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4화. 정말 원했다면 쟁취했어야지. (3)
문득 들려오는 인기척에, 장일소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물론 사패련의 그 모래알 같은 이들을 장일소가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이들 중 저런 얼굴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자의 정체는 너무도 뻔하다.
“상황은?”
“대충은 정리가 끝났소, 련주.”
천면수사.
감히 장일소가 모르는 얼굴로 그의 지척을 범할 수 있는 이는 천하에 단 하나, 하오문의 문주 천면수사밖에 없다.
얼굴을 보고 뒤돌아서면 가물가물할 만큼 평범한 생김새의 천면수사가 말없이 장일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참하게 불타고 있는 청성을 배경으로 선, 사패련주를 말이다.
‘패군⋯⋯.’
처음에는 대단하다 여겼다.
길고 긴 강호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토록 손쉽게 정파를 농락한 사파인은 단 한 사람도 없을 테니까.
이건 그저 뛰어나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장일소는 무언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경탄했고, 그렇기에 인정했다.
하지만 구파 중 하나인 청성을 무참할 정도로 짓밟아 버린 지금은 그 느낌이 완전히 바뀌었다.
“모두 처리했나?”
“⋯⋯쥐새끼 몇 마리가 더 탈출하긴 했지만, 지금 추격대를 보낼 테니 정리할 수 있을 게요.”
“추격대?”
“그렇소. 하오문에서⋯⋯.”
“쓸데없는 짓거리는 그만두지.”
장일소가 무심하게 말허리를 끊자 천면수사가 입을 꾹 닫았다.
“그래 봐야 고작 쥐새끼들. 그런 놈들에게 여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내버려 둬. 그놈들이 전할 테니까. 청성이 얼마나 처참하게 당했는지 말이야.”
천면수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극적으로 그 뜻에 동의해서는 아니다. 그저 장일소가 자신보다 더 옳으리라 믿는 것이었다.
천면수사도 이젠 알 것 같았다. 저자가 보는 광경을 그는 결코 볼 수 없다.
“혈궁주는 그대로 둘 셈이오?”
천면수사가 묻자 장일소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혈궁의 정예는 이곳에서 청성의 제자들을 참살하고 있지만, 혈궁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궁도들이야 늦지 않게 보냈으니 장일소의 명을 듣지 않았다고 평하기는 어렵겠지만, 끝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다소 묘한 느낌을 주었다.
장일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최소한은 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는 뜻?”
천면수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충성 같은 건 바라지 않지. 그저 자신이 한 일의 대가를 가져갈 뿐이야. 그게⋯⋯ 좋은 대가든 나쁜 대가든 말이야.”
장일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핏 자애로운 미소처럼 보이지만, 천면수사는 그 뒤에 어린 섬뜩한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장일소는 본디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같은 상황에 굳이 혈궁주와 반목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 지금까지의 장일소라면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천면수사는 안다.
지금 장일소는 상황에 조금 더 신경을 쓸 뿐이다.
장일소는 결코 잊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벽에 잠깐 굴복한다고 해도, 자신이 굴복했다는 그 사실은 결코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만금대부는 처참한 죽음을 맞았고, 흑룡왕은 한쪽 팔이 잘린 채 장일소의 개가 되었다.
아마 혈궁주의 운명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지금처럼 어정쩡한 거리에서 장일소를 평가하려 든다면, 언젠가는 그의 목에도 장일소의 손톱이 틀어박힐 것이다.
하면, 천면수사는 어떠한가?
그는 지금 정말 안전한 곳에 서 있는가?
이제 청성에선 어딜 보아도 불바다뿐이다. 해가 뜨기도 전에 청성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고 말 것이다.
청성의 힘은 강했고, 천면수사는 산을 오르면서도 막대한 피해를 각오했었다. 구파일방을 공격하는 것이니 당연했다. 그만큼의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청성은 장일소의 발아래에 너무도 쉽게 짓밟혔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절대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시기에, 전혀 예측 못 한 적의 습격을 받았으니 항전할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필사의 각오를 다지지 못한 이들을 더 강한 전력으로 짓밟는 건 비쩍 마른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일보다 손쉬웠다.
하지만 원래 지나고 나서 평하는 건 쉽다. 정말로 어려운 건, 그 평하기 쉬운 일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태연히 이뤄 버리는 존재가 눈앞에 있다. 천면수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일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왜 그러지?”
천면수사가 움찔했다.
장일소의 눈빛이 묘해 보였다. 사방에서 피어오른 불꽃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안에 가득 차 들끓는 욕망 때문인지, 옅은 색상의 눈이 일렁이며 형용하기 어려운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것은 간웅의 눈이다. 그 눈빛이 천면수사를 내리눌렀다.
사패련을 조직하기 위해 처음 모였던 그때부터, 청성을 불사르고 있는 지금까지 장일소는 줄곧 저런 눈빛으로 세상을 봐 왔다.
바뀐 건 장일소가 아니다. 장일소를 바라보는 천면수사 그 자신이었다.
“새삼 겁이라도 먹었나?”
장일소가 조소하며 물었다.
“겁먹어도 이제는 돌아갈 방법이 없단다. 청성을 불태운 이상, 남은 길은 저들과 우리 중 한쪽이 전멸하는 것뿐이지.”
