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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10화 (1,411/1,567)

1410화. 꿈에서 깰 시간이란다. (5)

무모하다 해야 할까? 아니면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지금 백천의 행동은 어떻게 봐도 그 두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등을 지켜보는 누구도 차마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검을 든 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야 한다.

청명이 입버릇처럼 말해 왔듯이, 검을 든 이는 언제고 자신 역시 그 검에 베여 죽을 날이 올 것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럼 이길 수 없는 적을 맞이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직면했을 때 무인은 어찌해야 하는가?

지금 백천은 모두에게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었다.

현종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그리고 비단 오검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뒤를 채우고 있는 화산의 문도들도, 당가의 가솔들도, 그리고 남궁과 새외의 무인들도 이내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현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맹주님.”

빙궁의 장로 한이명이 빙그레 웃었다.

“설마 우리가 목숨을 던질 각오도 없이 그저 맹주님의 명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한 장로님⋯⋯.”

한이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표정은 저희에 대한 모욕입니다. 이곳에 끌려온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목숨이 위험할 거란 사실을 모르고 온 이도 없습니다. 그 모든 걸 알고도 제발로 온 겁니다.”

한이명의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면한 결과는 가혹하다. 하지만 누구도 현종을 원망하려 들지 않았다. 현종 역시 최선을 다했을 뿐, 강을 넘는다는 선택을 한 건 본인들이다.

“하나⋯⋯.”

“물론 이곳에 죽는 게 아쉽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남궁명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저 강 너머에서 맹도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결말이지요.”

“역시 우리 장로님.”

“그럼요. 남궁은 죽으면 죽었지, 그런 짓은 못 합니다!”

외면받는 이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매화도에서 처절하게 느꼈던 남궁세가는 오히려 개운한 표정이었다.

현종이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다. 이 말 중 태반은 그저 그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하지만, 그 안은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하리라는 걸 말이다.

“맹주님.”

그 순간 당군악이 서늘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시도는 해 봐야겠지요. 아무리 장일소가 있다고 하나 사패련은 우리와 다릅니다. 서로 반목을 일삼던 저들이 완벽히 연계해 싸우지는 못할 겁니다.”

“⋯⋯.”

“그러니 틈은 만들어 내면 됩니다. 당가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마침⋯⋯ 수로채 놈들도 거의 도착한 것 같으니, 저 배를 탈취하면 될 겁니다.”

수로채가 상륙을 한다는 건, 이 땅 위에 물리쳐야 할 적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소리다. 절대 천우맹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종은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주님. 해봐야지요.”

현종이 검을 꽉 움켜잡았다.

포기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남은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뿐. 설사 헛된 저항이라 해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다.

현종이 저도 모르게 화산의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뜻이 전해진 건지, 아니면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들의 눈빛 역시 현종과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때 금양백이 만류하는 제자들을 밀치며 앞으로 걸어왔다.

“누군가 선두에 서야 한다면⋯⋯ 그건 제가 돼야 할 것입니다.”

“장문인!”

“장문인, 이러시면⋯⋯!”

무릎이 금방이라도 꺾일 듯 휘청거렸지만 그는 꿋꿋했다.

“⋯⋯안 된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금양백의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현종은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누가 감히 금양백을 앞에 두고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금 장문인⋯⋯.”

금양백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제야 죽을 자리를 찾은 모양입니다.”

“⋯⋯.”

“저는 살 만큼 살았습니다. 이제 남은 바람은 하나뿐입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의 바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건 현종의 바람이기도 했다.

‘선조들이시여’

이제는 알 것 같다. 화산의 선조들이 어째서 그 머나먼 대산에서 죽음을 무릅썼는지. 어떤 심정으로 싸웠는지.

그들이 바란 것은 먼 땅에 두고 온 이들이 살아남는 것. 오직 그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백천이는 물러나거라.”

“⋯⋯예?”

백천이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돌아보았지만, 현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순간이나마 백천이 모두를 이끌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백천이 이미 자신을 뛰어넘었단 사실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건 그저⋯⋯ 늙은이가 지난한 삶의 끝에 마지막으로 부리는 고집이자, 노욕일 뿐이다.

“제자들은 뒤로 물러서라. 그리고 장로들은 앞으로 나서라.”

“예! 태상장문인!”

현상과 운자 배들이 제자들을 뒤로 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심지어 현영마저도 말없이 단호하게 나섰다.

“자, 장로님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금양백이 목소리를 높였다.

“해남의 장로들은 선두로 나서라!”

“남궁 역시 마찬가지다!”

“애송이들은 물러서라! 너희가 낄 곳이 아니다!”

장로라는 직위를 짊어진 이들, 그리고 직위가 그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스스로 어른이라 자부하는 이들은 하나 남김없이 어린 제자들을 물리며 나섰다.

“장로님들, 이건⋯⋯!”

“입 닥치고 물러나라!”

서슬 퍼런 일갈에, 만류하려던 이들이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이견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뒤에 남겨진 이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현종이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

“그저 싸움의 방식이 다른 것뿐이지. 길을 여는 것은 우리의 싸움. 그리고 너희의 싸움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저 강을 넘는 것이다.”

