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2화. 여기가 사천당가인가? (2)
“투척에 필요한 암기들이 모두 준비됐습니다.”
“대장로님! 당가 정문 쪽에 설치된 환독미리진(幻毒迷理陣) 확인을 마쳤습니다.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금급(禁級) 암기 불출을 마쳤습니다! 장로님들께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급박하게 달려온 이들이 연이어 당외에게 보고를 쏟아냈다.
“당가타에 머무는 방계도 모두 가문 내로 소집했습니다. 소식이 닿지 않는 이들을 빼고는 하나 남김없이 집결 중입니다!”
사천당가 역사를 통틀어도 과연 존재했을까 의심스러운, 말 그대로 총력전이다. 가문 내에 거하는 당가의 직계는 물론이고, 당가타에서 살아가는 방계마저 모조리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이래야 당가라고 할 수 있다. 저 장일소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놈들은?”
“아직은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있습니다.”
“음.”
아미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사백 리에 달한다. 평범한 이라면 못해도 나흘은 꼬박 달려야 도달할 수 있을 거리다.
그러니 제아무리 사패련이라 해도, 마음먹는 것만으로 바로 당도할 순 없을 것이었다. 적어도 오늘 해가 지기까지는 시간이 있을 터.
“모든 상황을 한 번 더 점검해라. 그리고⋯⋯.”
당외가 단호하게 명했다.
“가문의 아녀자들에게도 독과 암기를 불출한다.”
“대, 대장로님! 그건⋯⋯.”
장로들이 화들짝 놀랐다.
이곳은 당가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당씨는 아니다.
당가의 사람이되 당씨 성을 받지 못한 이들. 당가에 시집온 아녀자들은 당당한 사천당가의 일원임에도 암기와 독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천당가는 강호의 명문이자 사천의 유력가다. 그러니 당가로 시집을 오는 이들 역시 한가락 하는 가문의 여인일 수밖에 없다.
혹여나 그들이 당가의 비전을 제 가문에 유출할 수도 있다는 우려하에 수백 년 동안 암기와 독을 불출하지 않았고, 이는 전통과도 같았다.
심지어는 시집온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법도가 아니다. 당씨 성을 타고 난 여아들조차도 당가에서 ‘비기’라 지칭할 만한 독과 암기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토록 철저하게 지켜온 법도다.
그런데 지금 당외가 그 법도를 무너뜨리라 말하고 있다. 당가 내에서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이었던 그가 말이다.
“⋯⋯하, 하지만 외인에게⋯⋯.”
차마 그 명만은 들을 수 없다는 듯 웅얼대는 장로를 보며 당외가 차게 물었다.
“누가 외인인가?”
당외는 장로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제 목숨을 걸어 당가를 지키겠다고 나섰다. 그런 이들 중 외인이 어디에 있는가? 당씨 성을 쓰지 않는다고 외인이란 말이더냐.”
그 말에 장로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당외 역시 속내는 다를지 모른다. 평생을 고수해 온 사고방식을 한순간에 바꾸는 건 어려우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상황에서 저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법도를 어긴 죄는 내가 받겠다. 너희는 그저 내 명에 따랐을 뿐이다. 그러니 내어 주어라. 싸울 무기도 주지 않고 싸우라 할 수는 없다.”
“예, 대장로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책임은 자신이 진다. 그 말이면 됐다. 당외가 직접 책임을 지겠다고 한 이상, 당군악이 다른 이들을 징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서둘러라! 가문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모든 것을 다시 점검해라! 아직 마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끝내라! 한시가 급하다!”
“예!”
안색을 굳힌 채 급히 달려가는 장로들을 보던 당외가 순간 휘청했다.
“쿨럭!”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몇 차례 기침을 토했다. 몸이 격렬하게 들썩였다. 마른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런⋯⋯.”
