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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27화 (1,428/1,567)

1427화. 그럼 이 비도는 실패작인가? (2)

느긋한 발소리가 울린다. 장일소가 당가의 중앙을 걷는 소리였다.

늙은이 하나 때문에 잠시 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그래 봐야 작은 일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당조평에 대한 생각은 이미 깨끗하게 지워진 뒤였다.

대신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반쯤 무너진 당가의 전각들이었다. 멀쩡한 전각과 불타 버린 전각이 여기저기 산재한 모습이 마치 지금의 강호를 축소해 놓은 것만 같다.

묘한 감흥이 밀려왔다.

“련주님! 샅샅이 수색해 보았지만, 이곳에 남은 이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쓸데없이 힘을 빼는구나. 의미 없대도.”

장일소의 핀잔에 적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오대세가쯤 되는 곳이라면 가문 내에 은신할 곳 하나 정도는 마련해 두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건물을 불태워 위장하고 그런 곳에 숨어 있지는 않은가 의심해 보았는데 헛수고였던 모양이다. 적호의 얼굴에 혼란이 스쳤다.

‘그렇다는 건⋯⋯ 당가가 정말로 가문을 내던지고 달아났단 말인가?’

그 사천당가가?

심지어 이런 상황은 저 장일소조차 예측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조금이라도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면 굳이 헛걸음할 사람이 아니잖은가?

“흐음.”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장일소가 나직이 비음을 흘렸다.

“⋯⋯어느 쪽일까?”

“예?”

“당가가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면 내 위명이 내 생각보다 더 높아진 걸까? 그 사천당가가 제집을 두고 비굴하게 달아나게 할 만큼?”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들이 아는 사천당가라면 결코 제 가문을 버리지 않았을 터. 그런 이들이 달아났다는 건, 지금의 당가가 그들이 알던 당가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달라졌다 해도, 그들을 짓밟으러 오는 이가 패군 장일소가 아니었다면 저들이 이런 선택을 했을 리 없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곳에서 항전했을 것이다.

장일소의 두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이유가 무엇이건 예측에서 벗어난 일이 생긴 게 그리 달갑진 않다. 아미와 점창을 무너뜨리며 달아올랐던 마음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만 같다.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뱃속을 긁었다.

“사천당가라⋯⋯. 아무튼 천우맹과 얽힌 놈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는구나. 아니, 그 아이와 얽힌 놈들이라고 해야 할까?”

장일소의 입에서 쿡쿡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관계는 없을 것이다. 이만한 거리에서 화산검협이 뭘 할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장일소는 묘하게 이런 일이 벌어진 데 화산검협의 영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귀찮은 아이라니까.”

혹시 이런 일이 벌어지기라도 할까 싶어 철저하게 동쪽으로 몰아넣어 두었거늘, 이 먼 거리에서까지 사람을 성가시게 한다.

장일소가 제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두 눈에 요악한 빛이 일렁이는 순간이었다.

“련주님!”

홍견 중 하나가 달려와 장일소의 앞에 부복했다.

“놈들이 움직인 종적을 찾았습니다. 북쪽입니다.”

장일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북쪽이겠지. 그 외에는 그들이 살아날 방도가 없으니까.

“규모는?”

“모두입니다. 당가타에 있던 인원까지 한 번에 움직인 모양입니다.”

이 소식은 의외라는 듯 장일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번에?”

“예!”

그의 붉은 입술이 순간 뒤틀렸다.

“흐음. 그러니까⋯⋯ 당가타에 있는 인원들까지 모두 모아 함께 달아나고 있단 소리니?”

“예, 련주님!”

장일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것참 묘한 일이구나. 당가는 직계와 방계의 구분이 철저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 직계가 아닌 이들은 물론이고 아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함께 달아나고 있다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이들까지 함께?”

“⋯⋯.”

“하, 이왕 달라질 거라면⋯⋯.”

장일소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조금 더 똑똑하게 굴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니?”

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수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가문의 인원들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면 장일소도 대처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를 잡고 누구를 놓아줘야 할지 잡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게 되니까.

그런데 굳이 한 방향으로 달아난다는 건, 대놓고 쫓아오라고 엉덩이를 흔드는 꼴이 아닌가?

“누굴 뒤쫓는 건 영 취향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유혹하는데 쫓아가 주지 않는 것도 매정하겠지. 준비하려무나. 놈들이 사천을 벗어나기 전에 잡아야 하니까.”

“예, 련주님!”

홍견이 즉시 명에 따르려는 순간이었다.

“아, 그 전에.”

“⋯⋯예?”

장일소가 반쯤 무너진 당가의 전각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누군가가 큰 결심을 했다면⋯⋯ 그 결심을 도와주는 것도 친절한 사람의 덕복 아니겠니?”

장일소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희게 어렸다.

“모조리 불 지르렴. 당가의 이름을 가진 것은 이 사천 땅에 단 하나도 남지 않게. 잿더미조차도 바람에 날려 모조리 흩어지고 사라지게 하려무나.”

“예, 련주님!”

모두 한차례 고개를 숙인 뒤 일사불란하게 달려갔다. 장일소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어떨까⋯⋯. 당군악.”

그는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것으로 사천당가는 뿌리를 잃었다. 당가라는 가문이 가진 특성상, 그들은 두 번 다시 지금 당가가 가진 위세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당군악은 과연 이 선택이 옳았다고 할까?

