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9화. 꿈에서 깰 시간이란다. (4)
“으⋯⋯.”
법정의 눈이 떨렸다.
수로채의 선단이 드넓은 장강을 가득 메우며 위협적인 검은 물결처럼 보였다.
물론 지금까지 지겹도록 봐 온 광경이니 딱히 놀랄 일도, 당황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장강의 물살을 가르던 선단들이 일제히 속도를 줄이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서기 시작했단 것이다.
이는 즉, 수로채가 목표로 하던 곳에 도착했다는 말이다.
그 선단 앞에는 다름 아닌 남경 땅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 이런⋯⋯.”
푸른 초지나 황톳빛 흙으로 덮여 있어야 할 땅은 풀도 흙도 아닌 사람으로 차 있다. 세상이 사패련이라고 부르는 이들로.
만인방과 흑귀보, 그리고 사방에서 끌어모은 중소 사파까지.
그 어마어마한 군세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엔 천하의 법정조차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바, 방장.”
공동 장문인 종리형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당연히 종리형도 본 적이 없다. 이만한 무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광경은 말이다. 수에 압도된다는 게 뭔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하찮은 개조차도 수십 마리가 모이면 범 하나 정도는 물어뜯을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저들의 평균적인 무위가 명문정파에 비할 바 아니라 해도, 저만한 수가 모인다면 그 차이 정도야 무시해 버리고도 남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이 저 선단에 몸을 싣고 강북으로 넘어온다면?’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구파가 강변을 점거하고 있다고는 하나, 저 장강을 채우고도 남을 것 같은 이들을 모두 막아 낼 수 있을까?
그 순간 팽엽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몸을 빼는 게 낫겠습니다.”
하지만 종리형은 알았다. 그 팽엽조차 목소리를 미세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이 강 너머까지 공격해 온다면, 이곳에 있는 전력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작은 피해나 입히고 전멸하게 될 겁니다.”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인 말이었다.
“하, 하지만 팽가주님. 그랬다가는⋯⋯.”
종리형이 당혹한 낯으로 입을 뗐지만 팽엽은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차갑게 고개를 내저었다.
“체면 따위를 논할 상황이 아닙니다.”
“⋯⋯.”
“아니면? 종리 장문께서는 우리만으로 저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종리형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다른 구파들까지 모두 모여 있다면 모를까, 고작 세 문파의 힘으로 막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더구나 소림은 온전한 전력도 아니잖은가?
“방장, 결단을 내리시지요.”
팽엽이 슬쩍 법정을 채근했다. 하지만 법정은 가타부타 말없이 강 너머를 뚫어지게 보기만 했다.
“방장.”
팽엽이 다시 독촉하려는 순간, 법정의 입이 열리며 들끓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리되는 것만은 막으려 했거늘⋯⋯. 그래서 그토록 말했거늘! 이 어리석은!”
충분히 감당 가능했던 일이 천우맹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흘러가 버린 것이다.
분노로 턱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이제는 사패련의 도하를 막을 방법이 없다. 저들은 분명 호북을 넘어 하남까지 진격할 것이다.
장일소가 노리는 바는 명백하다.
중원은 광활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넓은 중원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그중 절반 정도의 문파만 하남을 중심으로 한 장강 이북에 모여 있다.
만약 그곳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소림과 무당, 종남을 중심으로 한 구파일방의 중심부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그 중앙을 장악할 수만 있다면?
중원 오지에 퍼져 있는 다른 문파 따위야 언제든 각개격파 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무당과 종남이 봉문을 풀고 합류한다면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구파의 중심 문파는 분명 강력하니까. 하지만 그 전쟁의 여파를 피할 방법은 없다.
법정은 알고 있다. 소림이, 무당이 어째서 강호의 중심이 될 수 있었는지.
그 문파의 무학이 뛰어난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터를 잡은 곳이 바로 중원의 중앙인 하남이란 사실이었다.
