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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30화 (1,431/1,567)

1430화. 그럼 이 비도는 실패작인가? (5)

“끄응⋯⋯.”

“⋯⋯.”

“끄으으응⋯⋯.”

“⋯⋯.”

“끄으으으으응⋯⋯.”

“거, 진짜! 더럽게 시끄럽네!”

업혀 있던 청명이 버럭 소리치며 앞에 있는 조걸의 머리를 찰싹찰싹 두드렸다.

“부상자 하나 업고 가는 게 그렇게 불만이야? 어?”

“나, 나도 부상자야, 이 새끼야!”

“소리 지르는 거 보니 말짱하구만!”

“끄으으으으응.”

조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왜 나냐, 왜! 저기 멀쩡한 인간들도 널리고 널렸는데!”

“쟤들은 안 돼. 내가 불편해. 쟤들도 전력으로 달리느라 힘들 텐데 사람이 양심이 있지, 어떻게 저기 업혀 가냐? 와, 사형 인성.”

“그럼 나는? 나는 안 불편하고? 나는 힘들어도 되고?”

“어.”

단숨에 격추당한 조걸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덜컥 떨어졌다. 청명은 낄낄 웃었다.

“사형은 고생 좀 해도 돼. 편하게 컸잖아.”

“더 고생하다가는 진짜 죽어, 이 새끼야!”

“됐고! 입 털 시간 있으면 빨리 달려! 지금 바쁘니까!”

“끄으으으응.”

조걸이 눈물을 머금고 앞으로 내달렸다.

빡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은 이런저런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여유가 없다. 이 순간에도 저 만인방 놈들이 달아난 당가 사람들을 뒤쫓고 있을 테니까.

그들의 추적이 얼마나 집요하고 끔찍한지는 이미 뼈저리게 겪어 보지 않았던가? 이제는 호가명의 얼굴만 떠올려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다.

“으라차!”

조걸이 단번에 땅을 박차고 앞으로 쑤욱 나아갔다.

“근데, 사형.”

“왜?”

“괜찮냐? 성도에 사해상회가 있는데. 사형만이라도 성도로 가 보는 건 어때?”

“별⋯⋯.”

조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장일소 그 새끼가 어떤 새낀데, 일을 벌일 거면 진즉에 벌였겠지!”

“⋯⋯.”

“그리고 우리 상회를 얕보지 마! 전 중원을 오가며 상행으로 먹고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이런 위기쯤이야 몇 번이고 넘긴 양반들이야!”

“잘나셨다.”

청명이 피식 웃었다. 사실 그도 크게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개방이 전한 첩지는 당연히 홍대광이나 능삼의 지시로 온 것일 터. 그들이라면 당연히 사해상회에 대한 정보도 담으려 했을 것이다.

상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건, 상회에 딱히 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뜻과 같다. 만일 거기에 상회에 대한 언급이 한 자라도 써 있었다면, 청명은 조걸을 두들겨 패서라도 성도로 보냈을 것이다.

조걸이 덧붙였다.

“그리고 어차피 그 새끼들을 못 막으면 성도에 있는 사람은 모두 안전하지 못해. 내 가족들만 피신 시킨다고 끝이 아니잖아. 지킬거면 제대로 지켜야지!”

가만 듣고 있던 청명은 말없이 조걸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그를 업은 조걸의 어깨가 부쩍 넓어 보였다.

그때, 백천이 슬쩍 청명에게로 다가왔다.

“청명아.”

“응?”

“늦은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청명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청명도 잘 모른다. 의식을 잃지 않고 상황을 계속 파악했다면 대충 계산이 섰겠지만, 지금 들은 것만으로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어쩌면 이미 놈들이 당가를 따라잡았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늦었으면 돌아가게?”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래. 그러면 된 거잖아. 머리 비우고 그냥 달려. 늦었는지, 안 늦었는지는 도착해서 확인하면 돼.”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을 듣고 보니 머릿속을 소란하게 하던 잡념들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백천을 빤히 보던 청명이 말했다.

