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화. 그럼 이 비도는 실패작인가? (4)
당군악이 굳은 얼굴로 청명을 응시했다.
청명의 표정은 태연했다.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그의 몸 상태를 가장 잘 아는 당군악으로서는 지금 청명이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지 모를 수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화산검협. 마음은 고맙네. 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하겠네.”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두드리던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려 당군악을 보았다.
“뭘요?”
“⋯⋯우리는 당가로 가지 않네.”
“하.”
청명은 짧은 숨을 토해 내더니 시큰둥하게 물었다.
“왜요?”
“그게 옳기 때문이네.”
“옳다고?”
당군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를 위해 주는 그대들의 마음에는 더없이 감사하나, 당가는 그 짐을 감당할 수 없네. 당가인 몇의 목숨 때문에 더 많은 피가 흐를 수도 있지 않은가?”
“⋯⋯.”
“⋯⋯점창으로 가세나. 그게 옳네.”
당군악의 말투는 단호했다. 하지만 마음은 흡사 칼로 저며 내는 것만 같았다.
알고 있다. 청명이 일어나 이렇게 말해 버린 이상, 누구도 당가를 구하러 가는 데에 반대하지 않으리란 걸. 그저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가족들을 구하러 갈 수 있으리라는 걸.
하지만 당군악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당군악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
“가, 가주님. 화산검협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입 다물어라!”
이 틈에 당군악의 마음을 돌려 보려던 당패는 순간 쏟아진 당군악의 서늘한 눈길에 고개를 푹 숙였다.
“내 결정은 달라지지 않네. 그러니 이번에는 점창으로⋯⋯. 자네 지금 내 말 듣고 있는가?”
“예, 뭐. 계속해 보세요. 들어는 드릴 테니까.”
당군악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말했건만, 어째 청명의 반응은 영 진지하질 못했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린 청명이 뽑아낸 손가락을 입으로 훅 불더니 뚱한 얼굴로 당군악을 돌아보았다.
“뭐 할 말 남으신 거 아니었어요?”
당군악의 얼굴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은 적은 없는데⋯⋯. 잊지 않았음에도 잊었다. 이 인간이 원래 이런 인간이라는 걸.
“끝나셨어요?”
“자네⋯⋯.”
당군악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청명이 뚱하게 백천을 불렀다.
“어이, 사숙.”
“응?”
“내가 잠든 사이에 뭔 이상한 일이라도 있었어?”
“그건 또 뭔 소리냐?”
“아니, 당가주라는 양반 머리에 누가 독을 쑤셔 넣은 것도 아닐 텐데, 뭔 무게를 저리 잡으신대?”
“에이, 독이고 뭐고 할 게 아니지. 당가주님은 원래 그러셨⋯⋯. 아. 죄송합니다.”
눈총을 받은 백천이 급히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당군악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저⋯⋯.’
화산검협이 의식을 잃었을 때의 백천은 얼마나 믿음직스러웠던가? 당패가 그의 반만 따라가도 소원이 없겠다고 여겼을 정도다.
그런데 화산검협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 믿음직스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어디 동네 한량 같은 인간이 저기 서 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청명이 의식을 차린 순간, 화산을 둘러싸고 있던 칼날 같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느슨해졌다. 금방이라도 악을 쓰며 칼을 휘두를 것 같았던 조걸조차도 히죽히죽 웃고 있다.
“아니, 그러니까 결론이 뭐냐고요.”
“점창으로 가야 한다니까!”
순간 짜증이 치민 당군악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우리가 점창으로 가지 않는다면 법정은 반드시 우리에게 그 대가를 물어올걸세. 자네 정도 되는 이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 아닌가?”
“상황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닌데⋯⋯. 뭐 그렇겠죠?”
“그런데 왜 고집을 부리는 건가?”
“아니, 몰랐는데 사람 웃길 줄도 아시네.”
“뭐?”
당군악이 멍하니 청명을 바라봤다.