천면수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본모습을 감추고, 표정과 감정을 감추는 데에 너무도 익숙한 그이지만, 드물게도 이 웃음만큼은 명백한 진심에서 우러났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구파는 물론 두렵소.”
“솔직하군.”
“파멸도 두렵지. 강남에서 적당히 왕처럼 살 수 있는 길이 무너졌다는 것도 사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소.”
장일소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야망이 없는 자를 경멸하지만, 자신에게 솔직한 이는 딱히 싫어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니까.
“하지만 내가 두려운 건 저들이나 내 파멸이 아니라, 련주 당신이오.”
“⋯⋯내가?”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천면수사를 바라보았다. 장일소의 눈빛은 불빛에 일렁이면서도 담담했지만, 천면수사의 눈빛은 명백히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이 누군가를 두렵게 느낀다면, 방법은 뻔하다고 하더군.”
“그래.”
대답하는 장일소의 얼굴에 기괴한 미소가 어렸다.
“죽여 없애는 거지. 더 이상 날 두렵게 하지 못하게 말이야.”
장일소는 슬쩍 주변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어때? 마침 둘이군. 네게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보이는데?”
천면수사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역시 하오문의 문주다. 반드시 장일소에게 패한다고 할 수는 없다. 장일소의 무위는 미지수라고는 하나, 미지수라는 게 반드시 대단하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나쁘지 않은 방법이로군.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지.”
천면수사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아래로 내렸다. 결코 꺾일 리 없었던 그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대단히 상징적인 그 광경을 장일소는 그저 무심한 눈길로 응시했다.
“하오문의 문주, 천면수사 담여해(譚與海).”
천면수사가 고개를 깊이, 아주 깊이 숙였다.
“련주님께 충성을 바칩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무릎을 꿇은 한 남자. 그건 어쩌면 불타는 청성보다 대단한 광경일지도 모른다.
장일소가 입꼬리를 비틀 듯이 웃으며 나직한 비음을 흘렸다.
“흐음. 새삼스럽군.”
“⋯⋯.”
“원래 그런 것 아니었니?”
천면수사가 고개를 들었다. 장일소와 두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직감했다.
조금도 변치 않은 눈.
그 천면수사의 충성을 얻어 내고도 한 점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는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천면수사는 자연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했다.
천면수사의 손이 제 얼굴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희미한 떨림을 실은 손이 얼굴을 덮었다가 내려온 순간⋯⋯.
드디어 장일소의 입가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소가 피어났다.
“천면수사의 본모습이라.”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난처럼 덧붙였다.
“굳이 그런 것까지 보일 필요는 없었단다.”
“련주께 충성을 맹세함에 있어 당연한 일입니다.”
장일소는 부복한 천면수사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붉은 장포가 휘날리듯 펄럭이고는 내려앉았다.
턱.
장일소는 천면수사의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짚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말이다.”
천면수사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이란다.”
“⋯⋯.”
“진심 따위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그러니 그저 무엇을 원하는지만 알면 그만이지. 네가 원하는 건 뭐지?”
천면수사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삶입니다.”
“구차하기는.”
장일소가 천면수사의 어깨를 가볍게 툭 두드렸다.
다른 말은 없었다.
원하는 그 삶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조도 없었고, 무릎을 꿇고 그의 휘하에 들어온 것을 치하해 주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어깨를 한차례 짚었을 뿐이다.
하지만 천면수사 역시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사내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니까. 약조도, 감정도, 내보이는 진심마저도, 그 모든 것이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패에 불과하다.
천면수사가 바라는 것은 그저 자비와 가치다.
저 차가운 금속을 빚어 만든 듯한 불꽃이 그 자신과 하오문을 되도록 뒤늦게 태우는 것.
“정리하렴.”
“예, 련주님.”
태도도 어투도 사뭇 달라졌다.
이는 천면수사와 장일소의 관계가 바뀌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섯 문파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사패련. 그 사패련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화함을 의미했다. 청성을 제물 삼아 피워 낸 불꽃 속에서 말이다.
“아미로 가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장일소의 시선이 흘끗 벽현자의 시신에 가 닿았다.
가치 없는 죽음이다. 저 죽음이 지닌 가치는 고작해야 몇 각의 시간을 벌었다는 것뿐이다.
“아직 아미에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미까지는 손쉽겠지요.”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서둘러야 한단다.”
장일소의 흰 얼굴에 붉은 선이 그어지듯 웃음이 어렸다.
“구파만 당하면 너무 불공평하잖니. 천우맹도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줘야지. 아미를 불태우고 당가까지 짓밟으려면 서둘러야겠다.”
“예!”
천면수사가 깊이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빤히 바라보며, 장일소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렸다.
‘쥐새끼가⋯⋯.’
눈치가 빠른 건 좋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아서 지레 몸을 낮추는 이는 결국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여길 때 본색을 드러내는 법이다.
천면수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장일소가 아니라 그 자신이 될 것이다. 어쨌건 그는 쓸만한 전력이니까.
“쯧.”
짧게 혀를 찬 장일소는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미가 있는 북쪽이 아니라 장강이 있는 동쪽을 향해.
“가명이한테 또 혼이 나겠구나.”
쿡쿡 웃어 댄 그는 이내 몸을 돌렸다.
청성을 사른 불길이 북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 기세가 심히 거칠어 그 누구도 막아 낼 수 없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