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6화. 무의미하다 해도. (1)
현종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법정. 자애로움의 상징이어야 할 소림의 방장이건만, 현종이 기억하는 법정은 대체로 노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가 현종에게 보인 모습이 화가 난 모습만은 아닐진대, 그의 기억 속에는 그 모습들이 훨씬 더 선명했다.
그렇기에 때로는 반발했고, 상종하지 못할 이로 여기기도 했다. 지금껏 그가 화산과 천우맹을 상대로 부렸던 억지가 어디 한두 가지던가?
하지만 이번만큼은 현종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법정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고! 그대들의 그 자기만족이 이 강호를 더욱 큰 혼란으로 몰아갈지도 모른다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소이까!”
“⋯⋯.”
“이 일을 대체 어찌할 셈입니까! 그놈들이 무주공산이 된 사천을 치고 있는 이 상황을, 이 일을 대체!”
노기를 이기지 못한 법정이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현종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건 법정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애초에 그가 장일소의 수작에 어린아이처럼 놀아나지만 않았어도 사천을 지킬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천우맹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눈이 멀어 정작 장일소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벌써 기미는 몇 번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가 장일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사천은 사천대로, 천우맹은 천우맹대로 구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천우맹에게로 향하는 분노는 가실 줄을 몰랐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천우맹의 해남행이라는 사실은 달라질 게 없지 않은가?
“방장.”
현종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방장이 노할 만하다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사천을 도울 방법을⋯⋯.”
“돕는다고 하셨습니까?”
법정의 입에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수로?”
“⋯⋯.”
“이곳에서 사천까지는 그 거리가 자그마치 삼천 리가 넘습니다. 대체 무슨 수로 삼천 리 너머에 있는 사천을 돕는단 말입니까! 지금부터 악을 쓰며 달려간다고 해도, 그동안 패군은 놀고 있답니까?”
법정의 목소리가 흡사 폐부를 찌르는 듯한 느낌에 현종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현종도 알고 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장일소가 진짜 노렸던 것은 그들을 몰살시키는 게 아니었다. 교묘하게 청명 일행과 해남을 동쪽으로 몰아, 천우맹과 구파를 동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사천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며칠 동안은 결코 간섭할 수 없는 중원의 동쪽으로 말이다.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정신 차리십시오, 맹주!”
법정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힘을 합치면? 저들과 싸워 사천으로 가겠다는 말입니까? 예! 뚫어 보지요! 그래서 뚫으면? 사천에 있는 이들이 우리가 갈 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 줄 거란 말입니까? 사패련을 상대로?”
“⋯⋯.”
“당장 사천으로 달려가 그들을 구하고 싶은 것이 어디 당신뿐인 줄 아십니까? 사천에는 청성과 아미가 있소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현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청성과 아미는 구파일방의 한 축을 책임지는 문파들이다. 그 전력을 잃게 된다면 구파일방의 힘 역시 예전 같을 수는 없게 된다.
아니, 겨우 그 정도에서 그칠 일이 아니다.
이미 구파일방 중 곤륜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고, 이번 해남의 참변으로 인해 해남 역시 많은 힘을 상실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천의 청성, 아미, 그리고 혹시 점창까지 멸망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번 일을 통해 구파일방은 삼 할이 넘는 전력을 잃어야 할지도 모른다.
일거에 삼 할. 아니, 해남까지 포함한다면 그 이상이다. 불과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말이다.
구파일방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과거 마교대란 때보다 더 큰 손실일 것이다. 감히 수습을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현종도 법정이 반쯤 정신이 나가 화를 낸다 해도 탓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무모한 해남행을 감행하지만 않았어도, 사천이 참화(慘禍)에 뒤덮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소? 이게 그대들이 저지른 일에 따른 대가요. 천하는 그대들을 비난할 것이외다!”
법정의 싸늘한 눈빛이 현종을 넘어 당군악에게로 꽂혔다.
질책이 가득 담긴 시선을 마주한 당군악은 피하지 않고 그 눈을 똑바로 매섭게 마주 보았다.