“아니, 생각 좀 해 보세요. 그렇게 대왕대머리를 잘 안다는 분이 그런 말을 해요?”
당군악의 얼굴에 순간 의문이 스쳤다. 지금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때 청명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그 인간이 원하는 대로 점창에 가서 걔네를 구하면? 대왕대머리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천우맹을 다시 봤네! 이제 우리는 피로 맺어진 형제네! 함께 사패련에 맞서 싸우세!’ 뭐 이럴 거 같냐고요.”
당군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당군악이 아닌 다른 이들이 대신 들려주었다.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아미타불⋯⋯. 그럴 분이 아니외다.”
당군악은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오검을 바라보았다. 혜연마저도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청명이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봐야 이번 한 번은 봐주겠다는 소리나 듣겠지.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게 뭔데요? 구파일방이 천우맹을 좀 좋게 봐 주는 거? 그딴 것 때문에 지금 뭘 버리자고?”
“⋯⋯화산검협.”
“정신 좀 차려요, 이 양반아.”
순간 청명에게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당황한 당군악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청명의 그 기세는 이내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히죽 웃고 있는 청명이었다.
“머리에 피가 몰린 것 같으면 좀 빼세요. 침이야 널려 있잖아요. 내가 찔려 봐서 아는데 효과 죽이거든.”
청명이 낄낄 웃으며 당소소를 돌아보았다. 계속해서 말없이 입술을 깨물고 있던 당소소의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순간 당황한 청명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저건 왜 또 울고 난리야.”
크흠, 하고 헛기침한 청명이 이번에는 당군악이 아닌 현종을 바라보았다.
“장문인.”
“아, 아니, 난 지금 태상⋯⋯.”
“넋 놓은 사람 헛소리 다 듣고 있지 말고 얼른 가십시다. 애가 떼를 쓰면 좀 혼낼 줄도 아셔야지. 뭐 그걸 미주알고주알 들어주고 계세요? 시간 아깝게.”
“⋯⋯미안하다.”
대놓고 나무라는 청명의 말에 현종은 저도 모르게 사과하고 말았다. 뭘 잘못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얼굴을 보니 어쩐지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할 말 더 있는 사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당군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이건⋯⋯.”
“거, 끈질기시네. 정 그러시면 가고 싶은 사람만 데리고 점창으로 가시든가. 그런데 여기에 가주님을 따라갈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 말에 당군악이 저도 모르게 제 식구들을 돌아보았다.
당가의 정예들은 절대 점창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듯 하나같이 그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조금 전까지는 당군악의 말이라면 지옥 불에라도 뛰어들 것 같았던 이들이 말이다.
“⋯⋯이놈들이⋯⋯.”
“벌은 받겠습니다.”
그들을 대표해 당패가 입을 열었다.
“설사 항명으로 팔다리가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감내하겠습니다. 하지만 가주님. 아니, 아버님.”
당패는 그 어느 때보다 올곧은 시선으로 당군악을 마주했다.
“저는 아버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게 분명 그러셨죠. 당가의 가주는 당가를 위해서라면 옳든 그르든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
“그러니 지금은 아버님의 말씀에 따를 수 없습니다. 저는 제 가족들을 구하러 갈 겁니다. 그게 소가주로서, 당가인으로서의 제 결정입니다.”
당군악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게 한참 당패를 노려보던 그는 이 모든 사태를 자아낸 이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노성을 토해 낼 듯 숨을 들썩이던 당군악은 이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 일을 어찌 감당할 셈인가?”
“⋯⋯.”
“자네의 말이 맞겠지. 분명 그럴 걸세. 우리가 점창으로 간다 해도 법정이 우릴 곱게 보는 날은 없을 것이네. 하지만 정말로 그들과 적대하게 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어. 그리고 천하 만민이 우릴 바라보는 시선 역시 예전 같지 않아질 걸세. 그걸 어찌 감당할 셈인가? 그 대가를 누가⋯⋯.”
“저요.”
