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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18화 (1,419/1,567)

1418화. 무의미하다 해도. (3)

“점창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합니다.”

현종이 법계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위를 헤아리려는 듯 말이다.

‘무슨 의도지?’

법계가 꺼낸 말이 무리한 부탁이라서가 아니다.

저 사패련의 폭압 아래 고통받는 이라면, 그게 누구든 천우맹은 최선을 다해 구해 낼 것이다. 그건 법정 역시 알고 있을진대, 굳이 ‘점창’을 콕 집어 언급하는 이유가 선뜻 짐작 가질 않았다.

“방장께서는⋯⋯.”

“저는 그저 방장의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천우맹에서 그리해 주신다면, 저희는 목숨을 걸고 길을 열겠습니다.”

현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법계는 조금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다만, 너무 많은 전력이 이곳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위험해집니다. 그건 알고 계시겠지요?”

현종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법계의 말대로 이곳에 있는 이들이 한꺼번에 쑥 빠져 버린다면, 호가명은 당연히 남은 이들을 이끌고 남은 인원들을 노릴 것이다.

그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전력을 남겨야 한다.

“빠져나갈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두 문파가 될 것입니다.”

법계의 말에 찰나간 현종이 움찔했다.

“저희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두 문파라.”

“어떠십니까?”

현종이 소매 안에 감춰 둔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실 상대해야 할 적을 생각한다면 ‘고작’ 두 문파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천에 있는 이들과 힘을 합칠 수만 있다면 희망이 아주 없을 인원도 아니다.

사실 현종은 다 떠나서⋯⋯ 이들의 의도가 마음에 걸렸다. 법정은 대체 왜 이제 와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그 순간 법계가 입을 열었다.

“방장의 저의를 너무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장로님.”

법계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맹주님께서 방장을 의심하는 마음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결코 천우맹만의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사천에 있는 이들을 구해 내야 하는 건 저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법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말을 하면서도 내심 우스웠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소림에게 구해야 하는 이와 구하지 않아도 되는 이가 나뉘어 존재했다던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하면서도 법계는 그 마음을 외면하려 애썼다.

“저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니, 그저 천우맹의 힘을 빌리려 함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현종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알 수 없었다. 법계는 이리 말하지만, 법정이 정말 아무 의도 없이 그들을 돕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그리 쉽사리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 한들,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있겠는가.

눈을 뜬 현종이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눈빛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내 현종이 법계를 향해 차분히 말했다.

“가겠습니다.”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면 어느 문파를 대동하실 생각이십니까?”

“한 문파는 당연히 당가입니다.”

사실상 당연한 말이다. 지금의 당가에게 사천으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설령 뒤늦게 도착하여 이미 불타 버린 당가의 잔해만을 확인한다 해도, 그 잔해를 두 눈으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응당 당가여야 한다.

“그럼 다른 한 문파는⋯⋯. 아니, 물을 것도 없겠군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법계가 고개를 내저었다.

한마음으로 모여든 것이 천우맹이라고는 하나, 가장 시급한 곳에 언제나 가장 먼저 달려가는 문파는 오직 하나.

“당연히 화산이겠지요.”

“그렇습니다.”

법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장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법계가 소림 특유의 반장을 하고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하지만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지 멈칫하며 돌아섰다. 그는 심유한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다 말했다.

“⋯⋯장문인.”

“말씀하시지요.”

“소림의 제자가 아니라 한 불자로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점창뿐 아니라 그곳에서 또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현종이 그런 그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이 사람은 제 의지로 강을 건넜다. 천우맹을 돕기 위해, 강호가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마음에 과연 다른 사특함이 깃들어 있었을까?

천우맹과 구파의 관계는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졌지만, 이런 이들이 있다면 언젠가는 그 관계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리하겠습니다.”

현종이 포권을 하자, 법계가 다시 깊이 반장 하고는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법계의 두 눈에 깊은 감흥이 내려앉았다.

‘모를 일이구나.’

그는 천우맹을, 화산을 좋게만 보지 않는다. 법정의 뜻에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천우맹의 과격함과 과도한 의욕이 일을 그르치게 할 수도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법계는 화산을 사천으로 보내게 된 이 순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위험에 빠져 있을 때, 가장 그곳에 있어 주었으면 싶은 문파가 다름 아닌 화산이란 사실을. 법계 그조차도 그리 여기고 있음을 말이다.

“아미타불. 먼저 움직이시면 저희가 호응할 것이외다.”

법계가 경공을 전개해 멀어져 가는 순간, 임소병의 신랄한 목소리가 울렸다.

“설마 소림 방장이 정말 호의로 우리를 보내 주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녹림왕.”

“우리 천우맹이 사천으로 가서 점창을 구해 내는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소림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제 손에 피는 묻히지 않고 생색은 생색대로 낼 수 있을 테니 어찌해도 남는 장사겠죠.”

임소병이 슬쩍 소림 쪽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점창을 구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임소병의 목소리가 격해지려는 찰나, 현종이 담담한 얼굴로 가로막았다.

