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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07화 (1,408/1,567)

1407화. 꿈에서 깰 시간이란다. (2)

긴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잠시 후에야 떨림이 잦아들었고, 그 끝에 굳게 닫혔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혼탁한 것 같기도,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빨려드는 듯했다.

그 눈은 위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범인들은 평생을 가도 구경조차 하기 힘들 진귀한 귀보(貴寶)를 아낌없이 퍼부어 꾸민, 지독히도 사치스러운 마차 천장이 보였다.

흡사 물결처럼 천장에 드리워진 비단은, 비단 중 최고로 꼽히는 천잠(天蠶) 중에서도 최상품이다. 황금조차도 무색하게 만드는 귀품이었다.

그 비단은 값비싼 보옥(寶玉)을 깎아 붙여 장식되었고, 그 사이사이 박힌 묘안석(猫眼石)은 단 하나만으로 거대한 장원을 구입할 수 있을 만큼 귀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놓인 다탁은 왕이나 사용한다는 최상급의 자단목을 깎아 만든 것이다. 위에 놓인 작은 잔 하나마저도 장인이 옥을 통째로 깎아 만든 물건이다.

손 닿는 곳, 발 닿는 곳, 그 몸에 걸친 것, 하나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손에 거머쥐고 휘감은 사내의 눈엔 한 점의 욕망이나 자부심조차 실려 있지 않았다.

세인들에겐 한없이 귀하고 값비싼 것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저 지루하고 공허할 뿐이었다.

저것들에 정말 그만한 값어치가 있을까? 아니, 저것들이 그 값만큼의 가치를 하나?

사내의 붉은 입술이 이내 작은 실소를 그렸다.

“그럴 리가⋯⋯.”

우습기 이를 데 없다.

비단이라 해 봐야 조금 더 질기고 보기에 그럴싸한 천에 지나지 않는다. 비단을 걸친 이와 거적때기를 걸친 이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저 진귀한 보석들? 그것 역시 길가의 돌멩이와 딱히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조금 더 반짝거리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황제나 왕 같은 권력자가 아니면 함부로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자단목이라 해 봐야 고작 색이 조금 다른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닌 짐승이 보석과 돌멩이를 구분할까? 그들이 제 둥지에 채울 지푸라기와 비단의 차이를 이해하려 들까? 그들이 나무를 타고 오르며 그 색상이 다른 것을 신경이나 쓸까?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스스로 만들어 붙인 그 가치를 그대로 믿어 버리는 건 오직 인간뿐이다.

재물, 명예, 도의, 신앙, 인연, 이상⋯⋯. 끝도 없이 많은, 그 너절한 것들.

“쿡쿡쿡.”

희미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결국 가치란 사람이 적당히 가져다 붙인 것들이다. 언제든지 떼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 가치를 만들어 낸 게 자신이란 것도 망각하고 거기에 매달린다. 정작 가장 귀한 제 목숨까지 걸어 가며 말이다.

사내는 다탁에 놓인 술병을 잡고 천천히 기울였다. 호박색 미주(美酒)가 옥배(玉杯)로 흘러들었다.

“어리석고⋯⋯ 멍청하지.”

불을 향해 무턱대고 달려드는 부나방은 비웃으면서, 무가치한 것에 목숨을 던지는 자신들의 행위는 고귀하다고 믿는다.

그러니 무슨 수로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이 이토록 비극으로 가득 찬 거대한 희극인데.

농밀하게 퍼져 나가는 주향을 음미하던 사내가 잔을 들었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호박색 술 위로 그의 모습이 비쳤다.

값비싼 금속을 주렁주렁 매달고, 과한 화장으로 얼굴을 뒤덮고, 붉고 흰 비단으로 온몸을 휘감은 제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장일소는 모든 것을 비웃는다. 하지만 그가 가장 철저하게 비웃는 건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이었다.

이 마차 밖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 모든 게 무의미하단 걸 알면서도 무엇 하나 손아귀에서 놓으려 하질 않는다.

무명천과 비단의 차이를 실감하지 못하면서도 그 몸을 가장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감싸고, 싸구려 화주든 비싼 미주든 배 속에 흘러 들어가면 다를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없이 진귀한 미주만을 입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쿡쿡쿡쿡.”

장일소가 잔에 든 술을 단번에 비워 냈다.

무가치한 것에 목숨을 걸고, 무의미한 것에 집착하는 게 인간이기 위한 조건이라면, 장일소는 그 누구보다 완벽한 인간일 것이다.

시선이 작고 네모난 창으로 향했다.

몰려든다, 저마다의 이상을 품은 이들이.

누군가는 협의를, 누군가는 권세를, 또 누군가는 의리를, 그리고 누군가는 평안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각기 다른 목적을 품은 이들이 모조리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숨이 막힐 듯 진득한 제각각의 욕망이 덩어리져 휘돌 것이다.

피처럼 붉은 장일소의 입술이 움직였다.

“슬슬⋯⋯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지.”

소용돌이칠 것이다.

그가 만들어 낸 판 위에서. 소림도, 구파도, 화산도, 천우맹도, 그리고 사패련마저도.

그 지독한 소용돌이에서 죽어 갈 것은 사람도, 삶도 아니다. 누군가가 품은 이상이다. 스스로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믿은 헛된 신기루이다.

