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2화.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거요. (2)
“거리는! 거리는 얼마나 되느냐!”
“저, 정확하게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멀지 않습니다!”
“이런!”
당외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무공이 전폐되지 않았다면 적들의 실력과 거리를 가늠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서둘러라! 거리를 벌려야 한다!”
“대, 대장로님!”
장로들이 당황한 얼굴로 당외를 바라보았다.
“장로님! 우리는 무공을 익히지 못한 이들을 대동하고 있습니다. 무슨 수로 저들과 거리를 벌린다는 말입니까? 곧 따라잡힐 겁니다!”
“그래서? 달리 방도라도 있단 말이더냐?”
당외가 목이 찢어져라 고함쳤다.
“우리는 사천당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싸워야 한다!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냐!”
장로들이 입술을 깨문다. 그들의 표정이 그리 결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당외의 눈빛이 순간 서늘해졌다.
“왜? 다 늙은 놈들이 이제 와 목숨이라도 아깝더냐? 가문을 버리고 너희만 달아나기라도 할 테냐?”
“무,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대장로님, 그런 게 아니옵고⋯⋯.”
“그게 아니면?”
장로 중 하나가 머뭇대다 말했다.
“차라리 투항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
당외의 얼굴이 순간 얻어맞기라도 한 듯 멍해졌다.
투항이라니.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단어다. 지금 그 말이 다름 아닌 당가 장로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뭐라 했느냐?”
치솟은 당외의 노기를 정면으로 받은 장로 중 하나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 패군은 악인이기는 하지만, 무학을 익히지 않은 이들은 손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가 굳이 이들을 참살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
“여기서 어설프게 항전한다면 저들에게 명분을 주게 됩니다. 차라리 투항해 버리는 쪽이⋯⋯.”
“다 지껄였느냐?”
“⋯⋯대장로님.”
“이 천치 같은 놈이!”
당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게 당가의 장로가 할 말이더냐!”
하지만 이번에는 장로도 당외의 일갈에 기죽지 않았다.
“당가의 장로기에 하는 말입니다! 저희만으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대장로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이⋯⋯.”
“지켜야 할 것이라도 있으면 목숨 걸고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당가에는 더 지킬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목숨까지 걸고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당씨 성을 이은 이들을 하나라도 더 살려야 할 것 아닙니까?”
장로를 바라보던 당외는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렸다.
노하거나 실망해서가 아니다. 이제 당가에는 더 지킬 것도 없다는 말이 폐부를 찔러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가에서 싸움을 벌였다면 합당한 이유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 말대로⋯⋯ 그럴 이유가 없다. 무학도 익히지 못한 아녀자와 아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가 있는가?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면, 가장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길을 선택하는 게 옳지 않은가?
“패군이 패악무도하기는 하나⋯⋯ 그는 지금껏 우리가 알던 사파 놈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러니 어쩌면 이들을 우대해 줄지도⋯⋯.”
“안 돼요!”
그 순간 당외를 부축하고 있단 당소보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됩니다, 장로님.”
“어딜 감히!”
순간 장로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감히 그와 당외가 대화를 하고 있는데 이름도 없는 여자아이가 끼어들다니. 이건 당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무얼 안다고 감히 입을 여는 것이냐?”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는 압니다. 세상에 살아도 사느니만 못한 삶이 있다는 것을요.”
“뭐라고?”
“우리가 저들에게 투항하면, 가주님은요? 가문을 나가 있는 분들이 저들과 어찌 싸우겠습니까?”
장로는 순간 말문이 막혀 당소보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사천당가는 비참하게 죽을지언정 비굴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리 말씀하신 건 장로님들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찌 저희에게 인질이 되라고 하십니까?”
당소보의 외침에 주변 다른 이들의 눈에도 독기가 들어찼다.
제 가문을 떠나 당가의 사람이 된 이들. 언젠가는 당가를 떠나가야 할 이들. 그렇기에 진정한 당가인으로 인정받지 못해 왔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사천당가의 사람이었다.
