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435화 (1,436/1,567)

1435화.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거요. (5)

적호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처음 그의 귀를 잡아끈 말은 ‘종남’이라는 두 음절이었다.

‘종남이 이곳에?’

물론 종남이 나설 수 있다는 건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무리 봉문을 했다지만 사패련이 본격적으로 섬서에 돌입하면 앉아서 구경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사패련은 아직 섬서 땅을 밟지 않았다. 그럼에도 종남을 자처하는 이가 굳이 이 사천 땅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릴 일이었다.

그러나 적호의 속을 진정 뒤틀리게 하는 건 종남이라는 그 이름보다도 앞을 막아선 이 사내였다.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다. 그렇다면 강호에 명성을 떨치지 못한 자. 게다가 외양을 보아서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단숨에 베어 버리면 될 일인데, 이상하게 적호의 묵도는 생각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설마 이 어린놈의 기세에 눌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럴 리는 없다. 그는 적호다. 이런 애송이에게 밀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쉽사리 도를 뻗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틈이 보이지 않아.’

마치 거대한 벽을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바위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사람은 생각보다 흔하다. 하지만 그 검으로 바위를 단 일격에 쪼개야 한다는 조건이 걸린다면 그 누구도 쉽사리 칼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지금의 적호처럼 말이다.

“종남의 이송백⋯⋯.”

입술을 잘근 씹은 적호가 차가운 눈으로 이송백을 노려보았다. 감히 그를 앞에 두고도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그 고요한 눈을 말이다.

“네놈 혼자서 우릴 막겠다는 것이냐?”

“⋯⋯혼자라고 한 적은 없소.”

적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송백은 동요 없는 얼굴로 그런 적호와 시선을 맞추었다.

“조금 더 늦은 이들이 있을 뿐이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이송백의 뒤쪽에서 한 무리가 빠르게 치달려 왔다.

파앗!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흰 무복 차림의 사내가 이송백 옆에 내려서더니 적호를 쏘아보았다. 이송백과는 다른, 칼날 같은 기도를 지닌 자였다.

“네가 그렇게 눈에 띄는 걸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사내가 말하자 이송백은 적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작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형. 마음이 급해서 그만.”

“하.”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코웃음을 친 사내는 적호를 흘끗 보며 말했다.

“확실히 우리가 조금 늦었군.”

적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자신을 일별한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틀어 뒤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

이제 서른을 갓 넘었을 법한 애송이가 감히 적호의 앞에서 시선을 돌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적호는 인정해야 했다. 그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가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내와 잘 어울린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그건 저 화려한 외양 때문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송백이라고 칭한 자와 똑같이 수수한 무복을 입고 있는데도 이 사내의 분위기는 이송백과 완벽히 달랐다.

이송백이 굳건하게 자라난 거목 같다면, 이 사내는 화려하게 치장된 대궐 같다.

확실한 건, 그 서로 다른 기도 속에서도 차마 무시하지 못할 기세가 확연히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게 종남인가?’

적호의 등골이 절로 서늘해졌다.

이제 겨우 이대제자쯤 되어 보이는 이들이 이리 대단하다면, 종남의 장로나 일대제자들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구파일방의 중심은 소림과 무당, 그리고 종남이라더니 그 말이 과연 허언은 아닌 모양이었다.

탁! 타악!

이내 그런 두 사람의 중심으로 수십의 검수들이 도열했다.

“대사형!”

“길게 말할 것 없겠지. 놈들을⋯⋯.”

“사형. 장문인의 당부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

옆에서 묵직하게 던지는 말에, 화려한 외양의 사내가 말을 끊더니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들을 구하는 게 먼저다. 함부로 날뛰지 마라.”

“예!”

적호의 눈이 절로 가라앉았다.

‘제길.’

당가의 잔당들이 종남을 지나쳐 멀어져 갔다. 하지만 적호는 그들을 잡을 수 없었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 종남의 검이 발목을 잡고 늘어질 테니까.

‘왜 하필 이때!’

적호는 차오르는 노기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러다 이내 살기 번뜩이는 눈을 부릅떴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나는 명을 이행할 뿐이다.’

적호의 도에 순간적으로 내력이 치솟는 순간이었다. 평온한 목소리가 울렸다.

“물러나렴.”

적호가 고개를 획 돌려 말을 한 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장일소가 악전고투를 치르고 있는 장로들을 넘어 그의 지척까지 와 있었다.

물러나라고? 여기까지 와서? 고작 이 몇 놈 때문에?

