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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23화 (1,424/1,567)

1423화. 여기가 사천당가인가? (3)

당외도, 그리고 다른 당가인들도 모두 즉각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꺼지지 않는 불길이 어째서 피어났는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모두의 눈빛에 수많은 의혹이 피어났다가 이내 원망으로 바뀌어 갔다.

“왜⋯⋯.”

당외의 떨리는 목소리가 불길이 나무를 사르는 소리를 뚫고 흘러나왔다.

“왜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신수 어른⋯⋯. 어째서?”

당가 내에 다른 이가 이런 짓을 했다면 누구도 그 연유를 묻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은 그의 전신에 비도부터 박아 놓고 시작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당조평이니까. 비록 기나긴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의식이 올바르지 않을 때가 더 많다고는 하나, 그는 어쨌든 당가의 가장 큰 어른이자 당가의 핵심인 공방의 수장이다.

그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당가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전 원로원주이자 대장로인 당외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당외가 처절하게 묻자 당조평은 그저 느릿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원독으로 가득 찬 당외의 눈빛과 무심하게 서늘한 당조평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당조평이 입이 열렸다.

“⋯⋯태웠을 뿐이다.”

으득.

당외는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누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지금 어른께서 무엇을 태웠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어쩌자고 독고와 공방에 불을 지르신 겁니까! 저 당가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곳에! 심지어 백로혈까지 써 가며!”

“⋯⋯.”

“왜요! 왜! 왜 그러신 겁니까! 아무리 정신이 맑지 않다고 하나 신수 어른 아니십니까! 왜!”

당외의 목소리에선 피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원망과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의 모든 것이었던 당가가 불타오르고 있다. 금방이라도 붉은 피눈물이 그의 눈을 타고 흘러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당조평의 눈빛은 여전히 그저 서늘하기만 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수 어른, 대체⋯⋯.”

당외 대신 다른 장로들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마치 그 입을 틀어막듯 담담한 당조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에는 없다.”

“⋯⋯예?”

“이제는 없다. 애써 지켜야 할 것도, 보전해야 할 것도.”

“⋯⋯.”

“그러니 가거라. 남은 것은 썩어 문드러질 전각뿐이니까.”

장로들이 고개를 돌려 타오르는 불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당조평의 말이 틀리지 않다.

그들이 이곳에서 지키려 했던 건 당가가 천하에 자랑하는 독과 암기를 제조할 수 있는 시설이자 그 근원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모조리 잿더미가 돼 버릴 상황이니, 이젠 더 이상 이곳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목숨 걸고 사패련과 싸워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 뭣들 하느냐?”

당외가 발작적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꺼라! 당장 저 불을 끄라니까!”

“대, 대장로님.”

“뭘 뻔히 구경이나 하고 있어! 불을 끄지 못한다면 안에 있는 물건들이라도 꺼내라! 당장! 움직이란 말이다!”

당외가 처절하게 발악했지만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분명 백로혈로 피워 낸 불이라 해도 끌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백로혈 자체가 천하제일의 암기로 세상에 명성을 날렸을 터.

하지만 불을 끄는 게 가능하다 해도 지극히 어렵다. 저만한 불길을 제압하려면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달려들어도 한세월은 걸릴 것이다.

그때는 이미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설사 불이 붙지 않은 화로와 독물들을 챙겨 나온다 해도 그것만으로 당가를 재건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당외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장로들이 움직이질 않자, 입술을 짓깨물었던 당외가 외쳤다.

“비켜라! 내가 직접⋯⋯.”

하지만 그때 당조평이 입을 열었다.

“그게 네가 할 일이더냐?”

그 순간 멈칫한 당외가 부들부들 떨며 당조평을 노려보았다.

“⋯⋯제정신이시군요.”

혹시라도 당조평이 정신이 나가 이런 짓을 저질렀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당조평의 의식은 또렷하다.

“⋯⋯그래서, 이제 후련하십니까?”

당외의 입에서 혼을 갈아 낸 듯한 통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선조들이 수백 년간 지켜 온 걸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고 나니 이제 만족하십니까? 사천당가라는 이름이 세상에서 사라지도록 만들고 나니 속이 시원하십니까? 명예도 잃고 실력도 잃은 당가 놈들이 목숨줄 겨우 부지할 기회를 만들어 주셔서 기쁘기라도 하십니까?”

“당⋯⋯.”

“저 안에!”

당외의 손이 격하게 공방을 가리켰다. 그 마른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신수 어른께서 평생을 바쳐 온 것들이 고스란히 있습니다! 그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고 나니 행복하시냐 이 말입니다! 신수 어른이나 저나 살 만큼 살았으니 죽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어른의 그 독단 덕분에 당가의 남은 아이들은 평생 동안 박해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강호를 살아간다는 건, 결국 수많은 원한을 짊어지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가가 강하기에 숨죽이던 이들이 당가가 힘을 잃는 순간 이를 드러낼 게 분명하다.

지금 당조평은 가문의 후인들을 그 원한의 굴레 안으로 밀어 넣어 버린 것이다.

“어찌 그리 무심하십니까! 어찌 그리 독하십니까! 이게 정말 당가를 위한 겁니까? 당신이 정말 당가의 큰 어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가를 지켜야 했습니다! 왜 그걸 모르십니까!”

