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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11화 (1,412/1,567)

1411화. 꿈에서 깰 시간이란다. (6)

강변을 가득 채운 사패련의 군세. 드넓은 장강을 점거한 선단들. 그 위압적인 곳을 향해 황금빛 물결이 쏟아지듯 밀려들고 있다.

압도적이다. 살아생전 이런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광경에 압도될 상황이 아니었다.

“매, 맹주님!”

“그, 그렇지!”

넋을 놓고 있던 현종이 화들짝 놀라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저, 전 맹도는!”

“잠시만! 아악! 잠시만!”

그 순간 임소병의 거의 몸을 날려 현종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노, 녹림왕?”

“아직 아닙니다, 아직!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저 땡중 놈들이 강변에 도달할 때 한 번에 몰아쳐야 합니다!”

“아, 그렇지! 알겠소이다.”

현종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구파와 힘을 합쳐 싸우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너무도 당연한 그 일이 설마 실제로 벌어지는 순간이 올 줄이야.

‘할 수 있다!’

오로지 결의로만 가득했던 현종의 두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물론 상황은 여전히 녹록하지 않다. 소림과 힘을 합친다고 해도, 저 사패련을 상대하기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천우맹만 이끌고 싸우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터. 더구나⋯⋯.

“하늘이 돕기라도 했나, 시기적절하게 양동이 되어 버렸네!”

녹림왕의 말이 정확하다.

밀집해 있는 적을 깨부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지금 그들은 의도치 않게 완벽한 양동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 기회를 잘 살린다면 저 두터운 중앙부를 꿰뚫고 장강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을지 모른다!

굳이 서로가 전멸을 각오하고 싸우지 않더라도 생로를 확보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맹주님! 놈들이 동요합니다!”

당군악이 그답지 않게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철통같이 강변을 지키고 있던 사패련이 강을 넘어오는 구파의 존재를 발견했는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위용을 뽐내던 깃발들이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어지러이 뒤흔들렸다.

‘된다!’

단단한 철벽을 가르며 생긴 명확한 길이 보였다. 이는 그들과 강북을 잇는 길인 동시에, 그들과 구파를 잇는 길이었다.

“모두 준비해라! 이제 곧이다!”

황금빛 물결이 이제 강 중앙에 이르렀다. 저들의 속도를 고려했을 때 금세 강변에 도착할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쇄도해야 한다.

모두의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패군!’

현종의 시선이 사패련의 군세 중앙에 있는 장일소의 마차로 향했다.

확신이 섰다. 장일소가 아무리 천하를 뒤흔들 만한 계략을 부리고, 천지를 뒤집는 조화를 부린다고 해도 정(正)의 이름을 가진 이들이 진심으로 이룬 화합을 상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장일소는 몰랐으리라. 뜻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가고자 하는 길이 같다면 얼마든지 힘을 합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였다.

“놈들이 움직입니다!”

사패련의 군세가 물결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화려한 마차를 중심으로 번져 나간 파동이 이내 사패련 전체를 휩쓸었다.

언덕 위에 올라선 현종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강변에 늘어선 사패련의 군세가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는 것을.

“⋯⋯자, 잠깐?”

중앙에 생겨난 하나의 선을 중심으로, 군이 반으로 나뉘고 있었다. 마치⋯⋯ 길을 열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수로채의 배들도 움직입니다! 좌, 좌우! 좌우로 갈라져 이동합니다!”

길이 열린다. 구파와 천우맹 사이로 이어지는 길이.

반드시 열어 내야 할 길이 지금 저절로 열리고 있다. 사패련의 입장에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철통처럼 막아 내야 했을 그 길이 말이다.

하지만 현종은 그 사실에 환호하지 못했다.

“왜⋯⋯?”

왜 저들이 왜 길을 열어 준단 말인가? 대체 왜?

“뭐⋯⋯?”

법정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허공으로 몸을 띄웠던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 광경을 망연히 보았다.

강변에 거의 정박했던 수로채의 검은 배들이 돌연 뱃머리를 좌우로 돌려 소림이 갈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마치 강남 땅에 온 걸 환영한다는 듯이.

“모, 모두 멈춰라! 속도를 줄여라, 당장!”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법정이 다급히 외쳤다.

“방장! 물에 머무는 건 위험합니다!”

“나도 알고 있다!”

수로채의 수적들이 물속에서 공격해 오면 최악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물론 법정 역시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이상,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법정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대체⋯⋯ 무슨 짓거리냐, 장일소!”

“노, 녹림왕!”

현종이 임소병을 획 돌아보았다. 녹림왕이라면 이 상황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얼이 빠진 건 임소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소병은 당황한 얼굴로 사패련의 움직임을 연신 다시 살폈다.

길을 열어 주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아는 장일소라면 일부러 길을 터 주고, 뒤를 노리는 일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임소병이 당황한 까닭은, 저들의 움직임에서 그런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런 의도였다면 저렇게 빠르게 길을 넓혀선 안 된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장일소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전술을 쓰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정말 다른 의도 없이 길을 열어 주는 것이거나.

