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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36화 (1,437/1,567)

1436화. 그래, 기억해 두지. (1)

으드드득!

청명이 이를 힘껏 갈아붙였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어 버릴 듯한 끔찍한 살기가 두 눈에서 넘실거렸다. 그 살기는 먼 거리를 격하여 한 사람에게 틀어박혔다.

피처럼 붉은 장포를 입은 한 남자.

창백해 보일 정도로 흰 얼굴, 그 위로 그어진 핏빛 선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순간 청명의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저놈이다. 바로 저놈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놈의 계략 속에 피를 흘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 악귀의 농락 아래 죽어 갔는가?

아무리 누르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온 감정이 청명의 통제를 거부하고 ‘고함’이 되어 단번에 끓어 넘쳤다.

“장일소오오오오오오오!”

울부짖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터져 버린 화산에서 흘러나오는 용암처럼 지독한 열기를 품은 진노였다.

우우우우웅!

청명의 손에 잡힌 암향매화검도 주인의 분노에 호응하듯 검명을 토해 냈다. 검의 손잡이를 콱 움켜잡은 청명이 단숨에 땅을 박차려 할 때였다.

“멈춰!”

어느새 청명을 바짝 쫓아온 유이설이 뒤에서 강하게 움켜잡으며 만류했다. 그녀는 요동치는 청명의 몸을 꽉 잡아 눌렀고, 재빨리 뒤이어 쫓아온 윤종이 합세해 붙잡고 늘어졌다.

“진정해, 이 미친놈아! 무작정 달려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죽는다고!”

윤종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질끈 깨문 청명의 입술에서 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청명이라고 모르겠는가.

화산의 본대도, 당가의 본대도 아직 이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만인방 본대의 호위를 받고 있는 장일소에게 달려드는 건 과격한 자살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상대는 장일소다. 청명이 홀로 달려든다고 해서 정정당당히 혼자 상대할 이가 아니다. 오히려 기회를 잡았다는 듯 철저하게 다수의 유리함을 살려 청명을 짓밟을 것이다.

그래, 알고 있다.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끓어오른 속이 가라앉질 않았다. 뱃속이 뒤집힌 것처럼 들썩였다. 청명의 이가 입술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청명은 만류해 오는 윤종을 뿌리치고 앞으로 뛰어올랐다.

“청명아!”

안다. 모두 알고 있다. 윤종의 말이 모두 옳다는 걸.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꽈아아아악!

하지만 끝끝내 참아내지 못한 분노는 기어코 그의 검 끝으로 밀려들고 치솟는다. 청명은 얼마 회복되지 못한 내력을 모조리 쥐어짜 암향매화검에 밀어 넣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압!”

한계까지 당긴 활시위처럼 한껏 뒤틀렸던 몸이 순간적으로 튕겼다. 동시에 청명의 검이 쏘아졌다. 불어넣은 내력과 혼연일체가 된 암향매화검은 암운을 뚫고 대지로 내리꽂히는 벼락처럼 장일소를 향해 쇄도했다.

기이이이이잉!

하늘이 뒤틀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윤종과 유이설의 시선이 황급히 앞으로 향했다. 청명의 검에 실린 경악할 만한 위력이 순간적으로 ‘혹시’라는 기대를 품게 한 것이다.

공간을 가르며 쏘아지는 청명의 검과 그 앞에 선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마치 정지된 것처럼 느릿해진 세상 속, 장일소의 양손에 자리한 반지들이 색색의 광채를 흘려 냈다.

숱한 빛깔의 내력에 휩싸인 장일소의 양손이 날아드는 검을 가격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순간이나마 모든 것을 억누르던 정적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깨어지며 어마어마한 굉음이 세상을 격했다.

힘과 힘의 격돌. 내력과 내력이 충돌하는 어마어마한 여파를 이겨 내지 못한 만인방도들은 이내 칠 공에서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갔다.

콰가가가가각!

장일소의 반지 사이에 끼며 가로막힌 암향매화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쳤다. 금방이라도 목을 꿰뚫을 것처럼 반지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검을 보며 장일소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아앗!”

콰아아아아아아앙!

다시 한번 터져 나온 굉음과 함께 암향매화검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장일소의 목을 베지 못한 분기를 토해 내듯 하늘을 찢어발긴 검은 이내 그 힘을 모두 소진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푸욱!

단단한 대지를 두부처럼 뚫은 암향매화검이 장일소의 바로 앞에 절반 이상 깊숙이 박혀 들었다. 이를 빤히 바라보던 장일소가 손을 뻗어 암향매화검을 잡으려는 순간,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반지가 으스러져 그의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또옥.

이어, 으스러진 반지의 잔해 위로 새빨간 핏방울이 떨어졌다. 반지를 바라보던 장일소가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쩍 갈라진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장일소의 눈이 순간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호선을 되찾았다.

“이런, 이런. 과격하기도 하지.”

장일소가 손을 들어 올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느리게 핥았다. 붉은 혀를 내민 채 청명을 주시하는 장일소의 두 눈에선 숨이 턱 막힐 만큼 요사스런 광기가 흘렀다.

“그 꼴이 되어서까지 앞뒤 안 가리고 날뛰다니, 이래서야 누가 도사고 누가 사파 놈인 줄 모르겠는걸? 하하하하하핫!”

내력을 담은 음성은 먼 거리에서도 또렷하게 청명의 귀를 파고들었다.

