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420화 (1,421/1,567)

1420화. 무의미하다 해도. (5)

“⋯⋯지금 뭐라 했느냐?”

“다, 다시 보고드립니다!”

부복한 이가 새파래진 얼굴로 소리쳤다.

“현재 사패련주 장일소가 사패련의 전력을 대동한 채, 청성과 아미를 불태웠습니다! 다음 목표는 당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 장일소?”

사천당가의 총관 당상수의 얼굴에선 삽시간에 핏기가 가셨다.

“패, 패군이 난데없이 왜 사천에 나타난단 말이더냐!”

그 악에 받친 물음엔 이렇다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질문이되 질문이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 지금 놈들은 어디에 있느냐?”

“개방에서 전해온 정보대로라면 현재 아미산에 올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찰대를 파견했으니 곧 정확한 정보가 들어올 것입니다!”

당상수는 순간 힘을 잃고 풀리려는 다리를 억지로 세웠다.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그는 이 사천당가의 총관이다. 가주와 소가주가 부재한 지금, 그에겐 이곳에 남은 식솔과 사천당가의 가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그 짐이 너무도 무겁고 버겁게 느껴졌다.

사패련, 그리고 장일소다. 일개 총관에 불과한 그가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혹여 가주님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느냐? 개방에서 가주님의 말씀을 함께 전해오지는 않았냐 이 말이다!”

“그,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당상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미에서 이곳까지는 분명 가깝다고는 할 수 없을 거리다. 하지만 상대가 사패련이라면 불과 반나절 만에라도 도착할 수 있을 터.

‘달아나야 한다!’

처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너무도 명확했다.

지금 이곳에는 무력대라 부를 만한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가의 무력을 담당하는 이들은 가주가 거의 다 이끌고 장강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남은 이들 중 싸울 수 있는 이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나, 그들만으로 사패련에 대적하고 당가를 지켜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온전한 힘을 보존하고 있던 청성과 아미마저 잿더미로 만든 사패련을 이곳에 남은 이들끼리 무슨 수로 감당한단 말인가?

“당장 모든 가솔들에게 알려라! 전각을 버리고 달아나야 한⋯⋯.”

“총관.”

그 순간,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당상수를 불렀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돌아본 당상수는 순간 움찔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없던 차가운 기도의 노인이 어느새 나타나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당상수가 고개를 숙였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적을 마주한 것은 아니다. 당가의 장로들을 어찌 적이라 할 수 있겠나. 하지만 피차 반가울 관계도 아니다.

‘워, 원로원이⋯⋯.’

장로들은 가주와의 권력 싸움에서 완전히 밀려나 가문 내에서 힘을 잃고 실각했다. 그런데 그 장로들 중 하나가 지금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황은 들었소이다.”

“예? 아⋯⋯. 예! 장로님. 지금 당장 적들을 피해 달아나야 합니다! 자칫하다가는⋯⋯.”

“침착하시오.”

“⋯⋯예?”

당황한 당상수가 눈을 끔뻑였다. 당가의 장로인 당벽(當闢)이 혀를 차며 그런 그를 응시했다.

“총관은 책임질 수 있소?”

당상수가 멍하니 당벽을 바라보았다. 책임이라니, 지금 책임을 논할 상황이던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가주께서 아무리 총관에게 가문의 일을 일임했다고 하나, 그건 지금 같은 상황까지 상정한 처사는 아닐 것이오. 그렇지 않소?”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틀린 말은 아니다.

만약 당군악이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절대 총관인 당상수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최소한 소가주인 당패라도 남겨 상황을 대비토록 했을 터.

당벽이 서늘한 눈으로 재차 일갈했다.

“안다면 그 권한을 합당한 이에게 넘기시오. 지금의 상황은 총관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오.”

당상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확실히 현재 상황이 제게 버거운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장로님. 합당한 이라니요. 지금 가문 내에 이 상황을 감당하기 적합한 이가 있다는 말이십니까?”

“그렇소이다.”

“그게 누구를⋯⋯.”

당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의심을 하는군. 나를 칭하는 건 당연히 아니오. 나 정도로는 어렵지. 지금 상황에 가문의 운명을 결정할 만한 분이 원로원주 외에 또 누가 계신단 말이오.”