사도, 그리고 마도까지, 문파의 멸망을 각오하고 싸워야 할 적들은 지금까지 늘 중원의 외곽에서부터 하남을 향해 진격해 왔다.
그렇기에 아무리 참혹한 전쟁이 벌어져도 패배하지 않는 이상은 하남이 불타는 일이 없었다. 그 덕에 백 년 전에 마교가 발호했을 때도 소림이 불타는 것만은 피할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사패련이 하남으로 곧장 북상하게 된다면 결국 승리하더라도 소림이 괴멸적인 피해를 감수하는 사태는 피할 도리가 없다.
적어도 숭산은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불타 버릴 게 분명하다. 승리한다 해도 남는 것은 상처뿐이리라.
본산이 불타고 소림을 이어 갈 제자들을 모조리 잃은 채, 승리의 영광이 만들어 낸 과실을 다른 이들만이 수확하는 그 끔찍한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법정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패군⋯⋯. 이 간악무도한 자가⋯⋯.”
사패련이 당연히 천우맹부터 노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일소의 칼끝은 천우맹이 아닌 바로 법정의 목에 겨눠져 있었던 것이다.
하남이 불탈 것을 알면서도 일단 물러날 텐가?
그게 아니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이곳에 남아 옥쇄하여 하남에 갈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텐가?
그 어느 것도 법정은 쉽사리 택할 수가 없었다.
“바, 방장!”
바로 그때, 찢어지는 듯한 종리형의 고함이 그의 상념을 깨 버렸다. 이내 법정은 똑똑히 보았다. 장강을 채우고 있던 선단들이 일제히 뱃머리를 돌리는 광경을.
방향은 남쪽!
법정이 넋을 잃은 듯 망연하게 입을 열었다.
“⋯⋯맹은⋯⋯.”
“예?”
“천우맹! 천우맹은 지금 어디에 있소?”
“그, 그야, 보나 마나⋯⋯.”
법정의 시선이 강 너머 남경 대지에 솟은 언덕으로 향했다.
까마득히 먼 그곳에서 익숙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법정의 목에 핏대가 섰고, 이내 우렁우렁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현조오오오오오오오옹!”
그건 절규였고, 원망이었으며, 또한 간절함이었다.
세상이 고요로 물들어 있다.
아니, 어쩌면 수많은 소란으로 물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현종에게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눈길 닿는 곳마다 적으로 가득하다는 사실뿐.
만인방과 흑귀보를 상징하는 깃발이 숱하게 나부끼고, 그 중간중간에는 더 거대한 크기로 압박감을 더하는 커다란 깃발이 우뚝 서 있었다. 거기에 써진 ‘패(覇)’라는 붉은 글자가 눈과 가슴에 박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그 어마어마한 군세 한중간에 서 있는 새하얀 마차였다.
여덟 마리의 백마가 끄는 커다란 마차의 위용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현재의 강호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천하가 흘러가는 정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저 마차에 타고 있을 이가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다.
“⋯⋯장일소.”
그가 이곳에 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두 이끌고, 천우맹의 간절한 발악을 비웃듯이 퇴로를 이미 선점하여 고고히 머물러 있었다.
현종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질려 갔다.
분노나 적의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순간 그를 사로잡은 것은 지독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 못 할 만큼 거대한 허탈감이었다.
‘천존이여⋯⋯.’
어찌 이리 가혹한가? 어찌 이리 매정할 수 있는가?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이제껏 지켜 온 협의와 도의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달라고 소리친 것도 아니다.
그저 제자들이 흘린 피와 고통을 헛되이 만들지 않을 만큼의 작은 안온함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과한 바람이었던가?
“어⋯⋯.”
“이, 이런⋯⋯.”
한발 늦게 언덕의 꼭대기에 도달한 이들도 현종처럼 모두 말을 잃고 말았다. 천하의 당군악도, 세상 두려울 게 없어 보이던 맹소마저도 펼쳐진 절망 앞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늦은 건가⋯⋯.”
