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0화. 그래, 기억해 두지. (5)
잠시 후, 청명에게서 금세 시선을 떼 버린 종리곡이 현종을 향해 정중히 포권 했다.
“그럼.”
현종도 일단 얼결에 종리곡을 향해 포권 했다.
“입장이야 다르지만, 결국 모든 것이 강호를 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귀 문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귀 문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당군악에게도 똑같이 포권 한 종리곡이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
“가자.”
“예, 장문인!”
종남의 검수들이 화산의 제자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화산의 제자들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데, 이송백이 넌지시 청명과 오검을 향해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저리 말씀하시지만, 저는 꼭 그리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
“그리고 그리 생각하는 것이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이송백이 청명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 말인즉, 종남의 윗대와 아랫대의 생각이 다르다는 말이었다.
“경쟁한다고 해서 손을 잡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오히려 경쟁하기 때문에 더욱 서로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종남 안에서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고요.”
백천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송백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는 듯.
“그러니⋯⋯.”
“이송백!”
들려오는 냉랭한 목소리에 이송백이 움찔하며 말을 끊었다. 어색하게 뒤를 돌아보니 진금룡이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적당히 해라.”
“죄송합니다, 사형.”
이송백이 겸연쩍은 얼굴로 슬쩍 덧붙였다.
“물론 아직은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요.”
어깨를 으쓱한 그는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포권 했다.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아마 이제는 꽤 자주 뵐 것 같으니까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소협.”
오검이 마주 포권을 했다. 이송백이 고개를 돌려 청명을 보았다.
“청명 도장.”
“음?”
“감사합니다.”
이송백이 청명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건 강호인의 예의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예의였다.
“뭐야, 뜬금없이.”
“도장이 내려 주신 가르침이 제게도, 종남에도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뭔 개소리야. 내가 종남에 왜 은혜를 베풀어? 조심해라, 너희! 내가 언젠가는 종남산에 불 싸지른다!”
이송백이 쿡쿡대며 웃었다.
“그 은혜를 갚는 길은 가르침대로 정진하는 것이라 여기겠습니다.”
“아니, 은혜를 준 적이 없다니까?”
“언제고 제 검을 보여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하겠지만, 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청명은 넋이 나간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몸에서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듯한 그 모습을 보던 조걸이 작게 속삭였다.
“사형⋯⋯. 세상에 천적이라는 게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영원한 평행선이네. 서로 남의 말을 콧구멍으로도 안 듣네.”
“그럼, 언제고 다시.”
이송백이 절도 있게 포권 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송백마저 멀어지는 와중 단 한 사람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왜 안 가십니까?”
백천이 껄끄럽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진금룡에게 물었다.
청명이 화산에 나타나기 전, 그는 평생을 진금룡에게 눌려 살았다. 삶의 목표가 오직 진금룡을 이기는 것이었던 시절이 있을 정도다.
지금은 확신한다. 실력으로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진금룡을 뛰어넘었다. 진금룡이 아무리 더 강해졌다 해도, 싸워 이기지 못할 이유는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껄끄러움은 영 가시질 않았다.
뭔가 무척이나 불만 어린 눈길로 백천을 빤히 바라보던 진금룡이 입을 열었다.
“몰랐군.”
“예?”
“모자란 놈이지만, 막돼먹은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놈들과 어울리다 보니 버릇마저 나빠진 모양이야.”
백천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시비 걸지 말고 갈 길 가십시오.”
“저기 아버지가 계신다.”
진금룡의 말에 백천이 순간 움찔했다.
“도호를 받았다고는 해도, 너는 여전히 진씨 가문의 사람이다. 몇 해 만에 뵌 아버지께 인사도 드리지 않을 셈이냐?”
그제야 백천은 진금룡 너머의 뒤쪽을 넘겨다보았다. 종남의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과연 이쪽을 돌아보는 진초백이 있었다.
“그럴 거면 이름에서 진씨를 떼어 버리는 게 낫겠구나. 너 같은 놈을 그래도 가족이라 생각하시는 아버님이 안타까우니 말이다.”
