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1화.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거요. (1)
“기대세요.”
“⋯⋯나는 괜찮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팔을 잡은 손아귀에서 굳건한 힘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묘한 반발심이 들었지만, 결국 당외는 제 팔을 잡은 여인의 손을 떼어 내지 못했다.
그가 지쳐서 시간을 지체하면 다른 이들도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쿨럭, 쿨럭.”
잘게 잔기침을 한 당외는 쓴웃음을 흘렸다.
‘꼴좋게 되었군.’
당외는 전대 가주가 죽은 이후로⋯⋯.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당가의 실권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권력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무공도 익히지 못한 여인의 부축을 받게 된 것이다.
그의 무공이 전폐되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랐을까?
천하의 사천당가가 사파 놈들을 피해 달아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만은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겠지.’
당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상황은 한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가 무학을 잃지 않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한심하군.’
그가 한 모든 일이 당가를 위한 것이라 믿었다. 겉으로만 엄하고 속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현 가주는 절대 당가의 부흥을 이끌어 내지 못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는 결국 독과 공방이라는 당가의 근원을 잃어버린 채 달아나고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버린 것일까?
“쿨럭! 쿨럭!”
“괜찮으세요, 장로님?”
“⋯⋯나는 괜찮다.”
당외는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딱히 토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생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죽고 나면 이제 당가는 어찌 되는 걸까? 천하를 덮쳐올 전란 속에서 근본을 잃어버린 당가가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생존이야 어찌어찌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과연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독과 암기를 잃은 당가가?
답답하다. 가슴을 커다란 쇳덩이가 짓누르는 것만 같다.
그때, 팔을 잡은 손이 그를 좀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당외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 쪽으로 좀 더 기대세요.”
“⋯⋯됐다.”
“저는 아직 힘이 남아 있어요. 걱정하지 마시고요.”
순간 당외는 할 말을 잃었다.
‘힘이 남아 있다고?’
그럴 리가 없다.
당외가 무공을 잃어 허약한 몸뚱이만 남았다고는 하나, 평생 무학을 익히지 못한 이 여인도 힘든 건 마찬가지일 터.
그나마 당외에게는 무학을 익히며 고통을 버텨 온 경험이라도 있는데, 당가의 여식들은 규방에서 잘 벗어나지도 못하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여인은 침착하게 이런 말을 건네고 있다.
‘강하구나.’
어째 묘한 감흥이 당외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고맙다.”
“⋯⋯예?”
당혹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당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르신.’
뇌리에 당조평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조평은 말했다. 당가가 지켜야 할 건 독이나 공방 같은 게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고.
솔직히 당외는 아직도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조평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이해가 갔다. 천하의 절독이 있다고 해도, 천하무쌍의 암기가 있다고 해도, 그걸 사용할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일 테니까.
어쩌면 지금까지 당가를 지켜 온 것은 이 이름 없는 이들의 강인함일지도 모른다.
“누구의 여식이더냐?”
“제 아비의 함자는 고위(高偉)예요.”
“당고위라⋯⋯.”
생소한 걸 보아 방계인 모양이었다. 당조평은 슬쩍 여인의 얼굴을 살폈다.
나이는 이제 겨우 열여덟이나 되었을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생김새를 지녔으나 그 표정만은 더없이 당찼다.
하지만 당조평은 그 속에 채 다 숨기지 못한 불안이 있음을 알아챘다.
“걱정하지 말거라.”
“예?”
“당가는 다시 일어날 테니까.”
당외는 억지로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건 어쩌면 이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건네는 말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가문이 불타고, 독을 잃고, 암기를 잃었다고 해도 당가는 당가다.”
당외가 살짝 머뭇대다 말을 이었다.
“가주께서는 훌륭한 분이시니, 반드시 가문을 부활시킬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가주.’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데는 한 점 후회도 없다.
이제 당군악은 긴긴 고통에 시달려야 할 테니까.
그가 겪어야 할 고난을 생각하니 당군악을 그리 기꺼워하지 않는 당외조차도 절로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너희가 계속해서 가주를 믿고 따라 준다면, 언젠가는 당가가 다시금 사천의 패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꺼낸 당외도 사실 이게 대단히 설득력 있는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 아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조언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당외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당가는⋯⋯. 네, 당가는 괜찮을 거예요.”
“그래야지.”
“하지만⋯⋯ 저는 가주님께 힘이 되어 드릴 수 없을 겁니다, 장로님.”
조금 당황한 당외가 여인을 보며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더냐?”
“도울 방법이 없으니까요. 저는 이제 혼기가 찼거든요.”
당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혼기가 찼다니. 이런 상황에서 저 말을 꺼낸다는 건 결국 외인이 될 테니 당가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인가?
사람은 누구나 제 일을 우선시한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당가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건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당외가 여인을 빤히 보며 말했다.
“물론 그게 여인의 삶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가문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나?”
“혼인하면 당가 사람이 아니죠.”
“⋯⋯.”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혼인하게 되면 당가에 대한 것은 모두 잊고 살라고요. 이곳에서 있었던 사소한 기억마저 지워야 한다고.”
당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그녀가 말한 것은 당가의 법도다. 당가의 비전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었고, 선조부터 이어 온 이 법도를 가장 숭상하고 고수해 온 이가 바로 당외다.
그런데 그가 숱하게 했던 말이 지금 그에게 다시 돌아오고 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너는 아직 당가의 사람이 아니더냐?”
“그렇지만⋯⋯. 아.”