“화산과 당가가 패군과 싸워 양패구상하게 된다면 그 이상 좋을 게 없다는 말씀이시겠지요.”

임소병이 굳은 얼굴로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 그리 어리석지는 않소이다. 계략은 몰라도 사람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지요. 하지만⋯⋯.”

현종이 슬쩍 당군악을 향해 곁눈질했다.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 속이 지금도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을 게 분명하다.

“부모가 자식을 구함에 있어 손해를 따진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소.”

그 순간 임소병은 보았다. 당군악이 희게 질린 주먹을 더 꽉 틀어쥐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화산은⋯⋯. 천우맹은 친우를 도우며 이해득실을 논하는 곳이 아니외다.”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시겠소? 그대로 막으시겠소?”

현종의 물음에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쪽을 돌아보았다.

“저 지랄맞은 인간이 뒈졌다면 모를까, 아직 숨이 붙어 있는데 제가 무슨 수로 맹주님을 막겠습니까? 눈 뜨자마자 패 죽이겠다고 난리 칠 게 뻔할 텐데.”

“⋯⋯.”

“딴죽 걸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하십시오. 이게 제 역할입니다. 그나저나 저는 안 데리고 가십니까? 도움이 될 텐데.”

임소병의 너스레에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의 상황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요. 그대가 없으면 저들을 감당하기가 버겁지 않겠습니까.”

임소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가명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그는 이곳에서 놈의 상황을 봐야 한다.

그때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임소병이 말했다. 나직한 목소리였다.

“위험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발을 빼셔야 합니다.”

“명심하겠소.”

현종이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보았다.

“궁주님.”

“예, 맹주.”

“이곳을 부탁드립니다.”

맹소는 무거운 짐을 넘겨받은 사람처럼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희생 없이 강을 건너겠습니다. 강을 건너는 대로 저희도 사천으로 향할 테니, 그저 먼저 간다 여기십시오.”

“감사합니다.”

현종이 고개를 돌려 금양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금양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장문인.”

금양백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했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부드러웠다.

“다시 뵐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해남을 부탁드립니다, 맹주님.”

현종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고 해야 할 말도 많지만, 시간이 없다.

이 순간에도 사천은 피로 뒤덮이고 있을 테니까.

어찌 보면 부질없을지도 모르는 발버둥이라도 상관없다.

‘우린 그 부질없는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인 게지.’

현종은 각오를 다진 눈빛을 당군악에게로 던졌다.

“가주님, 가십시다. 한시가 급하니.”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필사적으로 제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당가의 식솔들이 으르렁대는 듯한 신음을 토해 냈다.

“화산!”

“예, 태상장문인!”

“서둘러라! 사천으로 간다!”

“예!”

오검의 상태를 슬쩍 살핀 현종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획 돌렸다.

“출발하라!”

그리고 곧장 장강을 향해 달렸다.

그 뒤를 따라 화산과 당가, 천우맹의 핵심 인사들이 새파란 살기를 내뿜으며 내달렸다.

“군사! 놈들이 움직입니다!”

보고가 귀에 날아와 꽂혔다. 호가명의 눈이 서늘하게 전방을 응시했다. 장강으로 향하는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지금 수로채를⋯⋯.”

“내버려 둬라.”

“예?”

화들짝 놀란 부관이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부관의 얼굴에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하지만 호가명은 고개를 내저어 그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막을 필요 없다.”

“구, 군사⋯⋯.”

호가명은 이렇다 할 부연도 없이 그저 장강에 뛰어드는 화산과 당가를 응시했다. 그 주변을 호위하듯 움직이는 구파의 모습도 말이다.

“⋯⋯법정이라.”

호가명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피해 없이 이곳에 최대한 많은 이들을 붙잡아 놓는 것이다. 법정과 호가명의 이해가 합치된다면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화산과 당가, 그 두 문파를 보내는 대가로 휴전을 맺는다면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지독한 인간이로군. 이런 상황에서⋯⋯.”

호가명의 입가에 드문 미소가 피어났다.

정파니, 사파니, 그런 구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은 뒤집어쓴 거죽만 다를 뿐, 하는 짓은 다를 바가 없는데 말이다. 장일소의 말대로 결국 인간의 속은 하나같이 추악할 뿐이다.

청명은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고 당군악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를 주시하던 호가명의 두 눈에 복잡한 심경이 스쳤다.

‘매화검귀.’

결국 청명은 이렇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해남에서부터 이곳까지, 모든 것을 걸어서 죽이려 했던 적을 놓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호가명의 속은 그리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실패는 아니니까.

그가 매화검귀를 극한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저자가 의식을 차리고 있었다면, 절대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자는 천하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장일소의 대적자니까. 반드시 어느 순간에는 위화감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희생도, 만인방의 희생도 가치 있다고 평해야겠지.

다만 아쉽기는 했다.

으득.

호가명이 나직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 지옥을 뚫고 향하는 곳이 사천이라면, 호가명이 다시 저자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매화검귀가 아무리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해도, 장일소가 일으킨 겁화는 분명 그 하늘마저 뒤덮어 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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