당상수의 얼굴이 짧은 순간 여러 차례 변했다.

원로원주 당외.

아니, 전(前) 원로원주 당외. 이제는 원로원이 해체되었으니 그 직함을 쓰지 못하지만, 과거 그는 당가 내에서 가주인 당군악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였다.

청명과의 비무에서 패배해 완전히 실권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가문을 쥐락펴락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 하지만 원로원주께서는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것을 따지고 있다는 말이오?”

“⋯⋯.”

“하면? 총관께서는 자신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벌어질 일들을 모두 감당할 자신이 있단 말이오? 그대가 잘못된 판단을 하여 사천당가를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당상수의 손이 덜덜 떨렸다.

감당할 수 없다. 직계라는 허울 하나로 총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상수에게는 너무도 큰 짐이었다.

“어찌하시겠소?”

하지만 당외에게 결정권을 넘기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당외는 당군악의 지시로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던 당가의 죄인이 아닌가? 그런 이에게 어찌 다시 이 막중한 권한을 넘겨줄 수 있단 말인가?

“총관!”

“⋯⋯.”

“칼을 휘두르는 이가 올바른가는 둘째 문제요. 중요한 건 그에게 칼을 휘두를 힘이 있는가 하는 점이지. 총관은 당가의 운명이라는 칼을 휘두를 용기가 있소?”

당상수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지금 그대가 보여야 할 용기는 제 모자람을 스스로 알고 물러나는 것이오. 더는 당가에 죄를 짓지 마시오!”

“⋯⋯원주님을⋯⋯.”

결국 당상수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원주님을 뵙겠습니다.”

그제야 당벽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당상수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뒤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외면해 보며.

‘당가를 위해서다.’

모든 것은 그저 당가를 위해서.

“음.”

그리하여 당가의 깊은 심처.

방 안에 자리한 침상에 걸터앉은 노인은 묘한 눈빛으로 제 앞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당상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해 보면 기이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는 이미 무학을 잃은 지 오래된 힘없는 노인에 지나지 않는다. 부족하나마 무학을 착실히 익혀 온 그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야 했다.

심지어 눈앞의 노인이 죄를 지어 하옥되었다가 가주의 자비로 겨우 뒷방에 거하는 게 허락된 존재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당상수는 눈앞의 노인을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전 원로원주 당외가 과거에 가졌던 막대한 권력과 능력, 천하의 당군악마저 손안에 넣고 주무르기 위해 보였던 지독한 심계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당상수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쩍 고개를 들었던 당상수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뭔 눈빛이⋯⋯.’

일반적으로 무학을 잃은 무인은 폐인이 되거나, 최소한 이전의 기세를 잃기 마련이다.

하지만 당외의 눈빛은 과거 쟁쟁했던 시절보다 못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 오히려 더 날카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예, 원주님.”

당외의 주름진 얼굴이 순간 꿈틀했다.

“나는 지금 원주가 아니니 대장로라 부르게.”

“⋯⋯예, 대장로님. 지금 그⋯⋯ 사패련의 장일소가 제 수하들을 대동하고 당가로 들이닥칠 판입니다. 그러니 한시바삐 가솔들을 이끌고 이곳을 탈출해야⋯⋯.”

“쯧쯧.”

그 순간 당외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절로 움츠러든 당상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문을 버린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인가?”

“⋯⋯예?”

“당가는 터전을 버리지 않네. 차라리 멸문지화를 받아들이지, 등을 보이지는 않는단 말이야.”

“하, 하지만 저희만으로는 저들을 감당키가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불가능한가?”

당상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으니 혹시 당외가 억하심정으로 괜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마주한 당외의 눈은 여전히 침착하고 날카로웠다.

“왜? 이 늙은이가 노망이라도 든 것 같은가?”

“그, 그게 아니옵고⋯⋯.”

“총관. 당가가 물러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야⋯⋯ 저희가 당가인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어린애 같은 말을 해 대는군. 틀렸네.”

“예?”

당외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가가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물러서면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이네.”

“⋯⋯.”

