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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15화 (1,416/1,567)

1415화. 정말 원했다면 쟁취했어야지. (4)

“⋯⋯안 돼.”

순간 앓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두의 안색은 창백했고, 당군악은 그저 철갑처럼 굳어 있었다.

장일소가 사천당가로 향하고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이들이 여기에 있겠는가?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무, 무슨 수를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걸의 입에서 당혹에 물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물음에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걸아, 일단 진정해라.”

“진정이요? 지금 진정할 상황입니까? 장일소 놈이 당가로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그러십니까?”

조걸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설사 장일소가 지금 화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조걸이 이만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내장을 끊어 내는 듯 고통스럽겠지만, 그건 참고 버틸 수 있다.

지금 화산에 남은 전각에 선조의 역사가 남아 있고, 그 전각들이 불타는 것이야 더없이 끔찍한 일이나⋯⋯ 그래 봐야 전각은 전각일 뿐이다.

하지만 당가는 다르다.

당가는 한 핏줄로 이어진 이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가는 터전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 말고도 수백에 이르는 식솔이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들이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도 이미 보지 않았던가?

독을 만드는 이들, 암기를 만드는 이들, 그리고 언젠가는 당가의 당당한 무인이 되어 함께 발맞추고 싸울 이들. 그 모든 이들이 이 순간 장일소가 향하는 사천당가의 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모두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갑시다!”

조걸이 악을 쓰듯 고함쳤다.

“다들 뭐 하십니까? 당장 가야 할 것 아닙니까! 사천으로 갑시다. 서두르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걸아, 일단 진정하라니까!”

“이런, 빌어먹을! 지금 진정 운운할 때가 아니라니까요, 사형!”

조걸은 그답지 않게 윤종에게 눈을 부라렸다. 심지어는 제 어깨에 얹힌 윤종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기까지 했다.

윤종은 화를 내는 대신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이미 늦었다. 우리는⋯⋯.”

“그게 무슨 나약한 소리십니까! 그럼, 늦었으니 구경이나 하잔 소립니까?”

조걸이 매섭게 노려보자 윤종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조걸이 지금 주장하는 건 그저 악에 받친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윤종은 그런 그를 탓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을 윤종이 어찌 모르겠는가?

“거긴 소소네 집이기도 하단 말입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당소소에게로 향했다.

입술을 깨물고 침묵하는 당소소의 낯빛은 창백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밝던 얼굴이 지금은 차마 바라보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애처로웠다.

조걸이 주먹을 콱 움켜쥐며 외쳤다.

“아무도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갑니다!”

“야, 이 새끼야! 지금⋯⋯!”

“나도 간다.”

그 순간 누군가가 조걸의 말에 힘을 보탰다.

“갈 수 있을 겁니다.”

“백천 도장.”

남궁도위가 침음성을 흘리며 말을 꺼낸 백천을 돌아보았다. 백천은 거의 반쯤 죽어 가는 몰골로도 단호히 말했다.

“늦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가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여기서 사천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 줄은 아십니까? 그리고 지금 급하게 강을 넘다가는 전멸하게 됩니다. 수로채의 선단이 아직 다 물러난 게 아닙니다.”

임소병이 힘없이 뇌까리며 반대했다. 그러나 백천의 눈빛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강을 넘을 수 없다면 안 넘으면 그만이지요.”

“⋯⋯예?”

백천의 시선이 물러나고 있는 사패련의 군세 쪽으로 향했다.

“뚫으면 될 것 아닙니까?”

“⋯⋯.”

“어차피 사천까지 가는 게 목적이면 강을 넘을 필요도 없습니다. 강변을 타고 거슬러 오르면 사천까지 갈 수 있으니까요.”

“배, 백천아.”

결국 현종의 입에서도 만류하는 듯 질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런 와중에서도 싸우려 한단 말인가? 저 어마어마한 군세를 눈으로 보고도?

“가야 합니다.”

“일단은 진정하고⋯⋯.”

“제가 지금 흥분한 걸로 보이십니까?”

그 말에 현종이 입을 닫았다.

백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에게서 흥분한 기색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천에 있는 이들 역시 우리의 친우입니다. 저는 상황이 어렵다 해서 친우를 놓는 법 따위는 모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침묵하며 백천을 응시했다.

백 번을 다시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당장 출발하여 전력을 다해 간다 해도, 사천에 도달할 무렵이면 당가는 주춧돌 하나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해도, 저 사패련 군세를 뚫고 사천으로 가려 든다면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백천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리하겠다고 외치고 있다.

그 앞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저리 만신창이가 된 이도 아직 싸우려 드는데.

“⋯⋯의견을 나눌 시간이 없습니다. 길은 일단 제가 뚫을 테니, 맹주님께서는 중지(衆志)를 모아 뒤를 받쳐 주십시오.”

“배, 백천아, 이놈아!”

백천이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검을 움켜쥘 때였다.

“진정하게, 장문대리.”

어떤 목소리가 백천의 뒷덜미를 잡아채었다. 이 말만큼은 아무리 백천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당군악이기 때문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네.”

