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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28화 (1,429/1,567)

1428화. 그럼 이 비도는 실패작인가? (3)

무섭다.

처음 현종이 떠올린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이유를 뭐라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등골이 절로 서늘해진다. 그런 현종의 뇌리를 채운 이는 다름 아닌 소림의 방장 법정이었다.

‘그 상황에⋯⋯.’

설마 여기까지를 내다보았다는 말인가?

아니,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아무리 법정이 대단한 이라고 해도 당가가 제 가문을 버리고 도주하고, 사패련이 둘로 나뉘는 상황까지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그럼 더 문제가 아닌가?’

이 모든 상황이 계산된 것이 아니었다면, 법정의 의도는 오직 하나. 어떻게든 그들을 보내 점창만은 구해 내는 것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이. 화산과 당가가 점창을 외면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법정이 과연 어찌 나올 것인가?

“파국⋯⋯.”

머리가 채 완성하지 못한 말을 혀끝이 먼저 빚어낸다.

그 결과는 ‘파국’이라는 두 글자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구파일방과 천우맹, 두 세력은 영원히 한 길을 걷지 못하는 관계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

지독한 갈림길이다.

설사 의도가 있었다 한들, 법정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이 탈출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법정의 기대를 내버리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가를 포기할 수도 없다. 당가를 버린다는 것은 천우맹의 근본을 버린다는 말과 같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친우를 내버리지 않기 때문에 천우맹이 아니던가?

아니, 설사 천우맹이 허락한다고 할지라도 현종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종의 손이 덜덜 떨렸다.

당가를 선택한다면 친우를 선택하는 대신 신의를 내버리게 된다. 점창을 선택한다면 신의를 지키는 대신 친우의 희생을 눈감아야 한다.

어떻게 이 중 한쪽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깊이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만인방이 당가의 뒤를 쫓기 시작했고, 남은 사패련이 점창으로 향했다면 그들도 당장 방향을 바꾸어 그들을 쫓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둘 모두가 희생되고 말 것이다.

“태, 태상장문인. 이건⋯⋯.”

상황을 이해한 듯 운암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차마 무엇도 선택하지 못한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바로 그때였다.

“후우⋯⋯.”

낮은 한숨.

작지만 더없이 선명한 한숨 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찔러 왔다. 고개를 돌린 현종의 눈에 담담한 얼굴을 한 당군악의 모습이 보였다.

“도리가⋯⋯. 도리가 없군요.”

“가주님⋯⋯.”

“점창으로 가야 합니다. 맹주님.”

현종의 두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가, 가주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만인방이, 그 장일소가 당가의 식솔들을 뒤쫓고 있다는데! 우리가 돕지 않는다면 그들은⋯⋯.”

“말씀드렸다시피.”

당군악이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가는 그리 나약하지 않습니다. 만인방이라 해도 그들을 모두 잡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살 사람은 살 겁니다.”

하지만 현종은 그런 당군악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눈치가 없는 그조차 알 정도로 당군악의 목소리가 확연히 떨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가주님⋯⋯.”

“우리가 점창으로 가지 않는다면 저들에게 명분을 주게 됩니다. 그간 천우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도 명분이 없어 적당한 관계는 유지해 오던 방장이 소리 높여 천우맹을 비난해 댈 겁니다.”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광경은 그의 머릿속에서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물론 신의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가주님, 어찌⋯⋯.”

“맹주님.”

당군악이 현종의 말을 끊어 버린다.

“어떻게든 구파와 관계가 벌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이런 때이기에 더더욱!”

“⋯⋯.”

“점창으로 가야 합니다.”

현종이 망연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바라본 이들은 그의 제자들이 아니라 당군악의 뒤를 따르고 있던 당가의 정예들이었다.

지금 장일소가 쫓고 있는 이들은 크게 부르자면 당가의 식솔들이지만, 작게 부르면 이들의 형제이고, 부모이고, 자식이다.

