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6화. 꿈에서 깰 시간이란다. (1)
“⋯⋯지금 뭐라 했느냐?”
법계는 그를 바라봐 오는 법정의 시선에 어쩔 줄을 모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황망한 표정이 지금 법정의 심정을 절절히 말해 주는 듯했다.
“처, 천우맹이 장강을 도하해 강남 땅을 밟았다 합니다.”
법정은 무겁게 침묵했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법계가 굳이 묻지 않은 것까지 늘어놓았다.
“개방도들이 전해 온 소식에 따르자면, 도하한 천우맹이 해남과 합류, 강을 떠나 남하 중입니다.”
“해남을 만났다고?”
“⋯⋯예.”
“그런데 남쪽으로 향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강남으로 간 이유가 해남을 구하기 위해서 아니더냐! 그런데 해남을 만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남하하다니? 보고가 제대로 된 것이 맞느냐?”
“저, 정황을 보건대⋯⋯.”
법계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에 애써 침을 발라 보았다.
“화산검협을 비롯한 소수가 후방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천우맹주는 천우맹의 주력을 이끌고 그들을 구출하려는 듯 보인다고⋯⋯.”
법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강 쪽으로 향하는 그의 시선이 멍했다.
수로채의 선단은 물길을 타고 쾌속하게 장강을 가르고 있었다. 법정이 망연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고작 제자 몇을 구하기 위해서 천우맹 전체를 이끌고 사패련이 집결하는 강남으로 진입했단 말이더냐?”
“⋯⋯예. 그런 것으로⋯⋯.”
법정의 입에서 끝내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현종⋯⋯. 이 미친 작자가 기어코⋯⋯.”
다른 이들이 듣기라도 한다면 큰일 날 소리였다. 아무리 그가 소림의 방장이자 구파일방의 수장이라고는 하나, 천우맹의 맹주이자 화산의 태상장문인 현종을 두고 ‘미친 작자’라고 칭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법정은 지금 그 당연한 예의를 지킬 여력조차 없었다. 그는 현종에게 진력이 났다.
“대체! 대체 무슨 생각이냐! 대체!”
악을 쓰는 듯한 법정의 고함에 소림의 제자들이 놀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법계가 입술을 깨물고 그들에게 시선을 보내고 나서야 움찔한 소림의 제자들이 슬금슬금 법정이 있는 곳과 거리를 벌렸다.
“제자 몇이 아무리 중하다 해도, 어찌 고작 그 몇 안 되는 목숨 때문에 천우맹 전체의 명운을 건다는 말이더냐! 어찌 그런 머저리 같은 작자가 맹주 자리에 앉을 수 있단 말이냐!”
이해할 만한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현종이 저지른 짓도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로 법정을 미치게 하는 건, 그 미친 짓거리를 받아들인 천우맹의 다른 문파들이었다.
강남이 어떤 곳인가?
저 장일소의 사패련이 시퍼런 칼날을 벼리고 있는 땅이다. 더구나 지금은 장강 너머로 사패련이 집결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강을 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터였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그 쟁쟁한 문파의 수장들이 받아들였다는 말인가? 어째서?
“⋯⋯다들, 다들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법정은 계속해서 고민했다. 혹시나 그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강남에 진입하고도 무사히 돌아올 확실한 방법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놓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무언가를 더 고려하고 고민해 보기엔 너무도 명약관화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사패련은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고, 강 너머에는 천우맹을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았다.
화산이 강을 넘는 일이야 벌어질 수 있었다. 화산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짓거리를 해 왔던 문파니까.
하지만 천우맹 전체가 강을 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방장.”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법정을 보며 공동 장문인 종리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리 노하시는 것입니까?”
“⋯⋯.”
“물론 천우맹이 한 짓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만 놓고 보자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습니까?”
“나쁜 게 아니라 하셨소?”
“예, 방장.”
종리형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물론 예상치 못한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그 피해를 입는 것은 온전히 천우맹 아닙니까? 저 사패련도 제 땅에 천우맹을 들여놓은 채 하남으로 진격하지는 못할 터이니. 저들이 우리 대신 싸워 주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법정이 종리형을 노려보았다. 그 서늘한 눈빛에, 종리형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법정이 말했다.
“계속 말씀을 하시지요. 왜 말을 멈추십니까?”
“예?”
“그 와중에 천우맹이 전멸한다 해도 사패련에게 피해는 입힐 터이니 우리에게는 나쁠 게 없다, 이 말이십니까?”
“아, 아니, 제 말은 꼭 그런 건 아니고⋯⋯.”
종리형이 어색한 얼굴로 슬쩍 법정의 시선을 외면했다.
내심 그런 마음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협의를 지향하는 정파의 장문인데 같은 정파로 분류되는 이들의 죽음에 이해득실을 나눈다는 사실이 민망했던 것이다.
그런 종리형을 노려보던 법정이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는 사패련과 천우맹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이라 보십니까?”
“그야⋯⋯.”
종리형이 살짝 생각해 보다 입을 열었다.
“물론 천우맹이 더없이 강대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사패련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기는 것은 사패련이 되겠지요. 물론 사패련도 막대한 피해를 입겠지만⋯⋯.”
“피해?”
법정이 서늘한 어조로 되물었다.
“제, 제 말이 틀렸습니까?”
“대체 무엇을 보고 계시는 겁니까?”
“예?”
“천우맹에 무엇이 있습니까? 당가라고 해 봐야 대문파에 비하면 그 수가 절반에 불과하고, 남궁은 전력의 태반을 상실했습니다.”
