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1화.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1)
“장문인. 정말 이리 돌아가실 것입니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진초백의 물음에 종리곡이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말인가?”
“점창 말입니다.”
종리곡은 침묵했다. 진초백이 재차 말했다.
“물론 말씀하신 대로 지금부터 점창으로 향한다 해도 이미 늦기야 했겠지만, 그렇다고 이리 돌아가 버린다면 강호가 종남을 두고 정 없다며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종리곡이 차갑게 조소했다.
“우리가 봉문 한 사이에 세상은 달라졌네. 이제는 체면 따위가 중요한 세상이 아니네.”
“⋯⋯그건 확실히⋯⋯.”
“이미 난세에 접어들었네. 이런 시대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실력을 갖추고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지.”
진초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곡이 묘한 얼굴로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왜. 두고 온 자식 놈이 마음에 걸리기라도 하는가?”
잠시 침묵한 진초백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의도로 드린 말이 아님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농 한번 해 본 것뿐일세. 자네 아들이 무척이나 헌앙해서 말이야.”
종리곡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어떻게든 종남에 남겼어야 했거늘.”
“⋯⋯죄송합니다.”
“그게 어찌 자네가 죄송할 일인가? 자식 농사는 천자도 제 뜻 같지 않은 법인데. 다만⋯⋯.”
“예?”
종리곡이 말없이 앞을 응시하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나가 아닌 게 문제로군.”
뜬구름 잡는 듯한 말이었지만, 진초백은 종리곡이 한 말의 의미를 곧장 이해했다. 그저 백천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를 지키는 화산의 제자 하나하나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종화지회에서 종남의 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짓밟히던 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불과 몇 해 만에⋯⋯.”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강호의 다른 이들은 이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모양이지만, 종남의 입장은 다르다. 몇 해의 봉문으로 강호와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 변화의 폭이 더없이 확연하게 실감되었다.
그때 진초백이 우려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문인.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무엇이 말인가?”
“지금이야⋯⋯. 예, 솔직히 지금은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화산이 아무리 활개를 쳐 봐야 저들은 결국 제대로 된 장로 하나 없는 문파 아닙니까?”
“그렇지.”
“강해 봐야 아이들입니다. 지금이야 과히 얻어 놓은 명성으로 부풀려져 있을 뿐, 화산의 전력은 감히 종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종리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리 생각한다.
“그런데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하지만⋯⋯ 십 년, 이십 년 뒤에도 그렇겠습니까?”
“⋯⋯.”
“지금 화산의 일대제자들이 화산의 장로가 될 시기가 왔을 때, 그때도 과연 종남이 화산보다 앞서 있다 자부할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종리곡이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래도 자네에겐 큰아들보다는 막내가 더 아픈 손가락인 모양이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아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건 없을 걸세.”
“예?”
종리곡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세상에서 선인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야 선을 행함이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까?”
“쯧쯧. 이보게. 어렵다고 행하지 않는 이는 이미 선인이 아니잖은가? 그건 맞지 않은 대답일세.”
“그럼⋯⋯?”
“이유는 간단하네.”
종리곡이 옅은 비웃음을 흘렸다.
“다 죽었기 때문이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진초백은 순간 멍하니 종리곡을 돌아보았다. 그 표정을 본 종리곡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는가?”
“장문인. 그게 무슨⋯⋯.”
무슨 괴이한 말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종리곡의 말이 더 빨랐다.
“농담일세.”
종리곡은 정말로 농담이었다는 듯 빙그레 웃었지만 진초백은 알고 있다. 이 말이 결코 단순한 농이 아님을 말이다.
“장문인. 혹여 화산을⋯⋯.”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예?”
종리곡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다시 뜻 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보게, 초백이.”
“예, 장문인.”
“자네는 좋은 아비가 어떤 이라 생각하는가?”
진초백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 자신이 제대로 된 부모가 아님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진정 좋은 아비였다면, 제 아들이 지금 화산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잘⋯⋯.”
“나는 그리 생각하네. 아이에게 제대로 된 것을 알려 주고, 옳은 길을 가게 하는 이? 아니, 그런 게 아니지. 제대로 된 부모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제 자식을 보호하는 이라네.”
진초백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종리곡은 같은 곳을 일별하더니 말했다.
“보게나. 곧 우리가 밟은 이 땅이 붉게 물들 걸세. 이곳뿐만 아니라 수많은 곳이 마찬가지겠지.”
“⋯⋯그럴 것입니다.”
“내 목표는 하나일세. 땅을 적실 그 피 중, 종남이 흘리는 피를 최대한 줄이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비겁한 소인배든, 악인이든 뭐든 될 자신이 있다네. 어떤가? 자네는 그런 나를 손가락질할 텐가?”
진초백이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종남인이 아니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재미있는 대답이로군. 하하하.”
한바탕 웃어 젖힌 종리곡의 뇌리에 현종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결국 사람의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 현종은 아무리 변해도 결국 현종이었다.
“너무 늦지는 말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아들 말일세.”
종리곡이 웃었다.
“너무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르네. 종남의 품은 넉넉하여 돌아온 탕아 정도는 품을 수 있으니, 시기를 놓치지 말게나.”
진초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참고로, 이건 농이 아닐세.”