실로 냉정한 말이나,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두고 저리 논하는 이를 두고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상대가 패군이라면 지금부터 달려가 봐야 이미 늦었네.”

당군악의 얼굴은 너무도 냉정했다. 백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하지만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패군이 원하는 것이라면?”

순간 백천의 손이 살짝 떨렸다. 당군악이 그런 그를 침착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자네의 그 노기까지 패군의 의도대로라 해도, 지금처럼 말할 수 있는가?”

“그건⋯⋯.”

백천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사람의 감정 하나까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가 장일소인 게 문제였다. 말도 안 되지만, 그라면 사람의 감정까지 손아귀에 쥐고 있을 듯해서.

당군악이 차분한 낯으로 후방을 살피더니 말했다.

“호가명이 오지 않는군.”

“⋯⋯.”

“맹주님. 우선은 소림과 합류한 뒤, 강을 넘어야겠습니다.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가주님⋯⋯.”

현종의 얼굴에 순간 안쓰러운 빛이 스쳤다.

“맹주님.”

그러나 정작 당군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현종이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짐작한다는 듯 말했다.

“당가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

“무학에 전념하는 문파가 아니라 해도, 당가는 당가입니다. 당가는 강하기에 두려운 곳이 아니라, 두려운 이들이 모여 있기에 강한 곳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몸을 살짝 떨었다.

“무인이 아니라 해도, 당씨 성을 가진 이들입니다. 우리가 가지 않아도 알아서 몸을 빼낼 것이니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현종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쳤다.

당군악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안다. 그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차마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저 말이 온전한 진심이 아님을 모르지 않는데.

현종이 여전히 입술만 달싹이자 당군악이 맹소를 보며 말했다.

“궁주님.”

“으, 으음. 말씀하시오.”

“맹을 이끌어 주십시오. 지금 이곳에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궁주님뿐입니다.”

그 말에 야수궁주가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내었다.

“정말 괜찮겠소?”

당군악은 대답하지 않고 맹소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이해한 맹소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각오를 다진 무사에게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붙이는 건 모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요.”

그리고 맹소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군악이 아닌 당소소에게서 나왔다.

“⋯⋯다들 뛰어난 분들이니까, 어떻게든 탈출하실 거예요. 반드시.”

당패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의 기관진식과 함정은 그리 쉽게 뚫을 수 없습니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 저들조차도 그리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천당가가 아무리 독과 암기의 조종이라 해도, 이곳에 와 있는 정예가 없이는 사패련과 맞서기 힘들다는 사실을.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진 끝에 맹소가 입을 뗐다.

“우선은⋯⋯.”

그는 잠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사패련이 멀찍이 물러나며 드러난 황량한 대지를 장강을 넘어온 구파가 밟고 있었다.

“우선은⋯⋯ 저들과 합류합시다. 함께 논의해 보는 게 맞겠습니다. 지금 위기에 처한 게 당가뿐만이 아니니 저들 역시 마음이 급할 것입니다.”

몇몇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천우맹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급하기로 따지면 가장 먼저 침략의 대상이 되었을 청성과 아미, 그러니까 구파 쪽이 더할 것이다.

“맹주님!”

“⋯⋯알겠소이다.”

현종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그도 알기 때문이다.

“갑시다.”

현종이 앞장서서 남경의 대지를 박찼다. 조금 전까지 사패련이 밟고 있던 그 을씨년스러운 곳으로.

천우맹의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그 뒤를 따랐다.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차는 조걸의 귓가에 윤종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아, 넌 괜찮으냐?”

“⋯⋯뭐가 말입니까?”

“⋯⋯당가 인근에 있지 않느냐?”

조걸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당가타의 바로 앞에 있다. 그의 가족들이 있는 사해상단이.

“너⋯⋯.”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조걸은 딱 자르더니 좀 더 속도를 올리며 먼저 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던 윤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장일소!’

윤종은 자신이 살면서 이토록 누군가를 증오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체 어디까지 할 셈이냐?’

시선을 돌리자 다시 의식을 잃은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제발⋯⋯.’

알고 있다.

지금 청명이 놈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는 건 잔인하다 못해 잔혹한 짓이라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윤종은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청명이 놈 하나뿐일 테니까.

설령 검 한 번을 휘두를 수 없는 몸이라 해도, 그가 의식을 차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수많은 이들이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윤종이 그 아쉬운 생각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현종이 강을 넘어온 법정과 마주 섰다.

“⋯⋯방장.”

장강에서 막 빠져나와 흠뻑 젖은 법정은 사패련의 군세가 멀어질 대로 멀어졌음을 확인하고야 현종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어찌 생각하시오?”

현종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패군이⋯⋯ 사천을⋯⋯.”

“어찌 생각하시냔 말이외다.”

법정의 눈빛은 오싹하도록 차가웠다.

“그 만용의 대가로 다른 이들을 사패련의 제물로 바친 기분이 어떠냐고 묻지 않소이까!”

노기 등등한 법정의 고함이 쩌렁쩌렁 현종의 귓전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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