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8화. 꿈에서 깰 시간이란다. (3)
“보고드립니다! 패군 장일소가 탄 마차를 대동한 만인방의 군세가 마안산(马鞍山)을 넘어 남경에 거의 이르렀다고 합니다!”
“장로님! 항주 방면에서 이동한 흑귀보가 남경 지척에 도달했습니다!”
“수로채! 장강수로채의 선단이 남경 인근에 도달했다는 보고입니다!”
다급한 보고가 쏟아지기 무섭게 다탁을 둘러싸고 서 있던 거지들이 손을 뻗었다. 지도 위에 놓인 말들이 바삐 옮겨졌다.
그 지도를 바라보는 자오개 능삼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검고, 붉고, 또 푸른 말들이 지도 위의 한곳을 포위하듯 좁혀 오고 있었다.
남경(南京). 강을 넘은 천우맹이 퇴로로 삼은⋯⋯. 아니, 퇴로로 삼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천우맹이 화산검협을 구하기 위해 달려간 곳은 좌는 석구호(石臼湖), 우는 장탕호(长荡湖)라는 거대한 호수로 막힌 지형이다.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선 오직 북쪽의 남경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유일한 퇴로를 지금 만인방과 흑귀보, 그리고 수로채가 막아 서고 있는 것이다.
‘아, 안 돼!’
만일 이들이 정말로 먼저 도착하여 퇴로를 봉쇄하게 된다면 천우맹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들은 절대 장강을 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천우맹! 천우맹은 어찌 되었느냐?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느냐?”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주둥아리로만 지껄이지 말고 어떻게든 하란 말이다! 당장!”
“하, 하지만 강남에 있는 이들의 운신이⋯⋯.”
콰아아앙!
능삼이 다탁을 힘껏 내리쳤다.
“이⋯⋯!”
그가 살기까지 내뿜으니 그 위세에 놀란 거지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목숨이 아까우면 개방에는 뭐 하러 기어들어 왔느냐! 네놈들이 그러고도 의혈개방(義血丐幇)의 방도들이냐! 남이 주는 밥 얻어먹고 사는 놈들이 정작 필요할 땐 목숨 아까워 망설인다면 정말 천한 거지새끼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느냐!”
그 말에 정보각의 각원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명을 보내라, 당장!”
“예, 장로님.”
그 순간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열리며 한 거지가 뛰어 들어왔다.
“장로님! 소림! 소림 방장의 전언입니다!”
“법정?”
순간 능삼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능숙히 갈무리하며 말했다.
“말해 봐라.”
“남경으로 집결하고 있는 이들의 종적을 다시 파악해야 한답니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런 개 같은! 누가 그걸 모르느냐! 이미 하고 있지 않으냐?”
“그, 그게 아닙니다! 드러난 이들 말고, 또 다른 이들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답니다!”
“⋯⋯뭐?”
“패군이 이 상황을 예측했다면 반드시 한 수를 더 숨겨 두었을 거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파악한 저들의 전력이 제대로 된 전력이 맞는지를 재차 확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수를 더?”
능삼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그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어붙어 있던 그가 황급히 지도를 보았다.
“여기에⋯⋯. 여기에 뭔가 더?”
불가능하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사패련이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모조리 동원하지 않았는가?
거리가 멀어 제때 도착할 수 없을 하오문을 제외하면, 사패련을 구성하는 문파는 모조리 집결하고 있다.
하지만 혹시 그게 가능하다면?
사패련이 보유한 전력이 그들이 아는 것 이상이라면?
능삼의 얼굴을 타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전력이란 차이가 나는 순간부터 곱절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서로 대등한 실력을 지닌 이들이 일 대 일로 싸움을 벌인다면 이기는 쪽도 만신창이가 되겠지만, 이 대 일로 싸움을 벌인다면 수가 부족한 쪽은 제대로 손도 뻗어 보지 못하고 얻어맞게 된다.