당군악의 말은 그런 이들을 사파의 마수에 비명횡사할 위기 속에 내버려 두자는 말이었다. 너무도 차갑고, 너무도 비정하고, 또 너무도 가슴 아픈 말이다.

하나 그 말을 들은 당가의 누구도 당군악의 말에 반발하지 않는다. 그저 입술을 깨물고, 제 허벅지를 쥐어뜯으며 이 상황을 감내하고 있었다.

알기에.

옳건 그르건, 이 선택을 내려야 하는 당군악이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내장이 찢겨 나가는 고통을 참아 내는 것이다.

심지어 당가의 소가주인 당패마저도.

“어찌⋯⋯.”

“점창으로 가셔야 해요! 태상장문인.”

현종이 떨리는 눈으로 입을 연 이를 바라본다.

당소소.

화산의 막내이자 당군악의 딸인 그녀가 턱을 덜덜 떨면서도 어떻게든 버티며 말을 이었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소소야⋯⋯.”

“고민하실 일이 아니⋯⋯.”

그 순간, 누군가 당소소의 어깨를 움켜잡아 뒤로 당겼다.

“⋯⋯.”

놀란 당소소가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의 유이설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만해.”

무감정하게 들리지만,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당소소의 어깨가 경련을 일으켰다.

“아뇨. 아니에요, 사고⋯⋯. 점창으로 가야 해요. 점창으로.”

“알았으니 그만해.”

“우리가 이곳에 온 건 우리 힘만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피해를 끼칠 수는 없어요. 당가는 그런 곳이 아니⋯⋯.”

유이설이 당소소를 가만히 당겨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더는 말을 잇지 못한 당소소가 고개를 푹 숙인다.

침묵.

깊은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태상장문인.”

그때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백천이었다.

“상황은 알겠습니다만⋯⋯. 병력을 나누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까?”

백천의 말에 현종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순간 지독한 유혹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병력을 둘로 나누는 것으로 둘 모두를 구할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을 기회가 말이다.

설사 모두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의 노력을 해 보았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할 수 있지 않은가?

그건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천하의 현종도 순간적으로 흔들려야 했을 만큼. 하지만 현종은 자신을 찾아오는 유혹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그건 안 될 일이다. 자칫 했다가는 화산과 당가가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다. 저 장일소가 우리가 그리 움직일 것을 알고 함정을 파 두었다면 당해 낼 도리가 없어진다.”

백천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생각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저 남아 있는 미련을 털어 낸 것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태상장문인. 하지만 그렇다면 당가로 가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백천아⋯⋯.”

“당가뿐 아닙니다. 시기로 보아 큰일은 없어 보이지만, 사천에는 걸이 놈의 집도 있습니다. 우리가 점창으로 가면 거기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 말에 현종이 움찔하고는 조걸을 바라본다.

그러자 조걸이 성난 얼굴로 백천에게 소리쳤다.

“우리 집 이야기는 갑자기 왜 하십니까!”

“중요한 이야기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다른 이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 집을 지키러 가라는 말입니까? 제가 거길 가면 아버지가 저더러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하실 것 같습니까? 못난 자식 놈 뒀다고 화를 내시겠지!”

“걸아!”

조걸이 고개를 획 돌려서 현종을 바라본다.

“저희 집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태상장문인. 그들은 무인이 아닙니다.”

현종이 입술을 깨문다.

조걸의 뜻은 이해했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당가로 가는 건 저도 찬성입니다. 그들을 지켜야 합니다! 싸울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약한 이를 지키는 건 저희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점창이라고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형!”

윤종의 대답에 조걸이 버럭 고함을 쳤다.

“약한 이를 도와야 한다면 점창 역시 마찬가지다. 친분이 없다 해서, 천우맹이 아니라 해서 후순위로 미뤄 두는 것은⋯⋯.”