이상에 취한 이들에게 세상은 더없이 달콤할 것이다. 부나방이 제 날개가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불에 홀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젠⋯⋯.

“그만 꿈에서 깰 시간이란다.”

장일소의 입술에 화사한 미소가 드리웠다. 곧 세상이 피로 덧칠될 것이다.

❀ ❀ ❀

“후욱⋯⋯. 후욱⋯⋯.”

더는 땀도 흐르지 않았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낯빛이 금양백의 현재 상황을 확연히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발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그는 달릴 것이었다.

곁눈질로 금양백의 상태를 살핀 현종이 슬쩍 당군악을 향해 말을 건넸다.

“당 가주님⋯⋯.”

“무리입니다.”

하지만 당군악은 현종이 할 말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는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차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단전이 부서지고 진기가 역류했습니다. 당가의 의술로도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반 시체가 된 청명이 녀석도 살려 낸 당가가 아닙니까?”

“맹주님. 안타까운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저희는 화타도 신선도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

“화산검협을 살려 낼 수 있었던 건 치료를 버틸 수 있는 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금 장문인은 아닙니다. 이미 깨진 잔은 공들여 붙여 봐야 새는 물을 막을 수 없습니다.”

“으음.”

들으면서도 선뜻 이해가 가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청명 쪽이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심했다. 그럼에도 청명은 살릴 수 있고, 금양백은 살릴 방도가 없다니.

하지만 현종은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의술에 관한 한 그는 문외한이나 다름없고, 당군악은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런 이에게 의술에 대한 것을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당소소를 돌아봤지만, 당소소 역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현종이 남몰래 탄식하던 그때, 힘겹게 그들을 따라오던 금양백이 크게 휘청이더니 피를 왈칵 토해 냈다.

“장문인!”

놀란 제자들이 황급히 금양백에게로 다가오려 했지만, 그는 즉각 손을 내젓고 두 눈을 부릅떴다.

“계속 가거라! 신경 쓰지 말고 달려라, 어서!”

해남 제자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지엄한 장문인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들은 이를 악물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곽환소가 금양백의 곁으로 다가왔다.

“장문인, 제게 업히십시오!”

하지만 금양백은 고집스레 고개를 젓고 묵묵히 달렸다. 마음이 급해진 곽환소가 다시 따라붙으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럼 진기라도⋯⋯.”

“쓸데없는 짓 하지 말거라.”

엄하게 일갈한 금양백이 제 팔을 붙든 곽환소의 손을 떼어 냈다.

“장문인! 이렇게 고집부리실 때가 아닙니다! 이러다가 정말⋯⋯.”

“죽는다?”

“⋯⋯.”

“그 말이 하고 싶더냐?”

곽환소가 입을 다물자 금양백이 피식 웃었다. 조소하는 건 아니었다. 단호하고 냉정한 손짓과는 달리, 금양백의 두 눈에 담긴 것은 분명 제자들과 곽환소를 향한 온기였다.

“나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사람이다. 업혀 간다고 살 수 있는 거라면 이미 그리했을 것이다.”

금양백이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목소리는 담담해서, 곽환소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라면, 괜히 나 때문에 힘을 뺄 필요는 없다. 우린 아직 강북에 도착한 것이 아니지 않으냐.”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문인께서 죽기는 왜 죽습니까! 제자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데, 장문인께서도 사셔야지요! 사셔서 강북에서 해남의 터전을 다시 잡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곽환소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나왔지만, 금양백은 그저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곽환소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이 얼마나 허망한 소리인지 말이다.

“환소야.”

“⋯⋯예, 장문인.”

“네가 있어 다행이구나.”

곽환소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쿨럭대며 기침을 한 금양백이 그를 돌아보았다. 낯빛이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질려 있었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분명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있으니 죽는 게 그리 무섭지는 않구나. 허허.”

“장문인⋯⋯.”

금양백의 입에서 뒤틀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죽으러 온 길이다. 더는 살아날 길이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칼춤이나 한번 추면 그만이라 여겼다. 그게 해남의 장문인으로서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의무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저 강을 넘어 해남의 이름을 이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 죽음이 두려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금양백은 곽환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울음을 애써 참는 곽환소의 모습이 믿음직스럽다고 하면⋯⋯ 이상할까?

‘많이 변했구나.’

곽환소에게선 이제 치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한 문파의 장문인이 되기에는 어리지만, 그 의무를 이행함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하지만 금양백은 목구멍으로 치미는 피를 억지로 다시 삼켰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야.’

아직 안전한 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넘어야 할 산이 남았다. 그가 이 질긴 목숨을 부여잡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 다 끊어진 목숨이라도 아직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강북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제자들이 살아남고, 해남의 이름을 다시 이어 갈 수만 있다면, 그는 전신이 천참만륙 나 죽는 순간에도 후회 없이 웃음을 터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알겠구나.’

가슴에 새겨진 삼파랑(三波浪)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힘껏 땅을 박찼다.

“마지막 힘을 짜내라! 이제 저 강만 넘으면 된다!”

“예, 장문인!”

울음 섞인 제자들의 대답을 들으며 금양백이 미소를 지었다.

‘목숨보다 중한 것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의 곁에 있었다. 이토록 확고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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