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9화. 무의미하다 해도. (4)
아미파(峨嵋派).
“이 사파의 악적 놈들!”
“아미를 우습게 보지 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승복 차림의 비구니들이 날카로운 검을 매섭게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피 맛을 봐 버린 사파인들은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었다.
붉은 피풍의를 두른 혈궁도의 기형 병기가 뒤에서 날아들며 한 비구니의 몸을 연이어 꿰뚫었다.
“아아아아악!”
“사부니이이이임!”
“이, 이 사특한⋯⋯.”
입에서 피를 콸콸 쏟으면서도 비구니는 어떻게든 검을 휘두르려 팔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몸에 파고든 병기가 먼저 비틀리며 내장을 가리가리 찢어 놓았다.
파앗!
또 하나의 목숨이 피 분수와 함께 스러져 갔다.
아미파의 여승 옥당향(玉堂香)의 눈에서 통한의 눈물이 쏟아졌다.
‘사부님!’
그녀가 평생 모신 스승인 금소(金紹)의 몸이 적도의 칼날에 찢기고 말았다.
‘왜⋯⋯.’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모두 그저 이 아미산 자락에서 불자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려 했을 뿐인데, 왜 이토록 잔혹한 공격을 감당해야 하는가.
그녀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적대하지 않았다. 하물며 작은 미물의 생조차 빼앗지 않기 위해서 평생을 조심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부처의 가르침이자, 비구로서 지켜야 할 삶이었으니.
이토록 쉽사리 타인의 목숨을 빼앗고 그 생과 죽음을 모조리 조롱하는 저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많은 업보는 저들은 대체 어찌 감당하려 하는가.
“네 이놈들!”
콰아아앙!
우렁우렁한 호령과 함께, 아미파의 장문인 관해(觀解)가 지팡이로 땅을 강렬하게 내리쳤다.
가공할 내력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관해에게로 집중되었다.
으득!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모은 관해의 얼굴은 흡사 하늘의 신장처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가 내뿜는 기세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그녀는 하늘을 가를 기세로 외쳤다.
“천벌이 두렵지도 않으냐!”
두려움을 모르고 날뛰던 혈궁도와 하오문도들도 일순 주춤하며 그녀를 살폈다.
분위기를 감지한 홍견들이 만만치 않은 상대의 등장에 입술을 핥으며 슬금슬금 포위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날아든 목소리가 있었다.
“관해사태께서 직접 나서시다니.”
저벅. 저벅.
한 사내가 천천히 관해의 정면을 향해 걸어갔다.
“이리 영광스러울 데가.”
“네놈은 누구냐?”
관해가 슬쩍 찌푸리며 차게 물었다.
강호에선 나이가 한 사람의 신분과 능력을 대변해 준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렇다 해도 앞으로 나선 이 사내는 너무 젊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관해의 건너편에 설 수는 없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정작 건너편에 다가와 선 이는 태연하기만 했다.
“말씀을 드린다고 아실 것 같지는 않고.”
“네놈은 장일소가 아니구나! 장일소를 불러오너라, 당장! 그놈에게 이 살육의 죄를 묻겠다!”
관해의 일갈에 앞으로 나선 젊은 사내가 피식 웃었다.
“장일소라⋯⋯.”
사내의 어둑한 눈빛이 파랗게 번뜩였다.
“늙은 중이 산골에만 처박혀 살다 보니 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이제 련주께서는 너 따위가 독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이 말이지.”
“이놈이 감히!”
“아미 장문인 관해사태(觀解師太)의 상대는, 나 정도면 충분하지.”
다시 한번 불호령을 내리려던 관해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이 허여멀건 젊은 놈이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것이다.
얼굴이야 더없이 젊으나, 풍기는 기운은 결코 젊은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관해의 얼굴에 노기가 드리웠다.
“⋯⋯네놈! 천면이로구나!”
“호오.”
그러자 젊은 청년의 얼굴을 뒤집어쓴 천면수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천하의 관해사태께서 이 미욱한 놈의 별호를 다 알아주시고, 이리 감읍할 데가⋯⋯.”
“놈!”
콰앙!
관해가 사특한 것을 물리치려는 듯 들고 있던 지팡이로 다시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대체 어쩔 셈이냐!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이런 짓을 해서 너희가 무엇을 얻는다고! 스쳐 가는 삶, 이 많은 죄를 지어 대체 어떻게⋯⋯.”
“아아.”
천면수사가 지겹다는 듯 휘휘 손을 내저었다.
“고매하신 사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엔, 이쪽에 너무 더러운 놈들밖에 없으니 쓸데없는 소리는 그쯤 해 두십시다.”
“이놈이⋯⋯.”
“하지만 하나는 걸리는군. 무엇을 얻겠냐고 물었던가요?”
젊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끌끌대는 웃음이 소름 끼치게 흘러나왔다.
“너희에게는 지금까지 강호가 그저 즐거웠겠지. 누구도 감히 너희의 것을 탐하지 않으니까.”
“⋯⋯.”
“하지만 우리가 얻는 것은 고작해야 너희가 먹다 흘린 부스러기뿐이었지. 세상이 이럴 때를 두고 너희는 평화라고 부르더군.”
“그래서 이토록 무고한 피를 보겠다는 것이냐!”
천면수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태. 댁들은 이미 누릴 만큼 누렸으니 내세가 두렵고, 지옥이 두렵겠지만, 우리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지.”
천면수사의 양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여하튼 말은 여기까지 하지. 내 뒤에 계신 분은 사실 보기와 다르게 성미가 그리 느긋하시질 않아서 말이야. 더 지체했다가는 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거든.”