당외의 악다구니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감정에 휩쓸려 예도 잊고 두서없이 쏘아 대는 말이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 모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여기가.”

“⋯⋯예?”

당조평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가 평생을 살아온 당가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전각 하나, 그가 딛고 있는 바닥 하나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당가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건 당조평 역시 당외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가 사천당가인가?”

당외가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인가? 이제 와 다시 정신이 나가 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대답해 보거라.”

“어르신!”

“여기가 사천당가냐고 묻지 않느냐!”

그 순간 당조평의 입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위세에 당외가 순간 움찔했다. 당조평의 두 눈에 독기가 어렸다.

“이 천치 같은 것들이! 기껏해야 전각, 기껏해야 독 덩어리! 기껏해야 철 덩어리를 주물러 만든 꼴같잖은 무기!”

“⋯⋯어르신?”

“그게 당가더냐! 그게 정말 사천당가더냐! 대답해 보거라!”

“⋯⋯.”

“독이 없으면 당가가 아니고! 암기가 없으면 당가가 아니냐?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도 모르는 이 머저리 같은 놈들!”

그 순간 당조평이 제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거칠게 내던졌다.

터엉!

바닥에 처박혔던 작은 망치는 그대로 튀어 올랐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음이 가라앉자 당가는 순식간에 침묵으로 휩싸였다.

저 맥없이 팽개쳐진 작은 망치가 얼마나 많은 것을 만들어 냈던가? 저 망치는 당조평의 자존심인 동시에 당가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당조평이 그런 망치를 내팽개쳐 버린 것이다.

“이깟 철 덩어리 따위를 지키자고 목숨을 걸어?”

“어르신!”

“사람만 있으면!”

당조평의 노기가 용솟음쳤다. 다 늙은 노인의 몸이 흡사 붉은 불길을 토해 내는 작은 화로처럼 보였다.

“사람만 있으면 이따위 것은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람만 있으면!”

“⋯⋯.”

“설사 다시는 지금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한다 해도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 당가가 당가로 남기 위해 그 목숨을 모두 버려야 한다면, 그깟 당가 따위는 사라지는 게 낫다!”

“이⋯⋯!”

당외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 기세가 얼마나 과격한지, 당황한 당벽은 저도 모르게 당외의 팔을 움켜잡았다. 당외가 당장이라도 당조평에게 달려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당외를 빤히 바라보던 당조평이 느리게 주변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가라.”

“⋯⋯.”

“이제 너희가 지켜야 할 건 없다. 지켜야 할 게 있다면 오직 하나, 너희의 목숨뿐이다.”

“⋯⋯신수 어르신.”

“그러니 가라. 한시가 급하다. 적도가 도달하기 전에 떠나라.”

말을 끝낸 당조평이 몸을 돌렸다. 그의 등을 향해 당외의 처절한 고함이 쏟아졌다.

“그러고도 죽어서 선조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분들이 어른께 뭐라 할 것 같습니까! 어르신은 당가의 역사에 다시없을 죄인으로 남을 겁니다! 아니, 당가의 피를 이은 모두가 당신의 무덤에 침을 뱉고 욕을 할 것이외다! 신수 어른! 아니, 당조평!”

당조평은 그저 말없이 불타고 있는 공방으로 향했다.

‘모두가 침을 뱉고 욕을 한다라⋯⋯.’

그의 입가에 불그림자와 함께 작은 미소가 드리웠다.

‘그럼 다행이겠구나.’

적어도 그를 욕할 당가의 후인이 남아 있을 거란 말이니까. 그것이면 됐다. 애초에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후인이니 모두 이룬 셈이다.

“어르신⋯⋯.”

그때 멀리서 지켜보던 공방의 장인들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 눈빛에 거리감이 있고 쭈뼛거렸다. 당조평은 그들을 흘끗 보며 무심히 말했다.

“너희도 가거라.”

“⋯⋯.”

“어르신께서는⋯⋯?”

당조평이 불타오르는 공방을 지그시 보았다. 그가 지른 불로 잿더미가 되어 가는 공방을.

“나는 여기에 남을 것이다.”

그의 말에 장인은 뭔가 말을 하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게, 사패련을 피해 달아나는 길은 무척이나 고될 것이다. 당조평에게는 더 이상 그 길을 갈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

“⋯⋯보중하십시오.”

장인들이 당조평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한 일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진심을 다해 예를 표했다. 그것이 당가를 지켜 온 장인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장인들의 예를 받은 당조평은 대답 없이 불타는 공방 한편으로 걸어갔다. 공방은 점점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가 살아온 곳. 그가 숨을 쉬고, 지켜 온 곳.

‘암존 할아버님.’

눈에 뿌연 눈물이 차올랐다. 할아버님이 남겼던 당부를 지켜 내었다는 뿌듯함과 그의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불살랐다는 고통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걸로 되었습니까?’

어쩌면 당외의 말대로, 당조평은 당가의 혼을 끊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들은 앞으로 영원히 당가이되 당가가 아닌 존재로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옳았던 걸까? 과연 이리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최선이었을까?

알 수 없다. 아마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할아버님.’

선명히 떠오른다. 부드럽게 웃으며 어린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당보의 손길이. 그 손은 더없이 따뜻했고, 또 푸근했다.

아마 지금 이곳에 당보가 있었다면, 분명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 잘했다.

당조평의 주름진 눈가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 버린 이가 그날의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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