“그래서 그토록 말했던 것을!”
법정이 이를 갈며 다시 한번 일갈하려 할 때였다.
“⋯⋯지금 무모하다고 하셨습니까?”
법정이 입을 다물었다.
뒤쪽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안색이 형편없는 해남 장문인 금양백이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걸음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노기로 들끓던 법정은 순간 전신이 얼음물에 처박히는 듯한 감각에 일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말은⋯⋯.”
금양백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해남까지 달려온 이들의 행위가 무모하고 쓸데없는 일이었다, 이런 말씀입니까? 날 보면서도 말해 보십시오, 방장.”
죽음을 앞둔 이가 내뿜는 기백이었다.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인 이의 마지막 기세에는 천하의 법정조차도 짓눌렸다.
“장문인, 그건⋯⋯.”
“그게 왜!”
노호성을 터뜨린 금양백이 금방이라도 검을 휘두를 듯 법정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게 왜 이들의 잘못입니까!”
“⋯⋯.”
“원칙을 따지자면 같은 구파일방을 철저히 외면하고, 우리가 수없이 보냈던 구원 요청을 무시했던 방장의 잘못 아닙니까! 사태가 이 지경이 되기 전에 그대가 단 한 번이라도 우리를 도왔다면 오늘날 이 사달이 벌어졌겠습니까!”
법정은 입이 사라진 사람처럼 침묵했다.
논리를 내세울 수가 없다.
버림받은 이들 앞에서 그들이 버림받아야 했던 이유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잔인한 짓인가?
아무리 노기에 눈이 뒤집혔다 해도 그 정도 사리 분별쯤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저지른 일은 안중에도 없고!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준 이들을 어리석다 탓하고 있는 것이외까? 그러고도 당신이 소림의 방장입니까? 그러고도 당신이 불자요! 당신이?”
흥분한 금양백의 입에서 왈칵 피가 터져 나왔다.
“쿨럭!”
“장문인!”
“장문인!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장문인!”
“비켜라!”
금양백이 자신을 만류하는 제자들을 밀어 냈다. 그의 두 눈에 섬뜩한 한기가 어렸다.
“천하가 이들을 비난할 거라고 하셨습니까?”
“장문인⋯⋯.”
“예!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게 온 천하는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이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해남만은 이들의 편에 설 테니까요! 해남이라는 이름이 무너져 잿더미조차 남지 않는다고 해도! 그 가슴에 삼파랑의 문양을 새긴 이들은 날아오는 돌을 대신 맞고, 세인들이 뱉는 침을 대신 맞을 것이외다!”
혼을 쥐어짜는 듯한 외침이 울렸다.
법정은 순간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금양백의 고함도 그러했지만, 금양백의 뒤에 선 해남 제자들이 보내오는 원독 어린 시선이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해남과 구파일방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천에 자리한 구파 소속 문파가 멸문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나마 힘이 될지도 모르는 해남마저 그들과 갈라선 것이다.
“허, 허허⋯⋯.”
법정은 순간 실없이 웃어 버렸다.
“그렇구려. 모든 게 소승의 잘못이구려.”
“⋯⋯.”
“사천이 불타고 아무런 죄도 없는 문파들의 피로 뒤덮이게 생겼거늘, 그 모든 게 나의 잘못이구려! 그 모든 게!”
법정이 다시금 현종과 당군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차마 금양백에게까지는 가 닿지 못했다.
그 순간, 잠자코 침묵하던 맹소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서로 해묵은 감정들이 있음은 알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지 않소이까. 사천을 어찌 도울지 대책부터 논의해야 하외다.”
“마, 맞습니다, 방장. 지금은⋯⋯.”
공동의 장문인 종리형도 맹소를 거들고 나섰다. 그라고 해서 천우맹에 악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한시가 아까운 처지였다.
그러나 법정은 그저 차디찬 눈으로 맹소를 흘끗 노려볼 뿐이었다.
“대책이라 하셨소?”