이 논리는 병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력 차이가 두 배 이상 벌어지게 된다면, 전력이 큰 쪽이 입는 피해는 극단적으로 줄고, 그만큼 상대의 피해는 더욱더 커진다.
그런데 지금 남경에 집결하는 전력이 그들이 아는 것 이상이라면? 그래서 저 천우맹의 전력의 몇 배로 상회해 버린다면?
‘다 끝장이다.’
천우맹은 사패련에게 변변한 피해조차 주지 못한 채 궤멸해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럼 구파만이 홀로 남아 사기가 하늘 끝까지 오른 사패련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껏 구파가 사패련을 상대하면서도 최소한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 천우맹과 구파일방을 합한 전력이 사패련보다 우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우맹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면 강호의 상황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지독한 혼돈으로 끌려들어 가고 말 것이다.
말 그대로 천하가 불바다가 되는 셈이다.
“불가능해⋯⋯. 갑자기 그만한 전력을 끌어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못해도 구파급의 전력이 하나는 더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런 이들을 대체 어디서?”
“장로님!”
멍하게 중얼거리던 능삼이 움찔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 너머에 대기하고 있는 거지새끼들에게 강을 넘으라고 해라! 남경 주변을 이 잡듯이 뒤져야 한다! 저들이 숨긴 전력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자, 장로님! 그랬다가는 거지들이 다 죽습니다.”
“알았으니 당장 강을 넘으라고 해! 정 안 되면 우리라도 도와야 할 것 아니냐!”
“하, 하지만 장로님께는 그럴 권한이⋯⋯.”
능삼이 죽일 듯한 눈으로 항명한 이를 노려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개방이 의를 행함에 있어 일일이 명을 기다렸느냐? 언제부터?”
“⋯⋯.”
“만약 저들이 함정을 판 것이라면 천우맹은 그걸로 끝이다! 천우맹뿐 아니라 천하가 다 불바다가 된다! 정말 모르느냐?”
그 무겁디무거운 말에 망설이던 수하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둘러라, 어서!”
“예!”
뛰쳐나가는 거지를 보며 능삼은 턱 근육이 불거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저 노파심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전력을 단기간에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그리고 그만한 전력을 보유했음에도 지금까지 철저하게 숨기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런 인내심을 갖춘 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을 밀어 낼 수 없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패군이라면.’
법정이 전해온 말 중 그 한마디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패군이라면, 저 패군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천하를 농락하는 그라면,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함정을 팔 수도 있지 않을까?
“⋯⋯빌어먹을.”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뱉은 능삼이 지도 위의 남경을 뚫어져라 보았다.
만일 저들이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천우맹 앞을 가로막는 일이 벌어진다면 남경은 천우맹도들이 흘린 피로 온통 붉게 물들게 될 것이다.
‘맹주, 제발⋯⋯. 제발 서두르시오. 제발!’
❀ ❀ ❀
“서둘러라!”
현종이 목이 터지도록 고함쳤다. 그의 명에 천우맹도들은 이를 더 악물며 내달렸다.
알고 있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적과의 교전은 피할 수 없다.
사패련이 지배하고 있는 강남은 배짱 좋게 제 발로 걸어들어온 이들을 쉽게 놓아줄 만큼 만만하지 않다. 분명 퇴로를 점거한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교전을 피할 수 없다고 해도, 상대할 이의 수는 줄일 수 있다. 사패련이 모두 집결하기 전에 강에 닿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맹주님! 해남이! 해남이 낙오합니다!”
“이익!”
현종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해한다. 그들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 장강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천우맹과 달리 해남은 이미 교전을 하며 강남을 종단한 뒤가 아닌가?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 해야 한다.
하지만 이해한다 해서 답답함이 모두 가시는 건 아니다.
“여력이 남는 이들은 해남의 제자들을 업어라, 당장!”
“예!”
화산의 제자들이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해남의 제자들을 거의 들이받듯이 둘러업었다.
“나, 나는 괜찮소!”