“장문인⋯⋯.”
“가세나.”
종리곡이 속도를 올려 진초백을 앞서갔다. 갈 길이 다급해서가 아니다.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을 진초백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화산.’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천하를 집어삼킬 듯 명성을 날리던 문파가 어디 한둘이었는가?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해 온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바로 지금의 화산처럼 말이다.
‘그리되겠지. 당연히 그리돼야겠지.’
하지만 만약에⋯⋯ 저 화산이 그 모든 것을 이겨 낸다면? 그리하여 자신들이 그 모든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문파임을 증명한다면?
그렇다면 과연 천하의 누가 저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종리곡의 눈이 어둑해졌다.
‘망상 같은 일이로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 ❀ ❀
“가주님. 시신을 모두 수습했습니다만⋯⋯.”
당군악은 뒷말을 재촉하는 대신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보고하던 이가 말끝을 흐리는 이유야 뻔하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서 수습한 시신들을 성도로 옮겨 당가에 묻었을 것이다. 식솔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이들에게 그 정도 대우는 해 주어야 합당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당가는 이미 불타 버렸고, 사천 땅은 만인방이 장악했다.
“시신을 묻어라.”
“⋯⋯예, 가주님.”
훗날 다시 찾아오기 수월하게 묘비를 확실하게 세우라는 말을 덧붙이려던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그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외가, 이곳에서 스러져 간 이들이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살아남은 가솔들을 이끌고 당가의 부활을 꾀하라 일갈하겠지.
“가주님, 이제⋯⋯.”
곁에 다가와 질문을 하려던 당패는 당군악의 얼굴을 보며 순간 입을 다물었다.
원래 묻고 싶었던 것은 ‘이제 어찌하실 셈입니까?’였다. 하지만 지금 당군악에게 그 질문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소가주.”
“예, 가주님.”
“야영을 준비해라.”
“⋯⋯이, 이곳에서 말입니까?”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밤이 온다. 지친 이들을 이끌고 밤길을 이동하는 건 무리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쉬어 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당군악이 당패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내일 해가 밝는 즉시 모두를 준비시켜라.”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당군악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당패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몸을 돌려 가는 당패를 가만히 지켜보던 당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글쎄.’
노을이 진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로 가야 할까.’
들판에 어둠이 내렸다.
준비 없이 들판에서 야영한다는 건 생각만큼 수월한 일이 아니다. 특히나 무학을 익히지 못한 아이들과 여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일에 익숙할 만큼 익숙한 화산의 제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여인들은 칭얼대는 아이들을 달래 가며 돌보고, 장인들은 그 와중에도 용케 그들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천막을 쳤다.
타닥.
곳곳에 피워 올린 모닥불에서 새빨간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그 모닥불을 말없이 바라보는 당가인들의 얼굴엔 금세 깊은 수심이 내려앉았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 나니 새삼 실감이 난 것이다.
그들이 집을 잃고 방황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
심지어는 어쩌면 두 번 다시 사천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거운 공기가 삼삼오오 모여앉은 중인들 사이로 내리깔렸다.
“지시하신 대로 솥과 곡식을 구해 왔습니다. 얼른 죽을 준비하겠습니다.”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가인들이 여기저기 모닥불 위에 솥을 걸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군악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어느새 그의 지척까지 다가온 현종이었다. 감히 위로의 말도 섣부르게 건네지 못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가 더 도와드릴 일은 없겠습니까?”
당군악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까지 오느라 지치기는 했지만, 저들이 그리 쓸모없지는 않습니다. 이젠 당가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니 염려치 마십시오.”
현종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당군악을 보았다.
어찌 이리 강인할 수가 있을까?
현종이 같은 일을 당했다면⋯⋯. 적의 공격에 화산이 죄 불타고, 제자들을 잃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지금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군악은 그 와중에도 사천당가 가주로서의 품격을 지켜 내고 있다.
“가주님.”
“나쁘게 생각하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사람은 살렸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현종이 눈을 감았다.
이 말을 듣고 있으니, 종리곡의 말에 상심했던 자신이 너무 못나게만 느껴졌다. 그보다 훨씬 더 힘들 당군악도 이리 심지가 굳은데.
그때 당군악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감사드립니다.”
당황한 현종이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가주님!”
“맹주님께서 결단을 내려 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들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게 어디 제가 내린 결단입니까. 어서 고개를 드십시오. 어서.”
자연히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조금 먼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종은 한숨을 쉬었다.
“당가주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사숙.”
“뭐가 말이냐.”
“이런 일을 겪으셨는데도 평소와 다름이 없으시잖습니까. 저는 흉내도 못 내겠습니다.”
“그러니 가주님이신 거지.”
조걸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는데.”
“⋯⋯걸아, 사람끼리 대화하고 있잖니.”
“예? 그거 무슨 의밉니까?”
“자. 저기 죽 있다, 죽.”
“근데 이 양반이?”
오검이 툭탁거리며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무거운 공기와 이를 외면하려는 듯 담담한 대화, 그리고 억지로 분위기를 띄워 올리는 듯 과장된 장난들.
그 많은 것이 뒤섞인 이곳에서 청명은 그저 말없이 당군악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단해 보이기만 하는 그 등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