신장(神杖)을 움켜잡은 관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천면수사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천면수사 정도야 혼자서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천면수사의 뒤로 까마득히 서 있는 사파의 악귀들은 아미의 제자들만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었다.
저 수많은 악적을 준비도 못 한 채 맞이했는데 어찌 온전히 감당하겠는가.
“우리가 대체 너희에게 무엇을 했다고⋯⋯.”
“구질구질한 말 따위는 치우자고.”
천면수사가 관해사태를 향해 느긋하게 다가갔다.
“그동안은 너희가 더 강했기에 우리가 숨을 죽이고 당해 왔던 것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더 강하니까 너희가 죽는 것이지. 강호는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관해사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대에서 아미가 끝을 고하겠구나.’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그 하나 죽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하겠지만, 저 피에 굶주린 승냥이들은 절대 관해의 목숨 하나로 만족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후회가 물밀듯 밀려들었지만, 이제는 다 소용없는 이야기다.
“금화(金和).”
“예, 장문인.”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탈출하거라.”
“자, 장문인! 그건⋯⋯.”
“말다툼할 때가 아니다!”
관해의 명령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완강했다. 금화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가라! 어서!”
“예!”
금화가 뒤로 달려가자 관해사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또한 부처의 뜻일는지.’
모든 것은 그저 업보.
만일 아미가 업보를 치르는 것이라면, 그들이 저질렀던 죄가 돌아오는 것이리라.
관해가 저지른 죄는, 세상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은 죄.
그리고 아미가 저지른 죄는⋯⋯.
관해의 입가에 처연한 웃음이 스쳤다.
‘원망조차 할 수 없구나.’
오래전, 천하를 위해 피 흘려 싸웠던 이들을 외면한 죄다.
‘이것이 업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이제 갓 아미에 입문한 어린 제자들이 어찌 그 죄를 같이 짊어진단 말인가? 그건 너무도 가혹한 처사다.
“관음이시여⋯⋯.”
관음께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신다면, 아미의 어린 제자들에게만은 그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관해는 그저 그리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오거라, 사파의 악적들아. 아미는 결코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다 늙은 중이 입만 살았구나! 쳐라!”
천면수사가 수백의 장영을 자아내며 관해사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하오문도와 혈궁도가 다시 한번 기세를 끌어 올리며 아미의 여승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련주님!”
태연한 얼굴로 아미를 둘러보던 장일소의 뒤로 한 사람이 부복했다.
“아미는 일각 이내에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흐음.”
장일소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듯 옆으로 기울였다.
“쉽구나.”
“⋯⋯.”
“생각보다 너무 간단해. 모멸감이 들 정도야. 나는 지금까지 이런 놈들에게조차 몸을 숙이고 있었던 거로구나.”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래도 아미라는 문파는 본디 이리 쉽게 무너질 곳이 아니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이보다 시간이 더 걸렸어야 하고, 사패련도 이보다 더 큰 희생을 치렀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싱거울 정도로 일방적인 전투가 되었다.
아미라는 문파가 가진 힘이 그 이름값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의미다.
사파가 서로 물어뜯어 가며 수없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사천에 있는 놈들은 마치 신선놀음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세상을 살아온 것이다. 흡사 영원히 늑대에게 쫓길 일이 없었던 양들처럼.
“배알이 뒤틀리는군.”
장일소가 조용히 웃었다. 악귀의 것처럼 일그러져 섬뜩한 표정이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대갓집에 태어나 제 손가락에 작은 가시 박히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인 줄 알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더러운 거름통에서 태어나, 고작 한 끼를 먹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람의 목에 칼을 박아 넣어야 한다.
딱히 그 사실에 불만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그래, 뭐 아무래도 좋겠지.”
장일소가 조용히 중얼대고는 물었다.
“천면은?”
“관해사태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홍견이 지원하고 있으니, 곧 늙은이의 목을 따 올 것입니다.”
“흐음.”
장일소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했다.
“천면에게 가서 전하렴.”
“예!”
“아미를 정리하는 대로 군을 둘로 나눌 거란다. 천면에게 혈궁과 하오문을 이끌고 점창을 정리하고 오라고 하려무나.”
“하오문과 혈궁⋯⋯. 둘 모두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니?”
장일소의 반문에, 부복한 이가 급히 고개를 더 깊게 조아렸다.
“아, 아닙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러면 된단다.”
장일소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우리 방 녀석들은 따로 준비하라고 하렴.”
“⋯⋯어디로?”
“술값을 받으러 간단다.”
“⋯⋯예?”
장일소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그때 독왕에게 준 술이 생각보다 비싼 것이었거든.”
마음만 먹었다면 청성을 밟고 내려오는 길에 당가를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력이 빠진 당가보단 역시 그 힘을 온전히 보존한 아미를 치는 게 우선이었다. 청성의 소식을 전해 듣고 준비를 마치기 전에 급습해야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젠 아미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니, 장일소에게 마침내 여유가 주어진 것이다.
“당군악, 당군악⋯⋯.”
가만히 읊조리던 장일소의 두 눈에 귀기가 어렸다.
홀로 만인방으로 쳐들어와 그를 위협하고 돌아서던 당군악의 모습이 아직도 두 눈에 선했다.
“난 계속 궁금했거든.”
“⋯⋯.”
“독왕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 당가 성 가진 놈들이 모조리 죽어 버려 씨가 말랐을 때조차 변하지 않을지. 그때도 친구니 어쩌니 하는 낯간지러운 말을 지껄일 수 있을지 말이야.”
부복한 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번 기회에 그냥 확인해 보고 싶단다. 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이름 높은 불문 아미의 멸망을 기념하는 듯한 요사스러운 웃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커다란 광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