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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17화 (1,418/1,567)

1417화. 무의미하다 해도. (2)

몸을 돌려 걸어가던 법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눈에 드넓은 장강의 모습이 들어왔지만, 그런다고 이 꽉 막힌 속이 뚫릴 리는 없었다.

“법계!”

“예! 방장!”

“개방에 전해 어떻게든 사천에 이 소식을 전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 방장⋯⋯. 하지만 이미⋯⋯.”

“나도 알고 있다!”

“⋯⋯.”

터져 나온 법정의 고함에 법계가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를 노려보던 법정이 심호흡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청성과 아미는 이미 늦었을지 모르지만, 바삐 소식을 전한다면 점창은 몸을 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할 때다!”

“아, 알겠습니다! 방장!”

법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재빠르게 개방으로 전서를 날릴 준비를 하는 동안, 종리형이 슬그머니 법정의 곁으로 다가왔다.

“방장⋯⋯.”

법정이 서늘한 눈으로 종리형을 돌아본다. 그 눈빛에 움찔한 종리형이 용기를 내어 다시 입을 연다.

“정말 사천으로는 가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

“압니다, 방장. 이미 가 봐야 늦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방장께서 말씀하셨듯이⋯⋯.”

“혹여나 빨리 달려가면 그들을 구할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시겠지요.”

“제,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패군이고, 사패련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청성과 아미가 아닙니까? 그들이 그리 쉽사리 당할 리가 없습니다.”

법정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까지 당하고도 아직 종리형은 사파를 얕잡아 보는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토록이나 당하고도 말이다.

확실히 청성과 아미가 가진 이름은 드높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해야 할 패군의 능력은 이제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기껏해야 소수의 생존자가 살아남는 정도겠지. 그들을 수습한다 한들 대체 뭐가 달라진다는 말인가?

“장문인.”

“예. 방장.”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 그게 무슨?”

종리형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곳에서 물러난 사패련의 군세가 어디로 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 그야. 당연히 사천으로 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는다면요?”

“예?”

“그들이 사천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어쩌실 셈입니까?”

종리형의 눈에 의문이 떠오른다. 법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순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종리형의 반응을 본 법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남경에서 물러났지만, 아직 사천으로 향한 것은 아닙니다. 수로채의 선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이곳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장강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

법정이 묵직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우리가 섣불리 사천으로 향한다면 저들은 분명 하남으로 밀고 올라갈 것입니다.”

“그, 그런⋯⋯.”

종리형의 시선이 멀리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패련의 군세로 향했다.

확실히 법정의 말대로 저들의 물러나는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언제든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이곳에 장일소가 없는데도 말입니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법정이 아니라 팽엽이었다.

“패군은 없지만, 흑귀보와 해남으로 향했던 만인방의 잔당, 그리고 중소사파들은 있소.”

“⋯⋯.”

“그리고 그 정도 전력만으로도 무주공산이 된 하남을 쓸어버리는 것 정도야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종리형이 넋이 나가 버린 듯한 표정으로 팽엽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그도 이제야 상황이 이해된 듯 중얼거린다.

“저들이 사천을 짓밟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기서 발을 빼지 못한다는 겁니까?”

“⋯⋯.”

“무, 무슨 상황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까? 대체⋯⋯.”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장일소가 파 놓은 함정은 쉽사리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쳐 놓은 덫에 발을 들인 대가는 너무도 컸다. 한 번 진창에 빠진 발은 아무리 애를 써도 더 깊이 파고들 뿐이었다.

“아미타불.”

법정이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그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노기가 치밀어 오른다.

이 모든 건 천우맹의 섣부른 움직임 때문에 초래된 일이다. 하지만 막상 그 어리석음 때문에 피해를 보는 쪽은 다름 아닌 구파였다.

청성과 아미의 궤멸이 확실시되고, 점창마저 위험해진 상황.

하나 천우맹이 입는 피해라 해 봐야 고작 주력이 빠진 당가가 짓밟히는 정도가 아닌가?

물론 독과 암기가 그 전력의 칠 할 이상을 차지하는 당가의 특성상 가문이 짓밟히는 것을 작은 일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한 문파의 피해를 세 문파의 멸문과 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법정을 가장 고통스레 만드는 것은 그로서는 그 세 문파의 멸문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법정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저지른 잘못이 없음에도 잃어야 하고, 저들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도 해남을 얻었구나.’

이 기가 막힌 상황을 대체 그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저들이 이득을 얻었으니 저들이 옳았다 해야 하는가?

“그럼⋯⋯.”

종리형이 희게 질린 얼굴로 물어 왔다.

“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방장?”

그 말을 들은 법정이 고개를 돌려 사패련의 군세를 바라본다.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던 법정의 시선이 이윽고 천우맹에게로 향했다.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있기는 있지요.”

법정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법정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그들을 절로 숨죽이도록 만들었다. 한동안 무심한 눈으로 천우맹을 바라보던 법정의 입이 마침내 천천히 열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멀어진 구파를 말없이 바라보던 현종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프구나.’

칼날 같은 말이었다. 사람을 상처 주기 위해서 벼려 낸 것 같은 말. 하지만 현종을 더욱 침음하게 하는 것은 그 말 중 딱히 틀린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것은 결국 그들의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돕지 않는다고 해서 저들을 탓할 수 없었다. 그저 쓰린 속을 부여잡을 뿐.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맹주님.”

현종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남 장문인 금양백이 심유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문인⋯⋯.”

“천우맹이 아니었다면, 해남으로 달려와 준 이들이 없었다면. 이곳에 있는 해남 제자 중 단 한 사람도 살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금양백이 자신의 제자들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에도 맹주님께서 자신을 탓하신다면, 우리가 괜히 살아남은 이들이 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아닙니다. 그저.”