“협의가 아니란 말입니까?”

“아니.”

윤종이 단호한 눈으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도가 아니다.”

“⋯⋯.”

“자신이 더 기꺼워하는 이만을 끌어 앉는 것은 도가 아니다. 사람에는 고하가 없다. 그게 누구든.”

“빌어먹을! 대단한 도인 나셨네!”

조걸이 으르렁대며 거칠게 성질을 부렸다.

“사형은 그럼 도인 하십시오! 저는 당가의 친구가 될 테니까!”

“걸아!”

“아니 애초에⋯⋯.”

둘의 논쟁이 격해지려는 찰나, 당군악이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 말이 모두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조걸 도장.”

“⋯⋯가주님.”

“고맙네.”

“⋯⋯.”

조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백천 도장도. 하지만 지금은 당가로 가서는 안 되네. 우리가 잃어야 할 것이 너무도 크네.”

“신의 같은 건⋯⋯.”

“신의만이 아닐세. 무엇보다 큰 것은 천하가 가진 인식. 천우맹은 설령 그 안에 속한 문파가 아닐지라도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든 돕는다는 인식이 무너진다는 걸세.”

단호한 당군악의 말에 백천이 움찔한다.

어떻게든 그가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 그것을 당군악이 구태여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건 천하가 천우맹에게 있다 믿어 왔던 협의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네. 결국엔 우리도 급해지면 제 사람부터 챙긴다고 생각하겠지. 그런 곳을 누가 믿어 주려 하겠는가? 그리되면 천우맹은 가장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게 될 걸세. 그것에 비하면⋯⋯.”

당군악이 비정하게 입을 열었다.

“싸울 수 없는 이들의 목숨 같은 건 작은 부분이지.”

“⋯⋯.”

화를 내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럴 수 없었다. 그 말을 내뱉은 이가 바로 당군악이니까.

“사패련의 위협은 이제 더 이상 가능성 수준이 아닐세. 저들은 중원의 심장에 칼을 밀어 넣고 있네. 이런 상황에서 구파와 천우맹이 분열한다면 끝장일세. 장일소는 당연히 그 틈을 더욱 벌리고 천하에 불을 지를 테니.”

“⋯⋯.”

“내 말대로 하게나.”

“가주님⋯⋯.”

“그대들이 나를 당가의 가주로 존중한다면,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주게. 적어도 내 가문의 운명 정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게나.”

모두가 입술을 깨물고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부탁하네.”

당군악이 고개를 숙인다.

그건 너무도 처절한 부탁이었다. 그 부탁을 누가 감히 외면할 수 있겠는가?

소리치던 조걸도, 단호하던 백천도, 심지어 흔들리던 현종마저도 그 고갯짓 앞에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으.”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시끄럽네.”

“청명아!”

“야 인마!”

당군악이 잠시 내려놓았던 청명이 제 상체를 일으킨다. 한 손으로 제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댄 청명이 제게 뛰어오는 이들은 바라보고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괜찮냐 청명아?”

“왜? 뒈졌으면 좋겠어?”

“아니, 이 새끼야. 뭔 말을⋯⋯.”

“알았으니 비켜 봐. 이럴 때가 아닌 것 같구만.”

그 말에 오검들이 흠칫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청명과 당군악 두 사람 사이에 공간이 열린다.

“그새 뭔 일이 있었나 했더니⋯⋯. 장일소가 대단한 놈은 대단한 놈인 모양이네요.”

“⋯⋯자네.”

“천하의 가주님 입에서 헛소리가 나오게 만들고 말이죠.”

당군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고민할 것도 없는 일로 난리를 치고 있네. 어이, 사숙.”

“그래.”

“출발해.”

“어디로?”

“뭘 어디로야. 뻔한 소리를.”

청명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씨익 웃었다.

“당가로 간다. 가는 김에 장일소 새끼 목도 따고.”

모두의 분위기가 일변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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