당가의 후손들이 대대로 당군악을 저주하고 힐난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가문을 버리고 떠난 이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할 수 있을까?

사천당가가 다시는 중원의 패자로 불리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위선도 그 정도면 병이란다.”

장일소가 쿡쿡 웃었다.

안쓰럽다. 안타깝다. 그러니 그에게 조금의 자비 정도는 베풀 수 있지 않을까?

화르르륵!

사방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천천히 타오른 불길은 이내 악마의 아가리처럼 거대해져서 아직 남아 있는 사천당가의 전각들을 집어삼켰다.

사천의 명문이자 독의 조종(祖宗)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던 사천당가의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있다.

성도 전체에서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화염. 이는 사천 땅이 사패련의 발아래 복속되었음을 알리는 봉화와도 같았다.

불길이 뿜어낸 빛이 장일소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묘한 미소를 흘리며 불타오르는 전각들을 지켜보던 장일소는 이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가자꾸나.”

“예!”

그가 당군악에게 베풀 수 있는 자비.

그건 당군악이 쉽사리 미련을 버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달아나려던 이들이 모조리 죽는다면, 굳이 제 속내를 숨길 것도 없이 화내고 원망할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모조리 뒈질 목숨을 쓸데없이 지키려다가 당가의 터마저도 불탔다고 피눈물 흘리며 욕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정말, 나는 너무 마음이 좋아 탈이라니까.”

난처하다는 듯 웃어 버린 장일소가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북쪽.

당가의 식솔들이 달아난 곳이었다.

❀ ❀ ❀

파아아앗!

강하게 땅을 박차던 당군악이 순간 흠칫하며 속도를 줄였다.

슬쩍 돌아보니 뒤와 거리가 또 벌어져 있었다. 보조를 맞춰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발이 급하게 앞서가 버리는 것이다.

그는 입술을 꽉 짓깨물었다.

알고 있다.

저들은 이미 지칠 만큼 지쳤다. 아니, 설사 지치지 않았다고 해도 당군악이 전력으로 전개하는 경공을 따라올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그러니 굳이 자꾸 이런 모습을 보여 줘 가며 급한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의미도 없고 마음만 초조해지니까.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마음이 앞질러서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당군악은 흘끗 시선을 내려 제 옆구리에 낀 청명을 보았다.

‘화산검협.’

당군악은 또한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지금 화산검협과 오검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의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외칠 것이다.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당군악의 고집이 그런 이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이미 늦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을 위해.

하지만⋯⋯.

“가주님!”

그 순간 옆까지 따라붙은 현종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건넸다.

“가주님,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하실 텐데, 저희의 무위가⋯⋯.”

당군악은 더 참담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왜 사과를 한단 말인가?

그를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건 화산뿐만이 아니다. 당가의 정예들도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건 매한가지. 그런데 왜 현종이 그에게 고개를 숙인단 말인가.

당군악이 참담한 마음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십시오. 사천에 거의 도달했으니 성도까지는 지척입니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리가 터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가에 도착하고 죽을 것입니다.”

그 말에 당군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현종의 뒤를 따르는 오검 역시 각오가 서린 얼굴이었다. 내심으로는 지금 당장 주저앉아 쓰러지고 싶을 텐데도 말이다.

‘만약⋯⋯.’

이 강행군 끝에 당가의 한 사람이라도 살려 낼 수 있다면, 사천당가는 화산에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될 것이다. 당군악은 그 사실을 명백히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삐이이이익!

하늘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새 울음에 모두가 급히 시선을 올렸다.

“개방입니다! 사천의 개방에서 날린 전서구가 분명합니다!”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당군악이 대번에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손을 뻗어 날아가는 전서구를 그대로 움켜잡았다.

탁!

다시 내려선 그는 벼락같은 손길로 전서구의 발에 매달린 전서 통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 든 첩지를 재빨리 확인한 당군악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가주님, 무슨 내용입니까?”

“⋯⋯보십시오.”

당군악이 손에 든 첩지를 현종에게 내밀었다. 그 내용을 확인한 현종의 얼굴 역시 굳어졌다.

[하오문 외 일문(一門), 점창 방향으로 남하. 만인방, 사천당가의 생존자들을 쫓아 북상 중.]

간결하게 상황만을 전달하고 있지만, 하지만 그 상황이 주는 의미는 절대 간결하지 않았다.

“그들이 둘로 나뉘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현종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저들이 어느 쪽을 노리든, 함께 움직였다면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무리로 나뉘었다면⋯⋯ 그 두 곳을 모두 돕는 건 불가능하다.

안 그래도 부족한 인원을 둘로 나눈다면, 화산과 당가가 각개격파를 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뒤쪽에서 상황을 들은 윤종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외쳤다.

“뭘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일단 북쪽으로 가야죠! 거기에 당가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는 당연하다 못해 뻔한 결론이다.

하지만 현종과 당군악의 얼굴에 서린 당혹감과 고뇌는 더욱 깊어졌다.

“⋯⋯이것이었구나.”

현종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당군악은 입술을 깨물었다.

- 점창만은 확실히 구해 주셔야 합니다.

법계가 신신당부하며 전했던 법정의 말.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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