뭔가 말을 이으려던 여인이 아차 하며 당외를 슬쩍 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제가⋯⋯.”
아무래도 당외의 앞에서 속내를 드러낸 게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평소의 당외라면 이쯤에서 못마땅하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당외는 어쩐지 뒤에 감춘 말을 듣고 싶어졌다. 어쩌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이 여인이 지금도 그를 굳건히 부축해 주고 있어서일까.
“아이야.”
“⋯⋯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내게 말해줄 수 있겠느냐?”
“저는⋯⋯.”
“부탁하마.”
고민하는 듯하던 여인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장로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저희 같은 아이들은 빠르게 혼처가 잡히기 마련이에요. 쓸모없는 군식구를 줄여야 하니까.”
당외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듣고 보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당가에서 여인들은 있어 봐야 딱히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들을 이끌고 가문을 부흥시키기란 어렵다. 그러니 일반적으로는 평소라면 시집 보내지 않았을 집안에라도 시집을 보내고 그 대가로 당가에 대한 지원을 끌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리되지 않는다 해도 저희 같은 이들은 도움이 안 된답니다.”
“도움이 안 된다니?”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고 해 봐야 밥 짓고 빨래하는 것뿐일 텐데요.”
“⋯⋯.”
“명문가에서 시집오신 분들은 그래도 위기가 닥쳤을 때 검이라도 휘두를 수 있고, 주먹이라도 내지를 수 있겠죠. 하지만 저희는 그럴 수도 없거든요.”
말문이 막힌 당외가 여인을 바라보다 간신히 물었다.
“⋯⋯원망하느냐?”
그 말에 여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원망하는 마음에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저희도 가주님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은 가득합니다. 하지만 정말 도울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당외는 어쩐지 가슴이 갑갑했다. 하찮은 일이라도 하는 것이 돕는 것이라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 일들이 당군악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아니까.
군식구. 당가라는 명문에서 쓰기에는 적절치 않은 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당가의 여식들은 그저 군식구에 불과하다.
이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건 다름 아닌 당가고, 당외 그였다.
“그래서⋯⋯ 곧장 혼처를 알아볼 셈이냐?”
당외의 물음에 여인이 환하게 웃었다. 억지로 지어낸 티가 역력한 웃음이었다.
“그것도 방법이겠지만, 상황이 어려워진 당가의⋯⋯ 그것도 방계 여식을 누가 기꺼이 받아 줄까 싶긴 하네요.”
목이 간질간질해진 당외가 마른기침을 터뜨리려는 찰나였다.
“그래서⋯⋯ 섬서에 도착하면 가문을 나가 볼까 생각 중입니다.”
“가문을 나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화산으로 가려고요.”
“⋯⋯뭐?”
순간 당외는 기침하는 것도 잊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화산이라니?
“다른 곳은 우리를 받아 주지 않겠지만, 화산이라면 받아 줄지도 모르니까요. 이미 소소 언니가 가 있기도 하고.”
“⋯⋯화산에 의탁하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저도⋯⋯ 화산에서 검을 익혀 보고 싶어요.”
“검⋯⋯을?”
그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검을 익히고 싶었더냐?”
“꼭 그런 건 아닌데⋯⋯.”
여인이 살짝 망설이다 말했다.
“그래도 화산에 입문해 검을 익히면 제 힘으로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여차하면 제 몸을 제가 지킬 수도 있을 테고요. 이미 소소 언니가 보여 주기도 했고.”
“⋯⋯.”
“소소 언니가 당가에 남았더라면 지금쯤 사천의 유력가에 시집을 갔겠죠. 그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겁니다. 다들 그런 소소 언니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부러워했었거든요.”
여인이 담담하게 내뱉는 말이 당외의 뇌리에 새겨졌다.
“우리도 화산으로 가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냥 당가의 여식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날이 있을까 하고요. 하지만 이때까지는 차마 용기가 안 났어요. 우리는 소소 언니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네. 이번엔 용기를 한번 내 보려고요. 물론 화산은 무척 엄한 곳인 걸 알고 있고 수련도 힘들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거기에 가면 제가 뭐라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주님께서도 저희가 화산으로 간다고 하면 막지는 않으실 것 같고.”
여인은 당외를 잡지 않은 한쪽 팔로 검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제가 의외로 검에 재능이 있어서 유명한 여협이 될지도!”
말을 하는 동안 여인의 얼굴엔 환한 희망이 어려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당외를 다시 돌아본 여인이 움찔하며 도로 의기소침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많더냐?”
“예?”
“가문 내에⋯⋯ 너처럼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더냐?”
“그게⋯⋯.”
“겁먹지 말고 말해 보려무나. 이제 힘도 실권도 다 잃은 늙은이가 뭐가 무섭다고.”
여인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슬쩍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그렇게 적다고 할 수도 아니에요. 그나마 직계 언니들은 다른 길을 찾아볼 수라도 있는데, 저희는 이렇게 된 이상 다른 길이 없으니까요.”
당외는 문득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실로 청명하게 맑았다. 그 광활한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네⋯⋯? 저는⋯⋯.”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알고 싶어서 그런다.”
그 말에야 안심한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보(小寶)입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저를 소보(小步)라 부르세요.”
“소보⋯⋯. 작은 걸음이라.”
당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대장로님!”
뒤쪽에서 다급한 고함이 들려왔다. 놀란 당외가 황급히 돌아보았다.
“후방! 후방에 만인방입니다!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