.”
“뭔가⋯⋯. 뭔가 대단한 걸 이뤄 내는 이들은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멍하니 듣던 당군악이 잠시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세상이 영웅이라 부르는 이들은⋯⋯ 사실 지독한 겁쟁이였을지도 모른단 소리로군.”
“이상한가요?”
“이상하지는 않네.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이상하다고 여겼겠지만⋯⋯ 자네가 하면 이상하지 않지.”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뤄 내는 그 지독한 겁쟁이가 바로 눈앞의 이 청년이지 않은가.
다른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일을 미리 겁내서 어떻게든 나서려 드는 구차한 머저리.
“그럼 화산검협.”
“예, 가주님.”
“그럼 나는 무엇을 겁내야 하겠는가?”
당군악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향한다. 별들은 여전히 무겁고,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나는 자네처럼 훗날을 걱정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걱정하지 않는 것을 미리 알아채 걱정할 정도로 세심한 위인도 아닐세. 지금 나는 그저⋯⋯ 세상 모든 것이 두렵고 겁나는군.”
희미하게 떨리고 흔들리는,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당군악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자네의 말은 맞지만 틀렸네. 적어도 자네는 무엇을 가장 겁내야 하는지 아는 겁쟁이지. 하지만 나는 자네 같은 겁쟁이도 될 수 없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겁나는 겁쟁이지.”
“⋯⋯.”
“그러니 화산검협. 대답해 주게나. 나는 무엇을 겁내야 하는가?”
그러자 청명이 당군악을 보며 물었다.
“그건 당군악으로서의 물음인가요? 아니면 당가의 가주로서의 물음인가요?”
당군악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청명이 말했다.
“당군악이라는 한 사람으로서 묻는 거라면, 어차피 당신 책임도 아니니 쓸데없는 걱정 같은 건 집어치우고 잠이나 주무시라고 대답해 드릴게요.”
“⋯⋯다른 의미로 가혹하군.”
“그리고 그게 만약 당가의 가주로서 묻는 거라면, 제게 물으시면 안 되죠.”
당군악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홀로 고민해야 할 문제라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여 인정하려는 순간 청명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직접 물어보세요.”
“⋯⋯.”
“가주님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별, 수많은 눈. 사천당가를 지켜 온 선조들이 지금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보고 답을 구해도 그들은 침묵하며 그저 바라볼 뿐이다.
당군악이 바라는 대답은, 하늘에서가 아닌 그의 곁에서 들려왔다.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작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당가는 왜 생겨났을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사천당가를 무가로 만들고, 후손들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던 선조들은 무얼 위해 그런 일을 한 걸까요?”
사천은 중원에서 괄시받던 곳이다.
그런 곳에서, 성도라는 사천의 도시가 아직 제 모습을 갖추지도 못했을 때, 당가의 선조들은 당씨 성을 가진 모든 이들이 함께 살 수 있는 터전을 꾸렸다.
자신을 스스로 단련하는 법을 가르치고, 독으로 제 몸을 지키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방법을 영원히 이어 가라 했다.
어째서?
당군악의 눈이 조금 커졌다. 별들이 금방이라도 그에게 쏟아질 것 같았다.
“대답은 없겠죠. 죽은 사람은 대답이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저들이 대답할 수 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청명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로, 그가 아닌 다른 이의 의지를 담아.
- 저놈들은 중요한 게 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독이 아니에요.”
- 목적을 위해 수단을 지키다가, 이제는 수단이 목적을 먹어 버렸다니까요? 멍청한 놈들이.
“독도 암기도 그저 수단일 뿐이죠.”
- 형님, 나는 안타까운 겁니다. 가문을 위해서 만들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되레 가문의 목을 옥죄고 있습니다. 처음 당가를 세운 양반들의 의도가 어디 그랬겠습니까?
“그 수단이 당가를 방해한다면, 없느니만 못하죠.”
- 중요한 건.
“중요한 건.”
- 당가의 후손들이 어떻게 해야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이거 아닙니까? 거기에 방해가 된다면 독도, 암기도, 가문의 법도마저도 구차한 장애물일 뿐입니다.
“선조들이 당신들께 전하려 했던 뜻이죠. 그저⋯⋯.”
청명이 눈을 감았다. 그가 전해야 할 말이다. 그가 전해 주어야 할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청명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당보의 목소리가 되어, 선조의 목소리가 되어, 그리고 잃어버린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행복해라⋯⋯.”
청명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차마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오래도록 전해지지 못했던 말이, 또 전해졌음에도 닿지 못했던 그 말이, 마침내 백 년의 시간을 넘어 청명의 어깨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