하지만 아무리 장일소라고 해도 임소병이 조금의 낌새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게 가능할까? 장일소가 아니라 제갈량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어째서?”

임소병의 얼굴은 점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희게 질려 갔다.

아니, 차라리 귀신을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니 더 큰 공포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상황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맹주님! 노, 놈들이 거리를 더 벌립니다!”

현종이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덜덜 떨었다.

길을 터 준 사패련의 군세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그 틈을 벌려 간다.

상황에 집착하지 않고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본다면, 사패련은 지금 군을 둘로 나누어 양쪽으로 전진하고 있다.

마치⋯⋯. 그래, 마치⋯⋯.

“후⋯⋯퇴한다고?”

이곳에서?

언덕 위의 천우맹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구, 구파 때문에?”

“그럴 리가 있느냐!”

“아니, 그런데 그게 아니면 이게 말이⋯⋯.”

구파가 합류한다고 해도 사패련이 물러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여전히 유리한 입장에 서 있으니까. 어느 쪽도 해볼 만한 여지가 있는 싸움이다.

아니, 아니다.

오히려 사패련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싸워야 한다. 이대로 천우맹을 강북으로 보내 준다면 그들이 잃은 것에 비해 이득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대뜸 길을 여는가? 왜 오히려 물러서는가?

“⋯⋯이게 무슨⋯⋯.”

현종은 저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청명을 돌아보았다.

만인방은 청명과 천우맹의 젊은 무인들을 죽이기 위해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다.

그런데도 물러난다고? 저 장일소가 천하의 멍청이도 아닐진대.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등을 보이는 건 분명히 저들인데 불안에 떠는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우,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천우맹, 그리고 구파의 수장들까지, 천하를 이끄는 거인들이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을 못 잡고 허둥거린다.

그때 누군가의 신음에 당혹감과 긴장이 깨어졌다.

“으⋯⋯.”

“처, 청명아!”

“청명아! 정신이 드느냐?”

당군악에게 안겨 있던 청명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눈을 뜬 청명은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선으로 주변을 힘겹게 돌아보았다.

“여긴⋯⋯?”

청명이 물었지만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말해야 지금의 상황을 알리는 게 가능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뻔히 눈을 뜨고 지켜본 그들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흐릿한 눈을 돌린 청명이 전장의 상황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의 몸이 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지, 지금 저놈들이⋯⋯.”

그는 황급히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당군악을 밀어 냈다. 만류하려 했지만, 청명의 힘없는 손길에 대단한 고집과 의지가 실려 있어 차마 말릴 수 없었다.

휘청이며 내려선 청명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장일소⋯⋯.”

“으, 으응?”

“장일소는!”

갈라진 목소리가 절규처럼 뿜어졌다. 당황한 조걸이 사패련 군세의 한가운데에 있는 마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저기! 저기 같다.”

여덟 마리 백마가 끄는, 장일소가 아니고서는 감히 탈 엄두도 내지 못할 거대한 마차를 본 순간 청명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기? 저기라고?”

“응? 청⋯⋯명아?”

조걸은 흠칫하고 말았다. 돌아봐 오는 청명의 두 눈에 이제껏 본 적 없는 지독한 감정이 담겨 있어서였다.

“이⋯⋯. 이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쏟아낸 청명이 대뜸 손을 뻗어 조걸의 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그러더니 대번에 땅을 박차고 솟아올라 무시무시한 검기를 뿜었다.

“처, 청명아! 뭐 하는 거냐!”

“으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청명의 검 끝에서 쏟아진 붉은 검기가 급류처럼 강변을 단번에 가로질렀다. 그리고 장일소가 타고 있는 마차에 순식간에 틀어박혔다.

“히익!”

“뭐, 뭐 하는 거야, 인마!”

콰아아아앙!

흙먼지가 비산했다. 땅에 다시 내려선 청명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검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울컥 쏟아졌다.

“너 대체 뭘⋯⋯.”

“저기! 저기 보십시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자 청명에게로 집중되었던 시선이 일제히 전방으로 향했다.

자욱하던 흙먼지가 점차 가라앉으며 산산조각 난 마차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선 한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그 형체를 갖춰 갔다.

붉디붉은 장포, 그 손가락과 손목마다 번쩍이는 장신구, 그 머리에 쓴 특유의 면류관까지.

“자, 장일소⋯⋯.”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창백하게 보일 만큼 흰 얼굴과 피처럼 붉은 입술이 드러난 순간, 모두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하지만 청명이 으르렁대듯 물었다.

“누가?”

“응?”

그의 얼굴은 분노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누가? 누가 장일소냐고, 누가! 저 새끼가?”

“청명아?”

대부분은 청명의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그럴 만했으니까. 그만한 부상을 당했고 막 깨어났는데 온전하긴 힘들 테니까.

