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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25화 (1,426/1,567)

1425화. 여기가 사천당가인가? (5)

사해상회를 돌아보던 적호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 장일소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등을 향해.

“련주님.”

“음?”

“혹 저들을 그대로 두신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적호가 아는 장일소는 피를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세상 누구보다 피를 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장일소가 양민들을 손대지 않는 것은 대단한 원칙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다. 손을 대었을 때 얻을 이득이 없기 때문일 뿐.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양민이든 황족이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짓밟아 버릴 수 있는 이가 장일소였다.

그렇기에 의아한 것이다.

저 사해상회를 불태우는 것만으로도 저 화산의 제자들에게 고통을 안겨 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게 그리 대단한 고통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저들을 참살하는 것 역시 딱히 대단히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잖은가.

“시간이 아까워 그러신 거라면, 제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이유라⋯⋯.”

적호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지만, 장일소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홀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런 장일소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굳이 이유가 필요하니?”

“⋯⋯예?”

“그럼 단순한 변덕이라고 해 두자꾸나.”

적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라서였다. 하지만 적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장일소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다시 묻지 않니? 이해 못 한 눈치인데?”

“대답은 이미 들었습니다.”

련주에게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도 불충이다. 그저 답을 들었다면 그걸로 족했다. 적호는 그게 자신의 본분이라 여겼다.

슬쩍 적호를 돌아본 장일소가 붉은 입술을 뒤틀었다.

“네가 가명이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단다.”

적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뜬금없게 느껴졌다. 여기에서 갑자기 이런 말이 나올 이유가 있는가?

“이게 내가 가명이를 곁에 두는 이유란다. 가명이가 여기 있었다면 되레 저들을 가지고 놀고자 하는 나를 만류했을 거란다. 그리고 저들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모셔 두었겠지.”

“⋯⋯어째서입니까?”

장일소에게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상대가 호가명이라면 말이 다르다. 적호의 얼굴이 살짝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이를 본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만일 네 어미의 원수가 있다면 어찌하겠니?”

“찢어 죽일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효심 깊은 아이로구나. 쯧, 재미없게.”

장일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네 어미를 인질로 잡고 있는 이라면 어찌하겠느냐?”

적호는 일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미의 원수는 죽여야 한다. 하지만 어미를 인질로 잡고 있는 이는 어찌 상대해야 하는가?

어미를 중히 여기면 여길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적어도 쉽사리 움직이긴 어려울 것이다.

“그게 가명이가 저들을 살려 두려 했을 이유란다.”

“⋯⋯.”

“특히나 화산 같은 녀석들에게는 의미가 있는 일이지. 저 상회가 우리 손아귀에 있는 이상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알겠니? 원한 같은 걸 들이미는 건 구차하단다. 중요한 건 쓸모가 있느냐지.”

적호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이미 청성과 아미가 무너졌다. 그리고 이제는 당가와 점창이 정리될 것이다. 그 말인즉, 사천 전체가 사패련의 손아귀에 들어온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천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패련의 소유가 될 것이다. 굳이 저들을 죽여 없애는 것보다는 써먹을 수 있는 패로 활용하는 게 낫다.

그는 당장을 보았지만, 호가명이었다면 미래를 보았을 거란 말이다.

이 말은 적호에게 더없이 뼈아픈 지적이었다.

“⋯⋯하면, 지금이라도 저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병력을 조금 보내 두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내버려 두렴.”

적호는 이번에도 의문 어린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쯧쯧. 사람 말을 이해 못 하는구나. 나는 그저 가명이라면 그리했을 거라 말해 준 것뿐이란다.”

“하면⋯⋯ 련주님께서는?”

“말했잖니. 그냥 단순한 변덕이라고.”

“⋯⋯.”

“그냥 그러고 싶었단다. 그럼 안 되니?”

적호는 순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안 것이다. 그가 무슨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는지.

장일소는 장일소일 뿐, 그의 생각과 행동을 감히 이해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이 사람은 평범한 이들의 사고로 해석할 수 없으니까.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겠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당연히 사천당가였다.

장일소의 눈빛이 스산하게 물들었다.

“네가 보고 싶은 광경이 있다면 당가에서 보면 될 일이지.”

적어도 그곳에는 없을 것이다.

변덕도, 자비라는 이름의 사치도.

❀ ❀ ❀

그의 앞에 거대한 문이 있다.

사천당가(四川當家).

거대한 현판의 필체는 실로 용사비등했다. 그 문을 한참 바라보던 장일소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옮겨졌다.

대문에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매화인가?’

사천당가의 대문에 매화 문양이라니. 지독하게 안 어울렸다.

하지만 장일소의 눈에 묘한 빛이 도는 까닭은 그 문양이 주는 이질감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가⋯⋯ 사천당가인가? 이 고요한 곳이?”

장일소의 입에서 순간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용하다 못해 정적이 돈다.

물론 사천당가는 언제 어디서고 고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장일소를 맞이하는 이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맞서 싸울 마음이 가득하다 해도 숨을 죽이고 그를 노리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 고요는 비장한 각오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이건⋯⋯ 인적이 없을 때 찾아오는 적막함이었다.