“맹주님⋯⋯.”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누가 감히 꺼낼 수 있으랴.

이곳에서 모두 죽는다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살아남는다면 의지가 이어진다. 그리하여 이곳의 죽음들은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가벼운 싸움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당가주께서는⋯⋯.”

현종이 뒤를 맡아 달라고 하려는데, 당군악은 말없이 그의 옆에 굳건히 섰다.

“이제 와 나이가 충분치 않다고 홀대하실 셈입니까?”

현종은 결국 웃고 말았다. 천하의 당군악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저는 당가의 가주입니다.”

“그렇지요⋯⋯. 제가 잠시 무례했습니다.”

“추격대까지 오고 있습니다. 굳이 말이 길 여유는 없을 겁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양백과 시선을 교환했다.

끝은 깔끔할수록 좋다. 이게 그들이 남기는 마지막이라면 적어도 제자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제는 그저 모든 것을 걸고 싸울 뿐!

“천우맹은 들어라⋯⋯!”

현종이 그 각오를 담아 검을 뽑아 들고 외친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커다란 목소리가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매, 맹주님!”

“음?”

“저기! 저기 강 너머에! 아, 아니! 강 위에! 저길 보십시오, 저기!”

현종이 그쪽을 휙 돌아보았다. 이내 그의 눈이 크게 부릅뜨였다.

“어⋯⋯. 어엇?”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림! 소림입니다! 소림과 구파입니다, 맹주님!”

강 너머에서 강변을 점거하고 있던 이들.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았으나, 애써 눈에 담지 않으려 했던 이들.

소림의 상징인 황색 승복을 입은 승려 무리가 수면을 박차며 강을 내달리고 있었다.

“소, 소림이?”

그 순간 혜연의 입에서 울음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방자아아아아앙!”

똑똑히 보였다. 강 너머에 있는 걸 알고도 차마 부를 수 없었던 그의 사형제들이 목숨을 걸고 강을 내달리고 있었다.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정말로 소림이다. 그의 사형제들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

“⋯⋯아, 아니, 이게⋯⋯?”

“소림뿐만이 아닙니다! 팽가도! 공동도 강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지, 지원! 구파가 저희를 지원합니다! 구파가 강을 넘고 있습니다, 맹주님!”

현종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믿을 수가 없다. 저 소림이⋯⋯. 그 법정이 천우맹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건다고? 사패련이 점거한 이 땅에서 싸우기 위해 강을 건넌다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떠도 눈앞의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저들은 지금 분명히 오고 있다.

바로 이 강 너머로 말이다!

파아아앙!

수면을 연신 박차며 법정이 우렁우렁한 사자후를 터트렸다.

“일대제자들은 수로채를 견제하라! 장로들은 강변에 아군이 상륙할 곳을 확보해라!”

“예!”

파아아앙!

발이 수면을 박찰 때마다 그의 몸이 솟구치며 나아갔다.

그 아래에선 소림과 공동, 그리고 팽가의 무인들이 전력을 다해 헤엄치고 있었다. 몸을 띄워 올려 강 너머를 바라보는 법정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나를 우습게 보았던 건가, 장일소?’

이 법정이 물러날 것이라 여긴 것이가? 그저 손을 놓고 바라보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지금까지처럼?

그렇다면 오산이다.

법정은 싸움을 두려워하는 이가 아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패배다. 정확히는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패배. 그러니 느긋하게 다가오는 패배를 기다리기만 할 리 없었다.

지금껏 그가 싸움을 피해 왔던 것은 그저 싸움보다 더 나은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싸워서 길을 열기를 망설일 이유 따윈 없다.

‘현종!’

법정의 시선이 사패련을 넘어 현종에게로 향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천우맹과 힘을 합칠 수만 있다면 사패련과 승부를 겨룰 수 있다.

강을 넘겠다는 각오만 여전하다면 여전히 승기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소림은 불타지 않는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법정은 소림이라는 두 글자를 지켜 내기 위해서라면 제 몸을 산 채로 불태우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뭐가 두려워 도하를 망설이겠는가? 이깟 강을 넘는 것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사파의 악적을 물리쳐 천우맹을 구해 내라!”

법정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각 위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예, 방장!”

소림의 승려들 역시 전력을 다해 화답했다.

천하제일문 천년소림.

수많은 세월 동안 중원을 수호해 온 그들은 이 순간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이 내뿜는 웅혼한 서기가 장강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한편 천우맹 쪽에는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쩌면 감격해야 할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흥분에 몸을 떨어야 할 광경인지도 모른다.

지독하게도 천우맹과 맞지 않았던, 구파일방의 수장인 소림이 이 순간 천우맹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으니까.

하지만 언덕 위에 선 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건 감동보다는 당혹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걸이 입을 슬그머니 벌렸다.

“그⋯⋯.”

몇 번이고 말을 고르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중얼댔다.

“⋯⋯문어대가리가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

지독하게 무례한 말이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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