“그럼 아이들은? 저 철도 들지 않은 아이들의 생사를 너희가 결정할 수 있느냐?”
장로의 물음에 당소보가 순간 멈칫했다. 그러자 장로가 당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 어렵다면 차라리 아이들만이라도 데리고 달아나는 것이⋯⋯.”
“그만!”
“대장로님!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당가의 여인들은 이대로 데리고 가 봐야⋯⋯.”
“그만하라 하지 않느냐!”
그 순간 당외가 고함을 쳐 장로의 말을 막았다.
“떠날 이들은 떠나거라. 당가는 너희를 다시 찾지 않을 것이다. 목숨이 아깝다는데 누가 욕하겠느냐?”
“대장로님! 제 말을 어찌 그리 받으십니까?”
“허⋯⋯. 허허.”
당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말에 한 치의 틀림도 없음을 확신하는 장로의 눈빛. 저건 과거 동경 속에 보이던 당외 그의 눈과 다르지 않았다.
“어린 것들은⋯⋯ 믿을 게 못 되었지.”
“⋯⋯예?”
“얼마 살지도 못한 것들이 무얼 알겠느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들이나 되어서야 가문을 이끌 자격이 있다 여겼다.”
“대장로님?”
“그래, 그랬었지. 그렇게 여겼다. 내가 말이다. 당가의 무학을 익히지 못하는 여인들이나, 아직 어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들은 그저 참고 감내해야 한다고 여겼지.”
당외가 당소보를 내려다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당소보의 두 눈은 여전히 또렷하고 맑았다.
“⋯⋯내가 헛살았구나.”
“대, 대장로님.”
“나이만 먹는다고 현명한 것도 아니고, 어리다고 해서 어리석은 것도 아닌 것을. 철부지 같은 것들을 어떻게든 이끌어야 한다고 여겼거늘. 진짜 철부지는 나였구나.”
“저는⋯⋯.”
당외가 고개를 내저었다.
“더 말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떠날 이들은 떠나라! 그리고 당가의 장로로서 죽겠다고 하는 이들은 후방에서 만인방을 막아라! 당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싸운다. 그게 당(當)씨 성을 쓰는 자의 의무다!”
당외의 두 눈에 결연한 빛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 눈빛에 전염된 장로들이 단호한 대답을 터뜨렸다.
“예, 대장로님!”
당외가 몸을 돌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이.
“모두 서둘러라! 적들이 쫓아오고 있다.”
지친 이들을 독려한 당외가 당소보의 팔을 움켜잡았다.
“가자꾸나!”
“예.”
당소보가 그런 당외를 부축해 끌고 나갔다.
당외의 입에선 처연한 웃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등 뒤에서 분주한 기척이 느껴진다. 장로 중 대부분은 후방을 막기 위해 결연히 땅을 박찼겠지만, 어쩌면 또 몇몇은 어딘가로 달아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외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남고 누가 떠났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누가 떠났든 그 모든 것은 결국 당외의 책임 아니겠는가?
‘당가라.’
당가의 적이 누구인가?
칼을 든 채 뒤를 쫓고 있는 이들이 당가의 적인가?
아니면 무인과 무인이 아닌 이들을 나누고, 여인과 사내를 나누고, 어린 이와 나이든 이를 나누어 당가를 사분오열 내어 놓은 이가 당가의 적인가?
‘아버님⋯⋯.’
선대 가주는 당외에게 말했다. 네겐 결코 당가의 가주가 될 자격이 없다고. 실력과 심계는 오히려 동생보다 그가 더 뛰어났음에도, 그만은 당가의 가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분노하며 증오했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평생을 다 바쳤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나는 아니었구나.’
그만은 결코 당가의 가주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는 당가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누었을 테니까. 모든 것을 엄격히 구분하고 그 한계를 지어 버렸을 테니까.
당장은 그게 효율적이고 나아 보일지 모른다.
젊었던 당외가 통탄했던 것처럼, 당장은 그 결정이 사천당가의 이름을 더 강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끝이 무엇인지, 지금 당외는 보고 말았다.
‘가주.’