딱히 병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몸이 전에 비할 바 없이 약해졌을 뿐. 단전이 파괴당한 무인은 평범한 이들에게도 미치지 못할 만큼 쇠약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감당하기에 당외는 너무 늙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이곳에 서서 버티는 것조차 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만일 그에게 무학이 남아 있었다면 침습해 오는 악적들과 후회 없이 싸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독을 뿌릴 내력도, 암기를 던질 근력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당가다.
당외는 당가의 전각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웅얼대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습구나⋯⋯.”
한때 그는 이 전각들을 끔찍하다고 여겼다.
그의 것일 수 있었음에도 끝내 그의 것이 되지 못한 것들. 그의 삶은 평생 동안 이 저주스러운 것들을 다시 제 품 안에 안기 위한 여정이었다.
아버지에게 부정당하고, 동생의 그림자로 살아갔으며 이제는 조카에게조차 벌을 받는 삶. 그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그에게 안겨 준 게 다름 아닌 이 당가다.
그럼에도 당외는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키려 한다. 끔찍했을지언정, 그게 그의 삶이니까. 이곳에는 그의 모든 것이 스며들어 있으니까.
그는 실패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당가의 실패자로 남을 것이다. 당가가 사라져 버리면, 그때부턴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모두 마찬가지다.’
당가가 존재하기에 이곳의 모두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당가가 사라진다면 이들은 물론이고, 천하에 사천당가라는 이름을 울려 퍼지게 만들었던 모든 이들의 피와 땀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니!
‘지켜 낼 것이다.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당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암기를 더 가져와라! 아낄 필요 없다!”
“예, 대장로님!”
“당벽!”
“예!”
“가주의 집무전에 가면 뒤쪽에 가주의 독고가 있다! 그 안에 비치된 독들을 챙겨 와라!”
“대, 대장로님. 하지만 거긴 가주가 지닌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
“부숴라!”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당벽이 사색이 되어 묻자 당외가 새파랗게 노려보았다.
“내가 지금 농담이라도 하는 것 같으냐?”
“⋯⋯.”
“네가 가지 않는다면 내가 가겠다.”
“아, 아닙니다, 대장로님. 명대로 하겠습니다!”
당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학을 잃은 당외가 정말로 그 금고를 부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해야 한다면 당벽이 하는 것이 맞다.
대장로는 정말 뒤를 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이 전투 끝까지 살아남을 생각조차 없는 건지도 모른다.
대장로가 그 정도의 큰 각오를 굳혔다면, 그 역시 엉덩이를 뺄 수는 없다.
“가능한 건 모조리 쓴다. 독고와 화로만 남길 수 있다면,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가문은 반드시 되살릴 수 있다. 명심해라! 독고와 화로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한다!”
“예!”
당외가 다시 한번 굳은 각오를 모두에게 불어넣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부, 불이야아아아아아아!”
뒤쪽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외가 획 시선을 돌리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불이라니!
‘노, 놈들이 벌써?’
사패련 놈들이 벌써 당가에 잠입했다는 말인가? 그건 불가능할 텐데?
“적이냐?”
“모,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불길이⋯⋯!”
이젠 당외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전각 위로 얼핏 보이던 불꽃이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화염이 되어 솟구쳤으니 말이다.
저건 절대 자연적인 불일 수 없었다.
“적습인지 확인해라! 어서!”
“예!”
기겁한 장로 몇이 황급히 진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갔다. 초조한 마음으로 손을 떨던 당외에게 금세 마음을 놓을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저, 적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침입의 흔적이 없습니다.”
“아⋯⋯.”
순간 다리가 풀릴 뻔했던 당외는 가까스로 몸을 바로 세웠다.
그렇다면 아마도 화기를 분출하는 과정에서 불이 난 모양이다. 흔치 않은 일이지만,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사고이나 수습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쯧. 이런 때에.”
언짢게 혀를 찬 당외가 외쳤다.
“어서 불길을 잡아라!”
“예, 대장로님.”
사소한 일에 신경을 둘 때가 아니니 고개를 돌리려던 당외는 순간 멈칫했다.