청명이 주먹을 콱 쥐며 고함을 내지르려는 순간, 장일소와 청명의 시선이 먼 허공을 격하고 서로 얽혔다.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나를 죽이고 싶겠지.”

평온한 목소리에, 청명의 온몸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다른 이들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움찔했을 테지만, 하지만 장일소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도 되레 조롱을 쏟아 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빨랐어도 나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바로 코앞에서 나를 놓쳐 속이 뒤틀리겠지. 그렇지 않니?”

청명의 몸은 연신 요동치며 떨리고 있었다. 타오르는 증오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 보였다.

“하지만⋯⋯ 화산검협.”

환하게 웃던 장일소가 돌연 피에 젖은 손으로 제 얼굴을 움켜잡듯 가렸다.

얼굴을 반쯤 가린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눈에선 더없이 섬뜩한 빛이 쏟아졌다. 아쉬움과 증오, 불길함과 뒤틀린 욕망.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흘러나오는 눈빛은 보는 이들을 절로 움츠러들게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다.”

상황 때문에 죽여야 할 이를 놓아주어야 하는 건 장일소 역시 똑같다. 치러야 할 대가가 제 목숨이 아니었다면 장일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자리에서 청명을 죽여 없앴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아쉬워할 것 없단다. 어차피 너도 알고 있잖니. 너와 내 끝은 정해져 있다는 걸.”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그도 알고 청명도 안다. 두 사람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그가 죽건 청명이 죽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난다. 이제 그들이 하게 될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원한 때문도, 증오 때문도 아니다. 하늘의 뜻? 정해진 순리? 그런 꼴같잖은 말이 끼어들 만한 일도 아니다. 그저 서로를 용납할 수 없을 뿐이다.

“조금만 기다리렴.”

장일소는 제 앞에 꽂힌 암향매화검을 움켜잡았다. 검이 장일소를 거부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검명을 토해 냈다. 하지만 장일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땅에서 뽑았다.

“내가 곧 그 질긴 목숨을 끊어 주러 갈 테니까.”

파아아아아아앙!

장일소의 손끝에서 발출된 암향매화검이 청명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갔다.

하지만 청명은 똑바로 날아드는 검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장일소 하나만을 노리며 쏘아졌다.

서걱!

날아든 암향매화검은 이내 청명의 얼굴을 길게 가르고 스쳐 가 땅에 틀어박혔다.

눈 바로 아래 생겨난 기다란 상흔에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청명과 장일소 두 사람 모두의 얼굴은 서로가 입힌 상처에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청명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올 필요 없어.”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로, 장일소의 목소리처럼 크진 않았다. 하지만 장일소는 누구보다 똑똑히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갈 테니까.”

화려하고 기름한 두 눈에 순간 이채가 스쳤다. 청명이 말을 이었다.

“끝이 정해진 건 너뿐이야. 기다려라. 그 목 반드시 잘라 줄 테니까.”

장일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두 눈이 그믐의 달처럼 휘어진다.

또옥.

무언가 거슬리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에 빠진 것인지, 장일소가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펼 때마다 흘러나온 피가 떨어지며 땅에 스몄다.

까라락.

그럴 때면 장일소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연신 마찰하며 기이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장일소의 반지가 내는 소리가 조금씩 빨라질 때마다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숨조차 마음껏 쉬기 힘든 압박감이 천근만근으로 모두를 짓눌렀다.

한 줌의 내력조차 느껴지지 않는 단순한 손동작인데도 그랬다.

“흐음.”

하지만 그 손은 결국 느슨하게 다시 펴졌다.

동시에 긴장이 풀려 버린 몇몇이 탈진한 것처럼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만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그렇게까지 말하면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잖니.”

장일소의 얼굴에 환희인지 증오인지 모를 감정이 번졌다. 귀기 어린 그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베어 보렴. 내 목은 언제든 여기 있으니까.”

“기억해 둬. 네가 죽는 순간, 너는 반드시 그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될 테니까.”

장일소는 청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핫.”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는 세상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침묵 속에서 장일소의 광소만이 황량한 대지를 채우며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웃어 댄 장일소가 청명을 한번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장포 자락이 크게 휘날렸다.

“그래, 기억해 두지.”

장일소가 느릿하게 발을 뗐다. 그를 호위하던 홍견도 청명을 향해 지독한 살기를 뿜어 내고는 모조리 몸을 돌렸다.

“그럼 또 보자꾸나, 화산검협. 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핫!”

만인방을 대동한 장일소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느긋한 움직임이었다. 남은 이들은 그저 떠나는 장일소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피 몇 방울과 부서진 반지의 잔해만을 남기고 장일소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청명아.”

윤종이 걱정스레 부르자, 그 순간 청명의 이가 입술을 파고들었다.

‘장일소.’

청명이 그 세 글자를 심혼에 새겨 넣는다.

지금껏 그가 이토록 증오했던 건 천마 외에는 없었다.

장일소는 천마와는 다르다.

천마는 말 그대로 인외의 존재. 그 존재 자체로 세상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저 인간이다. 누구보다 인간다운 인간이다. 인간이 가진 악의를 모조리 뭉쳐 만든 인간.

그렇기에 증오스럽고, 그렇기에 위험하다.

청명이 중얼거렸다.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리고 그날, 그의 검은 반드시 저 장일소의 목을 꿰뚫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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