“그보다⋯⋯ 얼굴이 영 허여멀건데? 그러다 곧 쓰러지시겠다?”

“엥? 사숙 얼굴은 원래 허여멀겋잖아?”

“사형은 시끄럽고. 빨리 달리기나 해.”

백천은 슬쩍 청명을 일별하고는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약해 빠진 놈이.”

“⋯⋯와, 저 재수 없는 얼굴 좀 봐.”

청명은 투덜거리면서도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말려 봐야 듣지도 않겠지. 그냥 버틸 수 있는 만큼만 버텨. 안 되면 그냥 쓰러지고.”

“너나 걱정해라, 망할 놈아.”

백천의 입가에 쓴웃음이 고였다.

‘하여튼 귀신 같은 놈이라니까.’

저놈의 몸도 지금 정상이 아닐 것이다. 당군악이 가보까지 쏟아부으며 치료했다고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서는 송장에 숨 하나 겨우 붙여 놓았다고 봐야 한다. 당장 청명을 치료한 당군악부터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와중에 상황을 파악해 결단을 내리고, 다른 이들까지 신경 쓰는 꼴이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상황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 그들은 여전히 당가로 가고 있고, 당가는 여전히 위기에 처해 있다. 아니, 오히려 상황이 더 급박해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전과는 확연히 그 느낌이 달랐다.

조걸의 등에 업힌 청명을 물끄러미 보며, 백천은 혀를 내둘렀다.

‘못 당하겠네, 정말.’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 것이다. 지금의 청명은 제 실력의 반의반도 발휘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아니, 그것조차 과대평가다. 어쩌면 지금의 청명은 검도 휘두르지 못하는 평범한 양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감이 생긴다. 저 망할 망둥이 놈이 의식을 차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오검이나 화산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현종을 비롯한 화산의 장로들, 심지어 당군악마저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전히 다급하지만, 적어도 초조해하지는 않는다. 그들을 휩싸고 있던 지독한 불안함이 확연히 가신 느낌이었다.

“아니, 더 빨리 뛰라고! 피죽도 못 처먹었어? 이 새끼들이, 내가 그만큼 경신법에 신경을 쓰라고 했는데 말이야! 혹시 늦기라도 해봐라, 이 새끼들아. 내가 아주 돌아가는 즉시⋯⋯.”

백천이 눈을 질끈 감는다.

‘저 아가리만 좀 처닫으면 더 좋을 텐데.’

물론 그건 절대 이룰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엉? 평소부터⋯⋯.”

“자! 더 빨리 달리자, 더!”

“예!”

백천이 얼른 청명의 잔소리를 끊으며 외치자 화산과 당가가 속도를 더욱 올렸다.

청명이 피식 웃고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이전과 달리 어둑하게 침전해 갔다.

❀ ❀ ❀

당벽이 당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장로님!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게 업히십시오!”

그도 그럴 게, 당외의 얼굴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고 쓰러질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외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당벽을 물리쳤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하, 하지만⋯⋯.”

“힘이 남아돌면 아녀자들이나 챙기거라! 나는 괜찮다!”

당벽은 살짝 질린 눈으로 당외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당외가 이리 나와 버리면 당벽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더 빨리 가야 한다! 지금도 그 사파 놈들이 뒤를 쫓고 있을 것이다. 놈들이 따라잡아 오기 전에 섬서로 진입해야 한다.”

“예!”

한차례 휘청인 당외가 다시 뻗어 오려는 당벽의 손을 밀쳐 내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당가의 식솔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 멍청한 놈들! 아이들을 제 어미에게 맡겨 두지 말고 너희가 직접 업어야 할 것 아니냐!”

“이,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만.”

“장로 놈들은 손이 없느냐? 등이 없느냐? 그 잘난 힘은 아껴 뒀다가 저승에서 쓸 거냐! 어서 움직이지 못해?”

“아, 알겠습니다!”

후다닥 달려 나가는 당벽을 보며 당외가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을 훔치자 손을 물에 담그기라도 한 듯 땀이 묻어났다.