적호의 눈에 순간적으로 반발심이 치솟는다. 도를 잡은 그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적인 노기는 이어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단번에 얼어붙어 버렸다.

“적호.”

“⋯⋯.”

“내 말이 들리지 않니?”

이송백과 진금룡을 흘끗 일별한 적호가 입술을 깨물고 땅을 박찼다. 장일소의 옆에 내려선 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이해한단다. 나도 속이 끓으니까. 하지만⋯⋯.”

진금룡과 이송백, 그리고 그 주위로 도열한 종남의 제자들을 보며 장일소가 눈꼬리를 묘하게 휘었다.

“별수 없잖니. 욕망은 좋지만,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어린 범 뒤에는 반드시 제 어미가 있으니 아마 곧 도착하겠지.”

적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미 범. 그건 종남의 본대를 말하는 것일 터. 그가 조금 전 떠올렸던 종남의 주력이 지금 이곳으로 밀려들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겠지. 정말 위험한 놈들이 오고 있잖니.”

그 말에 적호가 눈을 감아 버렸다.

확실히 틀리지 않은 말이다. 종남까지야 어떻게 상대해 볼 수 있겠지만, 아마 지금 이곳으로 화산이 오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가도.

만인방은 강하다. 하지만 강함은 상대적이지 않은가. 화산과 종남, 사천당가라는 세 문파를 상대하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입장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아마 사천이라는 거대한 땅 위에서 사패련이 필사의 도주극을 펼쳐야 할지 모른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과욕은 금물이지. 그럼 이만 돌아갈까?”

“⋯⋯련주님의 말씀이 더없이 옳습니다. 하지만 저놈들 정도는 죽여 없애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적호의 두 눈이 이송백과 진금룡에게로 향했다. 장일소 역시 그 말에는 회가 동하는 듯,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훑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좀 일찍 말했어야지. 이미 늦었단다.”

“예?”

그 순간 종남의 검수들 뒤로 몇몇 인영이 날아들었다.

“보렴. 나는 이래서 늙은이들이 싫다니까.”

모두의 시선이 종남에게 집중된 순간, 어디에선가 합류한 당가의 장로들 몇이 종남의 뒤편을 지키고 선 것이다.

이들은 전투의 시작과 함께 이탈하여 상황을 지켜보다 종남의 출현과 함께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당가의 장로들을 보며 적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봐야 몇 놈에 불과합니다만.”

“쯧쯧. 이러니 너희가 항상 당하기만 하는 거란다.”

“⋯⋯무슨 말씀이신지?”

“오만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물론 평지에 홀로 선 당가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지.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밟아 줄 수 있단다. 하지만 그 앞을 막아 줄 방패를 얻은 당가는 고지(高地)를 손에 넣은 명궁처럼 더없이 지독한 적이 돼.”

“⋯⋯.”

“명궁은 비겁할수록 대단하잖니. 그런 의미에서 저 늙은이들은 보나 마나 대단한 자들이겠지?”

그 말에 장로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방패도 작지만 만만치는 않은 것 같고. 이거 내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니까.”

장일소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 진금룡이 입을 열었다.

“사파 놈이 잘도 지껄여 대는구나.”

“⋯⋯흐음?”

“자신 있으면 덤벼라. 그 목을 베어 주지.”

오만한 눈빛을 보며 장일소가 짙은 눈웃음을 흘렸다.

“좋은 말이구나. 그렇게 엉덩이를 빼고 읊으니 모양이 좀 빠지지만.”

“뭐라고?”

진금룡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그가 발작하기 전 이송백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 많은 이들을 죽여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장일소의 두 눈이 이송백에게 가 닿았다.

“그럴 리가 있겠니?”

“그럼⋯⋯.”

“즐겁단다. 무척이나.”

이번엔 이송백의 기세도 살기등등해졌다.

패군 장일소. 종남이 봉문을 한 동안 천하를 피로 물들인 장본인. 생각 같아서는 당장 목을 베어 버리고 싶지만⋯⋯.

‘강하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지독하게 강하다. 온몸이 저릿할 정도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 모두가 목숨을 걸어도 베어 낼 자신이 없었다.

장일소는 손에 낀 반지들을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돌렸다.

“그래 봐야 토끼 주제에, 꽤 건방지구나.”

그러다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건방진 토끼 몇 마리의 버릇을 고쳐 주자고 덫에 걸린 여우 꼴이 될 수는 없지. 돌아가자꾸나. 무서운 범이 오기 전에.”