“같은 말을 해도 꼭⋯⋯.”
백천이 못마땅하게 얼굴을 실룩하며 진금룡을 노려보았다.
“당연히 저는 진씨 가문의 사람이고, 막돼먹은 인간도 아닙니다.”
그 말에 오검이 저들끼리 수군댔다.
“막돼먹은 건 맞지 않나?”
“맞지.”
“여윽시 형제다.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어.”
“시끄러워!”
버럭 고함을 지른 백천이 헛기침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저곳으로 가는 게 아버지께 그리 좋은 일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
“봉문도 푸셨으니 정식으로 한번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리 전해 주십시오.”
진금룡이 백천을 빤히 노려보다 코웃음 쳤다.
“확실히 버르장머리가 없는 게 확실하구나. 제 형을 말이나 전하는 사람으로 써 먹다니.”
“아, 어쩌라고!”
결국 백천이 발끈했다. 하지만 이미 관심을 꺼 버린 진금룡의 시선은 청명에게로 옮겨 가 있었다.
“몰골을 보니 편안하게 잘 지낸 모양이로군.”
“어, 그래요? 그쪽은 그새 성격이 더 나빠진 것 같네요. 아니면 진씨 집안 특성인가?”
“이 새끼야! 엮지 말라고! 놔! 안 놔?”
발악하기 시작한 백천이 오검의 신속한 제압에 붙들려 끌려갔다. 진금룡은 그쪽을 흘끗 보며 혀를 차더니 말했다.
“전에 진 빚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빚? 무슨 빚이요?”
청명은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아, 혹시 비무대회에서 사숙한테 얻어맞으셨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
“⋯⋯.”
“그게 뭐 좋은 기억이라고 여태 곱씹고 계신대? 잊어버리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우실 텐데.”
순간적으로 진금룡에게서 새파란 살기가 쏟아졌다. 하지만 청명은 되레 배시시 웃었다. 진금룡이 짓씹듯 말했다.
“변한 게 없는 모양이군. 다행이다. 혹여나 네놈이 바뀌기라도 했으면 어찌하나 걱정했는데. 마음껏 빚을 갚아 줄 수 있을 것 같군.”
청명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댔다.
“뭐, 그거야 본인 마음이기는 한데⋯⋯ 그게 마음만으로 되나? 실력이 있어야지, 실력이. 안타깝게도 그쪽 실력으로는 여전히 부족할 것 같은데?”
“흥.”
코웃음을 친 진금룡은 청명을 한번 쏘아보더니 검을 잡았다.
순간적으로 놀란 백천이 진금룡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진금룡의 검이 그보다 먼저 뽑혀 나와 청명에게로 눈부신 백색 검기를 쏟아 냈다.
화아아아악!
쏘아져 나온 검기가 청명의 머리 위로 화려한 수를 놓았다.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그 검기에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내 새로운 검이다. 아니, 종남의 새로운 검이지.”
“거⋯⋯.”
청명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설화십이식.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토대로 만들었던 저열한 검법.
하지만 지금 진금룡이 펼친 검은 설화십이식이되 설화십이식이 아니었다. 눈처럼 하얀 검기는 여전하지만, 그 검에서 매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청명의 눈가가 실룩였다.
뭔가 딴죽을 걸고 싶지만, 걸 만한 게 없다. 매화검법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자신들만의 의(意)와 형(形)을 찾아내었다면 그건 종남의 무학이라 해야 한다. 애초에 천하의 모든 무학은 그런 식으로 발전해 온 거니까.
“애는 썼지만⋯⋯ 영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 같은데요. 종남의 검은⋯⋯.”
“그걸 왜 네가 정하지?”
“응?”
청명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진금룡은 그의 사형제들이 있는 곳을 흘끗 뒤돌아보더니 말했다.
“확실히 너의 그 같잖은 말에 혹한 이들도 있는 모양이더군. 종남은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천하삼십육검에 종남의 모든 것이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니까.”