하지만 절대 발을 멈출 순 없다.

여전히 그는 이 선택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가인이 죽어야 하는 곳은 당가의 장원 안이다. 당가의 독은, 당가의 공방은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리되어 버린 이상, 남은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들은 정말 멍청한 선택으로 모든 것을 날려 버린 사람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죽어서 선조들을 마주했을 때, 그는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후욱! 후욱!”

당외는 거친 숨을 토하며 덜덜 떨리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섬서로⋯⋯.’

장일소는 이미 사천을 제 땅처럼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걸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섬서는 다르다. 섬서는 여전히 사패련이 침범하기 쉽지 않은 땅. 그곳까지 갈 수만 있다면, 저들의 추격을 떨쳐 낼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하나다. 저 사파 무리가 그들의 등을 잡기 전에 섬서에 도달할 수 있느냐. 그 하나뿐이다.

‘더⋯⋯.’

당외가 입술을 짓깨물고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얼마 남지 않았다! 섬서까지만 가면 된다. 다들 힘을 내라!”

대답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대답할 힘까지 모아 발을 떼는 것이 낫다.

‘얼마나 남았지? 삼백 리? 오백 리?’

이들이 모두 당가의 남아(男兒)들이었다면, 그 정도 거리쯤은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남은 이들은 태반 넘게 무학을 익히지 못한 아이와 여자들이다.

당가의 여인들은 직계라 할지라도 무학을 익히지 못한다. 가주의 적통쯤 되는 아이들은 호신을 위해 간단한 권각술과 심법 정도는 가르치지만, 그래 봐야 그 정도일 뿐이다.

‘법도.’

그래, 그건 당가의 법도다. 선조 대대로 내려온,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깨져서는 안 되는.

하지만⋯⋯ 이들이, 당가의 여식들이 남자들처럼 무학을 익혔다면⋯⋯ 이런 처절한 도주를 감행해야 했을까?

아니, 설령 그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이렇게까지 달아나면서 안달을 내야 했을까?

순간 당외의 뇌리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닌 당군악의 여식인 당소소의 얼굴이었다. 당가의 법도를 거부하고 화산으로 떠난 아이.

그 아이의 선택을 들었을 때 당외는 비웃음과 경멸을 퍼부었다. 확실히 저 당군악의 여식답다며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화산의 일원으로 날린 명성은 천하를 울리고, 이내 당외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만일 그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 줄곧 당가에 남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지금 이곳에서 지친 아녀자들을 부축하는 것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것이다.

그 아이가 특별했는가?

당외는 새삼스럽게 당가의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이들도 모두 당소소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아니야.”

하지만 이내 당외가 고개를 내저었다.

선조들의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다. 여인들은 결국 당가를 떠나 다른 집안의 사람이 된다. 그들에게 독과 암기술을 전수한다면 결국 천하의 유력가들이 당가의 독에 면역을 키우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을 피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선조들이라 해서 어찌 고민이 없었겠는가? 그들 역시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일 터. 상황이 바뀌었다 해서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후대의 오만일 뿐이다.

그래, 그가 해야 할 것은 당가를⋯⋯.

“엇?”

그때, 내뻗은 당외의 발이 돌부리에 턱 걸렸다. 늙은 몸이 순간 휘청하며 앞으로 쏠렸다. 넘어지려는 그 순간, 누군가가 당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괜찮으세요, 장로님?”

당외는 고개를 돌려 제 팔을 잡은 이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모른다. 얼굴은 알지만, 그 이름은 모른다.

당가에는 너무도 많은 이들이 있으니까. 그저 누군가의 여식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팔을 붙든 손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힘이 들어서. 자신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지쳤음에도 당외를 지켜보고 있다가 손을 뻗은 것이다.

“괜⋯⋯찮다.”

강하게 잡아당기며 일으켜 주는 힘에 당외가 다리를 다시금 세웠다. 잔기침을 흘리며 당가의 여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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