게다가⋯⋯.

“려, 련주님. 연기가⋯⋯.”

장일소가 헛웃음을 흘렸다.

커다란 대문 너머, 사천당가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마치 이미 전화가 한번 스쳐 가기라도 한 듯 말이다.

또 다른 적? 그럴 리가 있는가.

이곳 사천당가까지 오는 동안, 당가타에서 단 하나의 적도 조우하지 않았다. 이것만 보아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일소의 표정이 살짝 뒤틀렸다.

‘사천당가가⋯⋯.’

당가라는 이들은 특성상 제 영역을 떠날 수 없는 것들이라 여겼건만, 그의 판단이 잘못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쨌건 확인해 봐야겠지.”

장일소가 앞을 향해 턱짓했다.

“열어라.”

“예!”

콰앙!

유서 깊은 사천당가를 오랫동안 지켜 온 대문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이윽고 드러난 광경에, 모두가 하나같이 아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가의 내부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을 휘황찬란하게 채워야 할 전각들은 반쯤 불에 타 버린 채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곧 잿더미가 될 모양새였다.

“⋯⋯이건⋯⋯.”

누군가 만일 이 광경만을 본다면 이곳이 중원 전체에 그 명성을 떨치는 사천당가라고는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흐음.”

모두가 할 말을 찾는 와중, 장일소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한 방 먹었다고 해야 하나? 설마 그 대단하신 당가 분들께서 꽁무니를 빼고 달아날 줄이야.”

“⋯⋯.”

“그것도 제집에 불까지 질러 가며 말이야. 이럼 내가 너무 허무해지잖니.”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어 댔다. 하지만 그가 아닌 다른 이들은 차마, 감히 웃을 수 없었다.

설마 저 당가가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적호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다른 문파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당가만은 아니다. 당가는 그 특성상, 가문을 버리고 떠날 수 없는 곳이 아닌가?

“뒤져라!”

적호의 입에서 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위장일지도 모른다. 놈들이 독과 공방을 버리고 달아났을 리가 없다. 놈들이 어디에 불을 질렀는지 확인하고, 숨어 있지는 않은지도 확인해라! 당장!”

“예!”

장일소를 호위하는 홍염들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방도는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쯧.”

장일소가 짧게 혀를 찼다.

‘묘하군.’

물론 그는 신이 아니다. 그러니 그의 예상이 빗나간 게 딱히 특별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은 뭔가 다르다. 묘한 위화감이 장일소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사천당가가 그의 예상에서 벗어나 제집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상황? 그건 분명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장일소를 거슬리게 하는 건,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서 ‘급박함’이 보인단 점이었다.

그들이 정말 이곳을 버리기로 결심했다면 더욱 철저하게 불을 질렀을 것이다. 사패련에 그 무엇 하나 남겨 주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 전각 곳곳에 어려 있는 혼란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그럴 생각이 없는데 등 떠밀려 떠난 이들이 남긴 흔적 같지 않은가?

“어, 없습니다!”

“놈들의 독 창고로 보이는 곳이 모조리 불에 탔습니다! 그 안에 온갖 독물들이 불타 죽어 있습니다!”

“무, 무기고에 있는 무기들이 죄 그을려 못 써먹게 됐습니다. 정말로 창고에 스스로 불을 지른 모양입니다.”

당황한 이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적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냥 웃었다. 쓸데없는 짓 그만두라는 명을 내리려는 바로 그 찰나였다.

“려, 련주님, 여기⋯⋯!”

장일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 사람이 있습니다!”

달려와 보고를 한 이의 표정은 어째 복잡해 보였다. 대체 이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자신도 막막하다는 듯이. 장일소가 걸음을 내디뎠다.

“가 보자꾸나.”

카앙!

크지 않은 소리였다.

카앙!

하지만 그 소리는 고요한 공방을 넘어 널리 퍼져 나갔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하지만, 확고하고 넓게.

카앙!

불에 타 반쯤 잿더미가 되어 버린 공방.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그 공방의 중앙에서 한 노인이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제 몸처럼 작디작은 화로를 앞에 두고 말이다.

허공으로 치솟았던 망치가 단숨에 아래로 떨어지며 모루 위의 달궈진 철을 후려쳤다.

카앙!

집게로 철을 집은 노인은 제 얼굴 가까이로 들어 올린 철을 세심히 살폈다. 흐릿한 듯 맑은, 답답한 듯 심유한 눈으로.

카앙!

노인이 다시 망치를 내리쳤다.

그 소리에 이끌린 듯 만인방도들이 하나둘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지만, 노인은 세상에 오직 자신과 화로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망치질을 이어 갔다.

괴이한 일이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지는 않더라도, 천하에서 가장 독랄하다는 말을 붙이기에는 어려움이 없는 만인방의 정예들이 적인 게 분명한 노인을 앞에 두고도 손을 쓰지 않는 광경이라니 말이다.

그들 역시 이 상황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노인의 망치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장일소가 노인 당조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건⋯⋯ 또 무슨 짓거리지?”

그의 얼굴이 금이 가듯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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