“⋯⋯.”
“남만의 야수궁이 지원을 왔다고 하나 그들은 애초에 무력이 중원의 대문파에는 미치지 못하고, 빙궁은 소수만이 합류했지요. 녹림? 그 어중이떠중이들이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 그야⋯⋯.”
“헛된 이름값만 높은 곳! 지금 천우맹이 활용할 수 있는 힘은 제 명성의 절반도 되지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패군이 진을 치고 있는 적지로 뛰어든다는 게 정녕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겠습니까?”
법정의 눈에 핏발이 불거졌다.
“화산? 수도 얼마 되지 않는 그들이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전쟁이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은 한 줌 모래에 불과한 것을!”
종리형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이거 원⋯⋯.’
물론 법정의 말이 옳다.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천우맹에 속한 문파들은 하나같이 쟁쟁하지만, 그중 제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문파는 화산, 당가, 야수궁, 이렇게 셋에 불과하다.
약하다고야 할 수 없을 문파지만, 정말 그들만으로 사패련이라는 거대 연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전력의 약세, 적진, 그리고 패군이라는 세 요소가 조합되는 순간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법정이 노할 이유는 아니잖은가?
천우맹이 사패련에 참패한다는 사실이 뭐 그렇게 새삼 서글플 일이란 말인가?
종리형이 슬쩍 법정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저는⋯⋯ 방장께서 저들을 그리 아끼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에 법정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 답답한 작자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예?”
“만약 패군이 이 모든 상황을 유도했다면? 천우맹을 집어삼킨 저들의 다음 창끝이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종리형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건⋯⋯.”
“천우맹을 무너뜨리느라 피해를 감수했다 해서, 저들이 우리가 뻔히 지원을 구하고 사패련을 상대할 준비를 하도록 기다려 주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특히나 장일소라면 그럴 리가 없었다.
당연히 사패련의 상태를 돌보지 않고, 아직 집결하지 못한 구파를 치려 들 것이다.
“⋯⋯하남.”
“아시겠습니까?”
법정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연통을 보낸 이들은 호응이 없고! 이곳으로 오고 있는 지원은 전무합니다! 그 말은 저들이 천우맹을 이렇게 빨리 무너뜨린다면 강을 넘어오는 저들을 막아야 하는 건 바로 우리라는 겁니다, 우리!”
종리형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시선이 장강 위로 향했다.
강을 타고 이동하는 수로채의 선박들이 과연 누구를 실어 올 것인가? 당연히 천우맹을 무너뜨리고 사기가 한껏 오른 사패련의 군세일 것이다.
저 배들을 따라간다 해서, 강을 도하해 오는 그 개미 떼 같은 군세를 지금의 이 인원만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막을 수는⋯⋯.’
물론 천우맹과 싸우느라 전력을 소모한 사패련이라면 어떻게든 막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소림도 공동도 더는 그 이름을 이어 가기 힘들 지경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 이곳에 오지 않은 문파들만이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중원을 차지할 것이다.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수수방관한 대가로 말이다.
“그, 그런⋯⋯.”
종리형의 얼굴이 그제야 시퍼렇게 질렸다. 법정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더 강한 세력을 이기는 방법은 각개격파뿐입니다! 그리고 마침 정파는 셋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천우맹, 우리, 그리고 방관자들!”
“⋯⋯.”
“그런데 저 망할 천우맹은 사패련이 우리를 각개격파 할 여지를 준 것입니다! 아니, 한술 더 떠서 우리마저 외딴곳으로 밀어 넣은 것이외다! 모르시겠소이까!”
종리형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이제야 그가 얼마나 백척간두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래서⋯⋯ 이래서 머리가 여럿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거늘. 이래서 화산만은 머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거늘⋯⋯.”
법정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만일 그들과 천우맹이 강 너머를 철통같이 계속 지킬 수 있었다면, 사패련은 감히 강을 넘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늦지만 않게 따라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저 천우맹의 정신 나간 짓거리가 이 모든 상황을 뒤틀고 뭉개 버렸다.
“방장, 그럼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종리형이 묻자 법정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노기와 울분이 서서히 가라앉고 나니 무섭도록 차가운 이성이 돌아왔다.
이제 상황을 결정 지을 요소는 단 하나.
‘어느 쪽이냐?’
천우맹이 저지른,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저 장일소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저들의 행위는 장일소에게조차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는 이 상황까지 예상했을까?
전자라면 희망이 있다. 천우맹의 힘은 사패련이라도 쉬이 볼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저 장일소가 저들의 행동을 예측했다면? 아니, 예측을 넘어 이 모든 움직임이 이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장일소의 뜻이었다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렇다면 패군은 반드시 또 하나의 수를 준비해 뒀을 것이다. 피해 없이 천우맹을 무너뜨릴 수 있는 완벽한 수를 말이다.
타오르는 장강의 광경이 법정의 눈앞에 그려졌다. 거센 불길은 강을 넘어 강북으로 번져 나간다. 세상을 붉게 살라 먹으며.
“개방에 연통을 보내 저들의 위치를 다시 파악하라 해라!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확인해야 한다!”
“어, 어렵습니다! 그들도 움직일 상황이⋯⋯.”
“목숨 따위를 아낄 상황이 아니라는 걸 모르겠느냐!”
결국 법정의 입술에 이가 파고들며 핏물이 배어났다.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타오르는 그의 눈빛이 강 너머로 향했다. 이 중원의 운명이 결정될 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