“아니, 그건 틀린 말이다.”
눈살을 찌푸리는 청명을 향해 진금룡이 말했다.
“물론 천하삽십육검은 종남의 근본이며, 종남의 토대다. 하지만 과거만을 답습하여 완벽히 익혀 내기만 추구한다면 종남은 여전히 과거의 종남으로 머물 뿐이다.”
“⋯⋯.”
“종남은 더 강해질 것이다. 지금의 종남이 새롭게 만들어 낸 검으로.”
검을 회수한 진금룡이 싸늘히 일갈했다.
“네놈은 그때까지 목이나 잘 닦아 둬라.”
“요즘은 사파 새끼도 그런 말은 안 쓰는데.”
“흥.”
진금룡이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그럼 간다. 약속은 지켜라, 진동룡.”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그러더니 찬바람이 일도록 차갑게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종남을 보며 모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일이긴 한데.”
“그렇죠. 도움도 받았고.”
“그래. 참 좋은 일이긴 한데⋯⋯.”
백천이 머리끝까지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바람 잘 날이 없겠네.”
“그러게요, 동룡 사숙.”
백천의 주먹이 조걸의 턱주가리에 꽂혔다.
진금룡이 먼저 출발했던 이들에게로 합류하기 무섭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무슨 소리냐?”
“동생분과의 재회를 무척 고대하셨던 것 아닙니까?”
질문을 던진 건 이송백이었다. 진금룡이 성난 눈으로 돌아보았지만 그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주위에 있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웃는 낯에 침을 못 뱉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진금룡은 침은 못 뱉어도 검은 휘두를 사람이 아닌가?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예, 사형.”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진금룡은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몇몇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성격도 좋다니까.’
이 종남 내에서도 진금룡에게 저리 농담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이송백뿐일 것이다. 덕분에 종남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는 너는?”
“예?”
“정작 만남을 고대하던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었나?”
그 말에 이송백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요.”
“그렇게 고대하던 만남에 대한 감상은?”
“글쎄요.”
이송백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잠시 말끝을 흐린 그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잘 보이지도 않을 거리에 청명이 서 있었다.
“여전하더군요.”
“재미없군.”
이송백이 쿡쿡대며 웃었다.
여전하다.
그건 단순히 성격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에게 청명은 여전히 거대한 산 같았고, 나아가 뛰어넘을 수 없는 하늘 같았다. 전신에 상처를 입고 탈진했음에도 전혀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기껍고, 또 즐거웠다. 끝없이 오를 수 있는 산을 발견한 등반가처럼 말이다.
“도장의 검을 견식 하지 못한 건 아쉽습니다. 분명 많은 가르침이 되었을 텐데.”
“이제 신물 나게 보게 될 거다.”
“그렇겠죠.”
차분히 답한 이송백의 눈이 점차 어둑해졌다.
‘장일소.’
사패련이 쉽사리 물러나 버리면서 어정쩡해지긴 했지만, 잠깐 마주했던 그 기세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을 만큼 강렬했다.
이제 종남은 그런 이들을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이송백은 제 허리춤에 찬 검을 가볍게 쥐었다. 물론 무서운 적이다. 하지만 그가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돌아가면 다시 수련부터 해야겠습니다.”
“지겹지도 않나?”
“해야 할 일이니까요.”
진금룡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화산검협을 쓰러뜨리는 건 나다. 새치기는 용납하지 않아.”
“⋯⋯그건 봐야 하는 일이겠지요.”
“뭐라고?”
“먼저 갑니다.”
이송백이 땅을 박차고 훌쩍 앞으로 나아가자 진금룡이 짧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내 이송백이 아니라 뒤로 향했다.
‘진동룡.’
비무대회에서 마주했던 백천에게는 여전히 치기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맞닥뜨린 백천은 한 사람의 무인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형인 그보다 훨씬 더 무인다웠다.
“쯧.”
짧게 혀를 찬 진금룡은 생각했다. 돌아가면 적당한 수련실부터 확보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