“다른 문파는 사람만 살아 있다면, 무학만 지켜 낼 수 있다면 어떻게든 문파의 기틀을 다시 잡을 수 있네. 시간이 흐른다면 예전의 명성을 뛰어넘는 것 역시 불가능하진 않겠지. 하지만 우리는 아니네. 왜인지 아는가?”

당상수는 모른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물음을 들은 순간 그 이유가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배, 백로⋯⋯.”

“그렇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당가에 단 하나 존재하는 화로가 백로(白爐)이다. 그 화로에는 당가가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모든 기술이 녹아 있다.

이는 즉⋯⋯ 한번 백로가 망가진다면 무슨 수를 써도 백로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의미다.

“백로를 잃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

그리고 그 백로가 없다면 당가의 모든 기술을 집약해 만들어 온 가장 뛰어난 암기들은 제작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백로만이 아니네. 백로가 아닌 청로(靑爐)조차 새로 만들어 내는 게 쉽지 않지.”

당외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진짜 중한 것에 비한다면 백로 따위는 차라리 작은 부분이지. 우리가 이곳을 버린다는 건 당가의 독고(毒庫)가 불탄다는 소리가 되네. 당가의 시조 때부터 하나하나 만들고 모아 온 모든 독을 잃을 것이고, 가문이 그 피와 땀으로 천하를 뒤져 찾아낸 독물들조차 모조리 잿더미가 되겠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일어설 수 없다.

사람이 살아남는다면야 사천당가라는 이름은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가는 절대 예전의 당가일 수 없게 될 것이다.

독과 암기를 잃은 당가가 어찌 당가일 수 있겠는가.

싸울 수 있는 이들이 모두 살아남는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던질 암기가 없고, 흩뿌릴 독이 없는데.

독도, 암기도 쓰지 못하는 당가의 무인을 대체 누가 겁낸단 말인가?

무학은 사람의 몸에 쌓여 사라지지 않는다. 구결은 그 머리에만 남아 있으면 언제든 다시 비급으로 써 낼 수 있다.

하지만 불타 버린 독은 다시 구할 수 없고, 천하를 뒤져 찾아낸 귀하디귀한 독물은 단순히 노력한다 해서 다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가가 지금과 같은 독을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어쩌면 몇백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영영 다시는 지금과 같은 수준에 오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황망한 당상수의 표정을 보며 당외가 혀를 찼다.

“이제야 이해하겠는가? 어째서 우리가 물러설 수 없는지. 어째서 선조들이 물러나지 않았는지.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 터전을 지켜 냈는지.”

“하, 하지만 대장로님. 과거에는 분명 천마를 피해⋯⋯.”

“마교는 전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네. 화산을 굳이 불태운 게 더 이상한 일이었지. 하지만⋯⋯ 자네는 패군이 사람이 없어진 당가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 같은가?”

⋯⋯그럴 리가 없다. 장일소라면 이곳을 철저하게 파괴할 것이다. 다시는 당가가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지 못하도록.

“알겠는가? 선조들은 그걸 아셨기에 이 사천당가를 천하의 요새로 만든 것이네. 감히 외인이 범할 수 없도록 함정을 파고, 절진을 설치하며! 이는 모두 물러서는 순간 당가가 끝난단 걸 아셨기 때문이지.”

당상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데 고작 사람 목숨 몇 구하자고 당가의 이름을 이곳에서 끝내겠다는 것인가? 그게 지금 당씨 성을 가진 이가 할 수 있는 말인가?”

당상수를 노려보는 당외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쏟아졌다.

그 질책 어린 눈빛 앞에서 당상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침묵하는 것뿐이었다.

“가솔들을 모으게.”

“대장로님⋯⋯.”

“당씨 성을 쓰는 이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으게나. 상대가 누구든 당가는 물러서지 않네. 마지막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마지막 기와 한 장이 불탈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네. 당연히⋯⋯.”

당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말이네.”

그 말이 당상수에게는 쐐기와 같았다. 무공을 잃은 노인조차도 옥쇄를 각오하는 판에 그가 무슨 낯으로 후퇴를 논하겠는가?

주먹을 꽉 움켜쥔 당상수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가솔들을 모으겠습니다.”

“서두르게.”

“예.”

당상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이건 모두 당가를 위한 일이다. 그러니 결코 잘못된 일일 리 없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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