순간 당군악이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정작 청명은 태연하기만 했다.
“누가 감당하냐고 하실 거죠? 제가 감당해요. 뭐 뻔한 걸.”
“⋯⋯.”
“욕하려면 하라고 하세요. 내가 언제부터 남 보기 좋은 일만 했다고. 나는 원래 나 하고 싶은 대로 살던 사람이에요. 뭘 새삼스럽게.”
“그랬지.”
“좀 과했지. 아니, 많이 과했지.”
“사람이 적당히 남 눈도 좀 신경 쓰고 해야지. 어떻게 사람이 저러고 사냐.”
“근데 이 새끼들이?”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오검이 찔끔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쏘아본 청명이 다시금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알고 있다. 지금 당군악이 왜 점창으로 가려 하는지.
하지만 청명은 죽어도 그 말을 들어줄 수 없다.
희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희생하여 대의를 이룬 이의 삶이 어떤 지옥으로 변하는지 그는 알고 있으니까.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뼈저리게 아니까.
그러니 당군악을 그 지옥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천하를 위해서 내가 죽겠다. 그건 영웅이죠. 난 그런 사람은 대단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하를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인간은 그냥 등신에 천치예요. 그게 자기 가족이라면 더더욱.”
넓은 소매 아래로 당군악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리고 친구가 등신처럼 군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죠. 그게 맞지 않아요?”
청명이 빤히 던져 오는 시선에, 당군악은 결국 지그시 눈을 감아 버렸다.
“자네.”
“네.”
다시 눈을 떴을 때, 당군악의 눈빛은 흡사 불타는 듯했다.
“정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각오가 있는 건가?”
“⋯⋯.”
“그저 우리에 대한 동정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책임을 짊어질 각오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건가? 정말 그러한가?”
청명은 그 말에 답하는 대신 외쳤다.
“사숙!”
“그래!”
백천이 오는 내내 들고 있던 암향매화검을 청명에게 던져 주었다. 그 검을 받아 든 청명은 단번에 검을 뽑아 휘둘렀다. 선명한 선을 그려 낸 청명의 검이 당군악의 목에 가 닿았다.
멈춘 검 끝에 매달린 녹색 수실이 크게 흔들렸다.
청명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책임을 피할 거면 검도 안 잡았겠지.”
챙!
깔끔하게 회수된 검이 다시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당가가 만든 청명의 검이 다시 허리춤에 매달렸다. 그 검이 본디 있어야 할 자리에.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다시 해야 할 말을 하세요. 당가의 가주로서 당신이 원래 했어야 할 말을.”
당군악의 눈에 복잡하고도 묘한 빛이 어렸다. 소매 아래로 꽉 쥔 주먹은 마디마디가 온통 희게 질릴 정도였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 그럼에도 차마 할 수 없었던 말.
당군악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당가로 가 주게나. 당가를⋯⋯.”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당가를 도와주게.”
“얼마든지요.”
당군악의 어깨를 한차례 꽉 잡은 청명이 획 고개를 돌리며 화산을 향해 외쳤다.
“들었냐, 새끼들아!”
“오!”
“시간 없다! 가자!”
다시금 칼날 같은 기세가 터져 나왔다. 이제야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게 된 당가의 정예들도 있는 힘껏 기운을 끌어 올렸다.
지쳐 있던 이들이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처럼 활력을 되찾았다. 한 사람이 만든 변화라기에는 너무도 큰 변화였다.
“얼른 가자, 청명아!”
“속 썩이더니 정신 차렸네! 이제 괜찮은 거지?”
“지금부터 가도 안 늦겠지?”
여기저기서 청명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가운데, 조걸 역시 화색을 띠며 달려왔다. 그를 보며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 전에, 사형.”
“응?”
“나 좀 업어.”
“⋯⋯어?”
“다리가 풀려서.”
“⋯⋯.”
“얼른.”
⋯⋯이 새끼 진짜 괜찮을까? 조걸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