“⋯⋯.”
“그대들과 내가 대책을 논의하는 데 대체 무슨 의미가 있소이까? 애초에 그대들은 내가 한 말을 들어준 적도 없는 것을! 언제 내가 제안한 것을 단 한 번이라도 받아들여 준 적 있소이까?”
“방장. 어찌 말을 그리⋯⋯.”
“내 말이 틀렸소이까?”
이리되자 할 말이 곤궁해진 것은 되레 현종이었다.
물론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 사정이 복잡하지만, 깔끔하게 결과만 놓고 본다면 천우맹은 법정의 제안을 언제고 한결같이 거절해 왔다. 그리고 항상 자신들의 뜻을 우선시해 왔다.
그러니 법정이 저리 말한다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제 와 우리더러 그대들을 거들라 하는 것이오?”
“위험에 처한 것은 청성과 아미, 그리고 점창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보호하는 건 응당 방장께서 해야 할 역할이 아닙니까!”
“예, 그렇지요!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고자 지금껏 애썼소이다! 심지어 나는 그대들마저 살려 보겠다고, 이곳까지 달려와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넜소!”
“⋯⋯.”
“그런데 고작 한다는 말이, 모든 게 소림의 방장인 내 잘못이란 것뿐이구려.”
법정은 조소하더니 멀찍이 거리를 유지한 채 멈춰 선 사패련의 군세를 보았다.
“저들을 뚫는 건 불가능하오. 아니,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그건 패군이 노리는 바일 터. 이미 크나큰 피해를 피할 수 없는 마당에 더 큰 피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소. 나는 강북으로 돌아갈 것이오.”
“방장! 하지만 사천은 지금 한시가⋯⋯.”
“그러다 우리가 더 큰 피해를 입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진다는 것을 아직도 모른단 말이오!”
쿠웅!
법정이 발을 구르자 진각이 땅을 울렸다.
불자답지 않은 표독한 표정으로, 법정은 천우맹을 노려보았다.
“이곳에서 우리마저 스러진다면 천하에 사도 천하가 도래하게 될 것이오! 그 장일소가 천하를 손에 넣고 주무르게 된다 이 말이외다!”
모두의 얼굴이 일순 암담해졌다.
“천우맹이 대의니, 협의니 논해 가며 하는 짓이라고 해 봐야, 결국에는 사건이 벌어진 곳에 어떻게든 달려가 칼부림이나 하는 게 아니오! 저 장일소가 그대들이 그리 움직일 걸 정녕 모르겠소이까?”
“⋯⋯.”
“이리된 마당에 아무런 의미 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새겨들으시오. 내 마지막 조언이외다. 사천으로는 가지 마시오. 그곳에서 모두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법정이 쌩하니 돌아섰다.
그 뒤에서 천우맹을 바라보던 구파일방의 제자들 역시 천우맹을 잠시 응시하다 따라 몸을 돌렸다.
순간, 현종은 알 수 있었다.
‘제자들이⋯⋯.’
지금껏 구파의 수뇌부는 천우맹을 좋지 않은 눈으로 봐 왔을지 모르나, 그 제자들만큼은 천우맹에 꽤 호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돌아서며 보인 눈빛들이 더 이상 아군을 바라보는 눈과는 거리가 멀었다.
구파와 천우맹의 사이에 세워진 벽이 이젠 더 이상 무너뜨릴 수 없을 만큼 강건해진 것이다.
그때 돌아섰던 법정이 나직이 조소하며 말했다.
“그럼에도⋯⋯ 당연히 사천으로 가시겠지. 그렇지 않소?”
이 말에 대답한 사람은 현종이 아니었다.
“그럴 것입니다.”
백천이 단 한 점 흔들림도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법정은 그를 서늘한 얼굴로 노려보더니 찬바람이 돌도록 고개를 획 돌렸다.
“그래. 그러실 테지.”
멀어지는 법정의 모습을 바라보던 현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장일소⋯⋯.’
귓가에 장일소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룬 그 간웅의 광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