금양백이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한다.

“그 결과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해서, 천우맹의 뜻이 잘못되었다 말할 이는 천하의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

“그리고 지금은 자책하실 때가 아닙니다. 사천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종이 아연한 눈으로 금양백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숨은 이미 경각에 달했다. 그건 무학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금양백은 스스로의 용태가 아니라 사천을 논하고 있었다.

“장문인. 우선은 몸을⋯⋯.”

“아닙니다.”

금양백이 고개를 내젓는다.

“저는 이미 살 만큼 살았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제가 아니라 사천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알기 때문입니다.”

금양백이 단호한 눈으로 현종을 바라본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절박한 처지에 처한 이들이 어떤 심정인지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우맹이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천은 누구도 돕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

“가시지요, 맹주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설사 그게 무의미한 발버둥에 불과하다 해도, 누군가의 죽음에 발버둥을 쳐 줄 이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종의 고개가 결국에는 끄덕여졌다.

알고 있다.

상황이 어찌 되든, 결국 그들이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무의미하다 한들, 저 사천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현종이 고개를 돌려 다른 문파의 수장들을 바라본다.

“구파가 저리 나왔으니 우리 단독으로라도 사천으로 갈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어찌⋯⋯.”

“무립니다.”

그 순간, 현종의 말을 임소병이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녹림왕.”

“마음은 알겠지만, 도리가 없습니다. 구파가 같이 싸워 주지 않는 이상 우리만으로 저 방어선을 돌파하는 건 난해한 일입니다. 설령 뚫어 낸다 한들 사천으로 가는 길 내내 공격을 받으며 피해는 피해대로 보고, 사천에 도착하는 순간 사방에서 합공을 당해 전멸할 겁니다.”

냉정한 말.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었다. 특히나 이미 똑같은 일에 시달리며 이곳까지 온 이들에게는 몇 배는 더 섬뜩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 그럼 강을 건너면 되지 않습니까?”

남궁도위의 말에 임소병의 눈이 차가워진다.

“저들이 완전히 물러난 것으로 보이십니까?”

“⋯⋯.”

그 말에 남궁도위가 고개를 돌려 사패련을 바라본다. 물러나던 이들이 어느새 멈춰 서 있었다. 언제든 다시 달려들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 채 말이다.

“호가명 놈이 이미 저기에 합류했을 겁니다. 놈은 최대한 시간을 끌려 하겠지요. 만약 우리가 무모한 도하를 시도한다면 분명 다시 달려들 것입니다. 그럼 등을 공격당하게 됩니다.”

여전히 장강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낸 수로채의 선단을 본 이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럼⋯⋯.”

“놈들이 물러날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무슨 수가 있을 것 아닙니까! 이대로 구경만 하자는 소립니까?”

남궁도위가 답답한 듯 고함을 내질렀지만, 임소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놈들도 먼저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소림 방장이 개방을 비롯한 지원을 불러들이면 세의 불리를 깨닫고 물러나게 될 겁니다. 길어 봐야 하루⋯⋯.”

“그럼 늦는다고!”

쾅!

조걸이 바닥을 내 밟으며 강렬한 기파를 사방으로 내뿜었다. 하지만 임소병은 냉정한 얼굴로 모두를 바라볼 뿐이었다.

“현실은 현실⋯⋯.”

“모두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말을 자르며 날아든 목소리에 임소병이 고개를 돌린다. 그의 두 눈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백천의 모습이 들어왔다.

“모두가 가지 않으면 됩니다. 갈 수도 없고요.”

“도장.”

“뒤를 막아 주십시오. 강을 건너겠습니다. 발이 빠른 이들을 이끌고 사천으로 가겠습니다.”

임소병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백천을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관짝에 들어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린가?

“그건 가능하겠지요?”

임소병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로 백천을 바라본다. 대체 이 인간은 어디까지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인가?

“대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

“⋯⋯.”

백천이 단호한 얼굴로 임소병을 바라본다.

“그것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녹림왕.”

“⋯⋯.”

그런 백천의 등 뒤로 몇몇 사람이 다가가 선다. 아무리 말려 봐야 소용이 없다는 얼굴을 한 채로.

그들이, 그 뒤에 선 이들이 이곳에서 가장 심한 부상을 입은 이들이란 사실이 임소병을 진절머리 치게 했다.

“⋯⋯불가.”

“녹림왕!”

“사천은 해남이 아닙니다. 고작 몇몇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 봐야 개죽음이나 당할 뿐입니다!”

“시도는 해 봐야⋯⋯.”

“시도고 나발이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

백천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무는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불호. 명백히 혜연의 목소리와는 다른 그 불호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법계.

소림의 이인자인 그가 어느새 그들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워낙 격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이라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아니?”

“아미타불. 방장의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말씀?”

모두가 멍한 눈으로 법계를 바라본다. 이제 와 법정이 그들에게 할 말이 뭐가 또 있다는 말인가?

“정말 사천으로 가고자 하신다면.”

“⋯⋯예?”

법계가 심유한 눈으로 일갈하듯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패련의 잔당들은 우리, 구파가 전력으로 막겠습니다. 그대들은 정예들을 추려 강을 넘으십시오.”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 지금 뭐라고⋯⋯.”

“뒤는 확실하게 지켜 드릴 것입니다. 대신.”

벌어진 법계의 입술에서 웅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청성과 아미는 이미 늦었다 한들. 점창만은 확실히 구해 주셔야 합니다.”

“⋯⋯.”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현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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