당황한 해남의 제자들이 엉겁결에 어깨를 밀며 저항했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들을 더 꽉 붙들었다.
“빌어먹을!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으⋯⋯.”
결국 해남의 제자들은 순순히 등에 업혀 가기로 했다. 확실히 지금은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해남 때문에 속도가 늦어져 적에게 포위당한다면 자존심 따위는 더 이상 대수롭지 않게 될 테니까.
“이쪽으로!”
“우리도 돕겠소!”
“비키시오, 샌님 같은 양반들! 힘쓰는 건 야수궁 특기니까!”
화산뿐만 아니라 다른 문파에서도 힘이 남는 이들이 달려들어 해남의 제자들을 둘러업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현종이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찬다.
‘곧! 이제 곧이다!’
다행히 추격해 오는 만인방의 잔당들에게 뒤를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딱히 큰 교전 없이 장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힘을 짜내라!”
제자들을 독려하는 현종의 등에 업힌 백천이 손을 들어 기침이 새어 나오는 제 입을 힘없이 막았다.
“쿨럭, 쿨럭.”
기침과 함께 흘러나온 검은 피가 손을 적셨다. 시야가 흐릿한 가운데 손을 확인한 백천은 말없이 소매 안으로 주먹을 쥐며 감추었다.
“괜찮으냐?”
현종의 물음에 백천이 억지로 괜찮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합니다.”
“조금만 참거라. 이제 곧 장강이다!”
“⋯⋯예.”
백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현종이 계속해서 진기를 밀어 넣어 주고 있지만, 그의 몸은 이미 깨져 버린 그릇처럼 현종의 진기를 흘려 댈 뿐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백천이 고개를 돌려 제 사형제들을 확인했다.
몸 상태를 생각해 보면 그만 의식을 놓아 버릴 만도 한데, 다들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들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곧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던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아니, 할 수 없는 것마저 했다. 그러니 이제는 그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하늘이 그들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면, 그들의 노력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살아날 구멍 정도는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 가혹하니까.
“맹주님, 이제 지척입니다! 저 언덕만 넘으면 장강이 보입니다!”
당군악의 고함에 모두의 시선이 앞쪽으로 향했다.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오르막길. 저 길만 지나면 장강에 도달한다는 소리다.
그럼 마침내 이 지독했던 여정이 끝난다.
‘제발!’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적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를 비는 건 너무도 허무맹랑하니까.
바라는 것은 그저 하나!
적들의 수가 너무 많지 않기를. 이 목숨 하나만 희생하고 길을 열 수 있을 만큼만 적이 있기를.
“힘을 내라!”
현종이 제자들을 독려하며 달려 나갔다.
울창하게 뻗은 숲들이 이지러지며 그들을 스쳐 지나간다. 높이 솟은 언덕의 끝이 순식간에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발!’
이토록 간절한 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다급한 적이 있었던가?
‘천존이시여!’
현종은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정말 천존이 굽어살피고 있다면, 원망스러울 정도로 화산을 외면했던 그가 정말 존재한다면, 이 순간만큼은 그들을 지켜 주기를. 적어도 이 간절함을 외면하지만은 않기를.
굳이 인과라는 명목으로 대가를 원한다면, 늙어 버린 목숨만으로 만족해 주기를.
“맹주님!”
현종이 힘껏 땅을 박찼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의 끝, 땅과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솟아오른 현종이 이윽고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처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너무도 넓은, 차라리 바다라 불러야 옳을 드넓은 강이었다.
시선이 아래를 향해 천천히 옮겨졌다.
장강까지 이어지는 너른 땅이⋯⋯ 검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순간,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현종의 다리가 절망에 꺾이며 휘청였다.
“아⋯⋯. 아아⋯⋯.”
눈에 닿는 땅마다 사람으로 차 있다. 장강까지 가는 길이 사람으로 빽빽한 것이다.
그건 적(敵)이라는 이름의 절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