하지만 그중 몇은 청명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황급히 다시 장일소를 돌아보았다.

“어⋯⋯.”

“아⋯⋯. 아아!”

임소병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녹림왕! 왜 그러십니까?”

녹림왕은 귀신에 홀린 얼굴로 뇌까렸다.

“아니야⋯⋯.”

“그게 무슨⋯⋯.”

“아니야. 아니라고! 저놈은 장일소가 아닙니다! 가짜라고요!”

“⋯⋯예?”

“모두⋯⋯ 모두 당한 겁니다. 그놈은 애초부터 여기에 없었어요. 싸울 생각도 없었던 겁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백천이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장일소를 다시 살폈다. 이내 그의 눈동자가 우뚝 멎었고, 잠시 후엔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저 장일소를 몇 번이고 지척에서 봤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저자는 장일소가 아니다.

똑같은 모습이지만, 분명히 뭔가 다르다. 비슷한 외형을 가졌고, 비슷하게 꾸미고 있지만 장일소 특유의 위압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 그럼 장일소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여기에 없다면 대체 어디에 있냐고!”

“흐⋯⋯.”

그 순간 청명의 입에서 탈진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개 같은⋯⋯ 놈이⋯⋯.”

털썩.

“청명아!”

“빌어먹을! 당가주님!”

의식이 꺼져 가는 가운데, 청명의 귓가로는 연신 다급한 고함이 메아리쳤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듯 먹먹했다.

‘안 돼⋯⋯.’

여기서 혼절해서는⋯⋯.

‘장일⋯⋯소⋯⋯.’

누군가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저 멀리서 환청처럼 들려왔다.

❀ ❀ ❀

“흐음.”

장일소가 콧소리를 흘리며 느긋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 내부야 화려했지만, 나와서 보니 마차의 겉은 허름하기 짝이 없어 영락없이 거대한 짐수레로나 보였다.

겉에서 보아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값싼 짐을 잔뜩 쌓아 올린 듯 보이는 낡은 마차의 내부에 저토록 화려한 실내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철저히 위장된 문을 제외한다면, 마차의 안과 밖을 잇는 것은 고작해야 손 반 뼘 크기에 지나지 않는 작은 창뿐이니까.

후줄근한 마차와 추레한 말을 잠시 물끄러미 보던 장일소가 이내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앞에 부복해 있다. 천하의 어디에 가도 볼 수 있을 만큼 평범한 차림새지만, 눈빛과 등에 찬 병기는 결코 평범한 이들이 아님을 명백히 알려 주고 있었다.

낡은 수레에 곡식을 싣고 개방의 눈이 닿지 않는 강남 곳곳으로 퍼져 나갔던, 수준 낮은 사파의 잡부로 위장한 만인방의 정예들이 바로 지금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마치 왕을 알현하는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모두를 장일소가 조용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말했잖니.”

조롱하는 듯 웃는 입술이 피처럼 붉었다.

“⋯⋯그럴 가치가 없다니까."

어차피 모두 장기짝에 불과한 것.

“너희도, 그리고⋯⋯ 나도 말이야.”

그도, 그가 쌓은 명성도, 다른 이들이 그에게 느끼는 공포와 그에 대한 인식마저도 장일소에게는 모두 그저 이용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든 비틀고 짓밟을 수 있다.

지켜야 할 가치 따위는 없다.

목을 매야 할 상대 따위도 없다.

세상을 메운 모든 것은 그저 값싼 싸구려다.

제 앞에 부복한 이들을 잠시 바라본 장일소가 천천히 위로 시선을 옮겼다. 드높은 산이 앞에 놓여 있었다.

하늘까지 닿을 듯 솟은 푸른 산. 그 푸르름에 감탄한 나머지, 세상이 청성(靑城)이라 부르는 산이었다.

저벅.

장일소가 부복한 이들 사이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저 푸르른 산 위까지 이어진 길이었다.

“시작은 화려할수록 좋지. 모조리 불태워 버리자꾸나.”

태연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울렸다. 장일소의 걸음을 따라 부복해 있던 만인방도들이 차례차례 몸을 일으켰다.

먼저 그를 뒤따르는 만인방도들의 뒤로, 각양각색의 복장으로 위장했던 이들과 피처럼 붉은 무복 차림의 무인들이 행렬을 이었다.

하오문, 그리고 혈교.

흑귀보, 수로채와 함께 사패련을 이루었던 전력이 이곳 사천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두가 장일소라는 광인을 따라 청성의 산을 짓밟듯 오른다.

“하하하핫.”

장일소의 입에서 억누른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작은 웃음은 이내 참을 수 없는 즐거움과 감당할 수 없는 광기에 물들어 온 산에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핫!”

청성을 사르고, 아미를 넘어, 당가와 점창마저 휩쓸고 이내 세상을 뒤덮을 거대한 핏빛 겁화가 마침내 피어났다.

바로 여기, 사천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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