“예.”

적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장일소가 내린 결정이니 분명 확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때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돌린 장일소가 조소하며 말했다.

“그리고 적호 네 생각처럼 그리 대단한 승리도 아니란다.”

의문 어린 얼굴로 돌아본 적호는 곧 그 말을 이해했다.

피어오른 독연이 걷힌 대지, 그곳에 드러난 광경은 그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기세 좋게 돌진하여 적을 베어 냈던 만인방의 정예들이 하나같이 널브러진 채 경련하고 있었다.

“끄륵⋯⋯. 끄르르륵⋯⋯.”

입에서 붉고 검은 거품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할 만큼 경련하던 이들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제 몸을 스스로 쥐어뜯고 드러난 속살을 할퀴어 댔다. 그렇게 드러난 붉은 속살이 순식간에 또 검게 물들어 갔다.

“으⋯⋯.”

적호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언제⋯⋯.

쓰러진 이들의 수가 무려 오십에 달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수지만, 저들을 상대하기 위해 돌입한 이들은 만인방 내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었다.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장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만한 정예 오십을 잃었다는 건, 이 전투가 결코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적호의 반응을 본 장일소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가가 우스워 보였나 보구나. 한낱 사파 놈 주제에 말이야.”

적호은 얼굴을 굳힌 채 머리를 굴렸다. 사파의 싸움에서도 독은 수없이 경험했다. 그렇기에 파훼하는 법도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상대해 왔던 독과 사천당가의 독은 그 결부터 다름을.

“해, 해독을⋯⋯.”

“흐음?”

적호가 꺼낸 말에 장일소의 시선이 조금 음울해졌다. 마치 그게 지금 네가 내릴 만한 판단이냐고 꾸짖는 듯했다.

“⋯⋯련주님.”

“쯧쯧. 그리 다정해서야.”

장일소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난도질당해 죽은 당가의 장로들과 중독되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제 수하들이 발아래 있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길러 낸 수하들이다. 그런 이들이 몇십에 가까이 중독으로 고통받으며 경련하고 몸부림치고 있다.

“진정한 다정함이란 그런 게 아니란다. 여기는 사천이잖니. 그리고 이곳에는 곧 적이 도착하지. 이런 상황에서 다정이란 건⋯⋯.”

장일소가 경련을 일으키는 제 수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핏발 선 수하의 눈이 필사적으로 장일소를 좇았고, 장일소는 빙그레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여기 있단다.”

콰득.

장일소의 발이 경련하는 이의 목을 단숨에 끊어 놓았다. 파드득 몸을 한차례 떤 수하는 곧 잠잠해졌다.

장일소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알겠니?”

그 순간 그의 양손에 자리한 반지들이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콰득! 콰득!

날아든 반지는 쓰러져 경련하던 이들의 목을 단번에 꿰뚫었다.

“려, 련주⋯⋯.”

“자비란 이런 거란다.”

절명한 수하들을 서늘한 눈으로 일별한 장일소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날카롭게 경계하고 있는 종남의 제자들을 주시했다.

‘종남이라.’

소식을 듣고 바로 움직인다고 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거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천근만근이던 엉덩이가 제법 잽싸진 모양이었다.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지. 항상 변수가 있거든.”

이송백과 진금룡.

그리고 저 먼 곳에서 다가오고 있는 강대한 무리. 그들을 두 눈에 모두 담은 장일소가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자, 그럼⋯⋯.”

여유롭게 한마디를 하려던 장일소가 순간 눈을 부릅뜨고 획 고개를 돌렸다.

적호와 홍견은 그 반응에 깜짝 놀랐다. 장일소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일이 흔치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런⋯⋯.”

장일소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윽고 지독한 살기가 쏘아져 왔다. 이제는 장일소뿐만 아니라 모두가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휩쓴 살기가 쏘아진 곳.

삭막한 대지의 끝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도 멀어 점으로만 보일 정도였지만, 장일소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자칫했으면 여기서 죽었단다.”

웃어 버린 장일소가 몸을 획 돌렸다. 그러자 가공할 포효가 저 멀리서부터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장일소오오오오오오!”

모두의 몸이 굳을 정도로 지독한 포효였다. 하지만 장일소만은 태연히 너스레를 떨었다.

“자, 철수하자꾸나. 저 범의 이빨이 내 목에 박히기 전에 말이다.”

그의 목을 노리는 검.

청명이라는 검을 본 장일소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