‘잠깐⋯⋯.’
저 불길은⋯⋯.
“어, 어디냐?”
“예?”
“불! 저 불이 붙은 게 어디냐!”
당외가 갑자기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 말에 눈을 끔뻑이던 장로들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아, 양각(陽閣)⋯⋯. 양각이!”
“뭐 하는 것이냐! 어서 가라! 불을 꺼라! 어서어어어어!”
“예!”
양각. 더없이 온화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그리 따뜻한 곳이 아니다.
천하의 수많은 독과 독물들을 바탕으로 당가만의 비전 독을 제조하는 곳. 그렇기에 지금껏 당가가 모아 온 모든 독과 독물들이 모여 있는 실험실이 바로 양각에 있다. 말 그대로 당가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하필 그런 곳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이⋯⋯!”
아랫사람들에게 맡겨 놓을 수만 없었던 당외가 전력으로 내달렸다. 이미 달음박질조차 쉽지 않은 몸뚱이지만 불이 난 곳이 양각이라면 이리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불이야 잡으면 그만이다. 불은⋯⋯.’
애써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리며 달렸지만, 양각에 도착했을 때 당외가 맞닥뜨린 광경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당가의 장로들이 달려들어 어떻게든 불을 끄려 하고 있지만 조금도 잡힐 기미가 없어 보였다.
“대, 대장로님!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뭐, 뭐라?”
당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불입니다! 고, 공방에 불이 붙었습니다!”
“천독고에 불이 났습니다! 얼른 사람을 불러 주십시오! 보통 불길이 아닙니다!”
당가의 곳곳에서 시뻘건 화염이 솟구쳤다.
당가의 독을 연구하는 암실이 있는 양각, 당가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백로가 있는 공방,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만들어 낸 당가의 비전들을 보관하는 독고까지.
사천당가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할 곳들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꺼, 꺼라.”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에, 천하의 당외조차 아연실색하며 반쯤 이성을 놓아 버렸다.
“불을 꺼라아아아아아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불을 꺼! 어서어어어어어!”
새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사천당가, 목숨을 걸어 지키려 했던 사천당가가 이 순간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저 사패련의 칼이 닿지조차 않았음에도.
“꺼, 꺼지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이 불이 꺼지질 않습니다!”
“건물을 당장 무너뜨려야 합니다!”
“제정신이오? 독고를 무너뜨리면 독물들이 모조리 죽어! 이 미친 인간아!”
“그럼 어쩌자고? 불이 꺼지지 않는데! 이대로 다 태울 셈이야?”
평생 당가의 무인으로, 품위를 지키며 명석하게 살아왔던 당가의 장로들도 이 순간에는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험한 말이 오고 갔다.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당외의 입에서 넋 나간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련된 무인들이 직접 나섰는데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이 말인즉, 평범한 불이 아니라는 뜻이다.
당외는 알고 있었다.
천하에 단 하나, 이런 불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물질을.
“백⋯⋯로혈(白爐血).”
백로의 불은 꺼져서는 안 된다. 그 용도를 다했더라도 잔불만은 지켜 내야 한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백색의 화로. 그건 당가의 상징이자, 혼이다.
그렇기에 당가의 선조들은 천하를 뒤졌고, 꺼지지 않는 불을 일으킬 수 있는 기름을 만들어 냈다.
백로의 불이 꺼지지 않는 한, 당가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백로혈이라 이름 지었다. 그 기름은 백로의 피이고, 당가의 피이다. 그 양이 너무도 적어 차마 암기로도 사용할 수 없는, 오직 당가 최고의 장인만이 그 손에 드는 것이 허락되는 기름이다.
“왜⋯⋯.”
당가를 불태우던 화로가 순간 흰빛으로 물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만 당외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왜! 왜에에에! 왜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타오르는 화염, 그 한편에서 망치를 든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신수(神手) 당조평.
항상 흐리던 그의 눈이 평소와 달리 새파란 빛을 머금고 차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