그는 줄곧 당군악을 원망했다.
당군악이 화산과 연대하는 멍청한 짓거리만 하지 않았어도 당가가 이런 위기에 처했을 리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당가의 위기를 만들어 낸 이는 다름 아닌 당외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방해하지 않고 당군악이 펼치고자 하는 뜻을 믿어 주었다면, 당가는 지금보다 더 강하고 위대한 곳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쿨럭!”
“자, 장로님. 괜찮으세요?”
당외가 고개를 돌려 당소보를 바라보았다.
“⋯⋯미안하구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당외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너무⋯⋯. 너무 늦게 알았구나.’
크게 호통치던 당조평의 모습이 스쳤다. 아마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평생 철을 두드려 온 그의 조악한 말솜씨로는 전할 수 없었을 뿐, 그 눈빛과 몸짓으로 전했던 것이겠지.
어쩌면 줄곧 외치고 있었겠지만, 당외는 듣지 못했다. 아무리 주위에서 아우성을 쳐도 귀를 막고 있는 이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으니까!
이 사실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오, 옵니다! 옵니다! 대장로님!”
당외는 순간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보지 않으려 했지만 볼 수밖에 없었다.
저 먼 지평선 너머로 질주해 오는⋯⋯ 붉은 무리.
황톳빛 대지 위로 붉게 번져 오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하지만 당외가 바라본 것은 그들이 아니다. 그 중앙의 한 남자였다.
사내의 붉은 장포가 허공에 흩날렸다. 당외의 입에서 앓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패⋯⋯군.”
한 번쯤은 두 눈으로 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마주하고 싶은 건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아니어야 했다.
패군 장일소의 두 눈이 이 먼 거리에서조차 섬뜩하게 그를 꿰뚫는 듯했다.
“련주님! 놈들입니다.”
장일소가 손톱으로 제 미간을 가볍게 긁적였다.
“흐음, 겨우 여기인가? 당가도 다됐군.”
“싸울 수 있는 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늙은 놈들 몇뿐입니다!”
“그래 보이는구나.”
“생포합니까?”
적호가 슬쩍 장일소를 돌아보았다. 당연한 질문이었다. 저들을 죽이는 것 따위야 대단치 않은 일이나, 차라리 저들을 인질로 잡아 당군악과 천우맹을 압박하면 훨씬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일소의 혀 차는 소리만이 돌아왔다.
“쯧쯧. 이래서 사파 놈들이란.”
“죄, 죄송합니다.”
“보렴.”
장일소가 앞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 말에 적호가 그 방향을 주시했다. 당가의 장로들이 뒤쪽으로 움직이며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독 오른 살쾡이처럼 말이다.
“어딜 보는 거니? 거기가 아니란다. 그 뒤를 봐야지.”
“⋯⋯예?”
그 말에 적호는 장로들 너머에 있는 이들을 보았다.
아녀자들과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장인들뿐이다.
“보이니?”
“⋯⋯무슨 말씀이신지?”
“상대가 적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으면 힘이 아니라 눈을 봐야지. 보렴. 저 많은 눈들이 말하고 있잖니. 싸우겠다고.”
그 말에 적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무학을 익히지 못한 이들이 만인방의 추격을 받으면 누구라도 겁에 질릴 만하다. 하지만 지금 이쪽을 돌아보는 여인들과 장인들의 두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힘이 센가, 약한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싸울 의지를 가지고 이 땅에 발을 디딘 이는 모두가 무인이란다.”
“⋯⋯.”
“그리고 상대가 무인이라면 우리도 예를 갖추는 게 도리지. 알겠니?”
“예, 련주님!”
“그래.”
장일소의 입꼬리가 요사스레 올라갔다.
“모조리 죽이렴. 단 하나도 남기지 말고.”
“존명!”
적호가 손짓하자 만인방도들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흐아아아아아압!”
달려 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장일소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술값치곤 조금 과한 것 같지만⋯⋯ 이게 사파의 셈법이니 이해하렴.”
기름한 두 눈이 이내 그믐달처럼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