임소병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니기만을 바라며 외면해 온 현실이 더없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결말인지 모른다. 패군 장일소가 지배하는 땅에 감히 발을 들인 이상 받아들여야 할 냉엄한 단죄인지도 모른다.
“⋯⋯싸우는 건⋯⋯.”
당군악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무의미하다. 아무리 이곳에 천우맹의 전력이 모두 모여 있다지만 저들을 모두 뚫고 도하하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녹림왕! 우회할 방법은?”
“⋯⋯.”
“녹림왕?”
당군악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임소병을 찾았지만, 임소병은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늦었습니다. 상대는 패군입니다. 우리를 놓아줄 리 없습니다.”
당군악은 지그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 역시 알고 있었던 바이나, 녹림왕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정해진 결말을 선고받은 듯했다. 남은 거라고는 그저 허탈함뿐이었다.
‘우리의 결정이 잘못되었던가?’
그리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잘못되지 않았다면 어째서 이런 결말을 맞이한단 말인가?
절망은 전염된다.
앞으로 나서지 못해 장강의 상황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앞에 선 이들의 반응을 보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만큼 절망은 더 빠르게 엄습해 왔다.
“아⋯⋯.”
그 순간 수로채의 선단들이 방향을 바꿔 그들에게로 몰려들었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들이 이 땅에 내려서는 순간, 모든 것은 종언을 고할 것이다.
그곳에 선 모든 이들이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그만 내려놓으려는 순간, 업혀 있던 백천이 힘겹게 현종의 등을 밀어 내며 내렸다.
“배, 백천아?”
바닥에 내려선 그는 흔들리는 고개를 바로잡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황급히 몸을 구부렸다.
“쿨럭!”
덩어리진 죽은 피가 울컥 터져 나왔다. 실로 불길한 빛을 띤 피를 보고 현종이 눈을 부릅떴다. 백천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뒤늦게 안 것이다.
“너, 너! 몸이⋯⋯.”
스르르릉.
하지만 백천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천천히 검을 뽑았다.
“뭐, 뭘 하려고?”
“이제⋯⋯.”
백천이 자꾸만 떨어지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피로 젖은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저기만 뚫으면 강북⋯⋯입니다.”
“⋯⋯.”
“그렇지?”
그 순간 바닥에 내려선 이들이 발을 끌며 백천에게로 다가갔다.
“다 왔네요, 사숙.”
“하, 길었지. 이제 끝이네.”
“이제 저기만 뚫으면 돼요!”
“지쳤어. 빨리 해.”
“아미타불. 다시는 강남에 안 올 겁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현종과 당군악의 눈에 충격과 망연함이 깃들었다.
오검, 그리고 혜연. 그들이 태연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직도 싸우겠다는 듯이.
무의미하다. 저항은 의미가 없다.
저런 몸으로는 제대로 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저들에게 감히 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도 싸우겠다고 외치는 이들의 의지를 누가 감히 헛되다 할 수 있는가?
“너희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상장문인.”
백천이 빙긋 웃었다.
“길을 여는 건 저희의 특기입니다. 그렇지?”
오검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현종은 깨달았다. 아니, 깨달아 버렸다.
언제고 품에 꽉 안은 채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제자들이 이미 거꾸로 그를 이끌고 있음을.
화산이 이들을 지키는 게 아니다. 이들이 화산을, 천우맹을 지키고 있었다.
백천이 발을 끌며 언덕의 끝에 섰다. 피에 젖은 무복이 휘날렸다.
대지를 가득 채운 적들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배들이 보였다.
“끝내주는군.”
스스로 검을 든 이라면, 자신이 영웅이길 바랐던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광경을 꿈꿨을 것이다.
마침내 백천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뇌리에 언젠가 들었던 청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영웅? 글쎄, 나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영웅이란,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는 놈이겠지. 죽는 순간까지도.
“오냐.”
백천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깨지 않아 주마. 영원히.”
이내 그의 검이 붉은 검기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