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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05화 (1,406/1,567)

1405화. 더없이 훌륭했다. (5)

평소의 조걸답지 않은 반응이었지만, 딱히 그 부분을 꼬집고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그 몸에 입은 상처만 봐도 그가, 그리고 이들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헤쳐 왔는지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한 일을 겪었으면 아무리 천하의 조걸이라도 성격이 바뀔 만하⋯⋯.

“아니, 근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강을 넘으신 겁니까? 제정신이세요?”

아니네. 그래도 조걸은 조걸이네.

“걸아⋯⋯. 태상장문인께⋯⋯.”

“아니,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다가 걸렸으면 어쩌려고? 진짜 다 뒈졌을 텐데? 뭔 목숨이 두 개쯤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아닐 테고. 진짜 대책 없네, 이 양반들? 운이 좋아 산 거지, 만약 여기까지 오다 누구 눈에 띄기라도 했으면⋯⋯.”

청명이 조용하니 조걸이 야단이었다. 그때 현상의 등에 업힌 윤종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장로님⋯⋯. 저 새끼 쪽으로 조금만 가 주시면 안 됩니까⋯⋯. 손이 안 닿는데⋯⋯.”

“참거라, 윤종아. 그냥 둬도 곧 죽을 것 같은데.”

“⋯⋯그럼 다행입니다만⋯⋯.”

윤종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실 묻고 싶은 건 윤종도 조걸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어쩌다 강을 넘게 되신 겁니까?”

“어쩌고 말 것도 없었다. 장문인⋯⋯. 아니, 태상장문인께서 강을 넘어야 한다고 칼 빼 물고 날뛰셨다.”

“태, 태상장문인께서요?”

“그래. 얼마나 닦달해 대시는지.”

윤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른 오검 역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교환한 윤종이 앞에서 백천을 업고 달리는 현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영 장로님이 아니라 태상장문인께서?’

사실 현영이 그랬다고 하면 곧장 이해했을 것이다. 현영은 워낙에 직설적인 사람이고, 겉모습이야 차가워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앞뒤 재지 않고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다.

하지만 현종이 아랫사람들을 들들 볶고 닦달해서 강을 넘는 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문파 사람들까지 닦달했다고?

“그럼 태상장문인의 닦달을 다른 문파 분들이 다 받아들이셨단 겁니까?”

“받아들이기만 했겠느냐?”

현상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가주와 남궁의 장로께서는 되레 우리더러 늦다고 몇 번이나 타박하셨다.”

“⋯⋯.”

“게다가 원래 빙궁과 야수궁은 강북에 남기로 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뒤를 따라오고 있더구나.”

“예?”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는데 뭐라 하겠느냐. 그 와중에 다툴 수도 없고⋯⋯.”

윤종은 순간 눈앞이 다 아찔했다. 맹소와 한이명 덕분에 청명이 놈의 목숨을 붙여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그 두 사람이 이곳에 없을 수도 있었단 말이 아닌가?

현상이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말했다.

“참으로 공교롭지 않으냐?”

“⋯⋯그러네요.”

현상은 앞에서 경계하듯 달리는 맹소와 한이명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누구에게도 목숨을 걸어 달라 부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은 제 의지로 목숨을 걸더구나.”

“⋯⋯.”

“그리고 그들이 이곳에서 청명이 놈을 살려 내는 것을 보니, 참 여러 생각이 들더구나.”

윤종은 저도 모르게 현상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울림이 그의 속을 맴돌았다. 현상의 나직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울렸다.

“때로 청명이 녀석과 너희가 일을 벌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단다. 굳이 저러지 않아도, 굳이 날뛰지 않아도 편히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대체 무엇이 걱정되어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하고 말이다.”

현상의 시선은 이제 당군악이 안고 있는 청명에게로 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답을 본 기분이구나. 아마 저 녀석은 이런 광경을 보고 싶었던 거겠지.”

윤종도 현상처럼 청명의 등을 바라보았다.

‘천우맹이라⋯⋯.’

아무런 생각 없이 지은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청명이 녀석이 정말 간절히 바랐던 건, 위기가 있을 때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갈 수 있는 관계.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관계였다.

그러니 녀석도 그리 행한 것이다. 자신이 그리해야 다른 이들도 그리 해 줄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했던 그 무모한 행동이 이번엔 거꾸로 청명의 목숨을 구했다.

저들이 청명처럼 무모하게 목숨을 걸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벌써 산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 테니까.

이 상황을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윤종으로서는 단 한 글자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도(道)로군요.”

“⋯⋯그렇구나.”

자연히 그러한 것. 세상의 이치란 허망하게 보이지만, 결국은 옳게 나아간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운이 좋아.”

“⋯⋯그도 맞는 말이죠.”

유이설처럼 깔끔하고 명료하게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천운이든 뭐든, 수많은 것이 맞아떨어져 청명이 놈이 살 수 있었고, 그들도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아마 이 기억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저놈은 알까?’

청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어 주었는지 말이다. 물론 의식을 잃고 있으니 모르기야 하겠지마는.

그때 현종의 등에 업혀 있던 백천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감회에 빠질 때가 아니다.”

“⋯⋯예?”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쪽으로 만인방의 주력이 이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으냐?”

윤종이 입을 다물었다.

“호가명이라면 당연히 장일소에게 연락을 취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뻔히 알 테니까. 그 말인즉, 결국 강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만인방과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다.”

윤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현종이 담담한 목소리로 백천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만인방뿐만 아니라 흑귀보도 오고 있다고 하더구나.”

“⋯⋯흑귀보도 말입니까?”

“그래. 거기에 수로채도 장강을 타고 북상하고 있다. 뭐, 하오문이야 당연히 오지 않겠느냐?”

백천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 말은⋯⋯.”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우리 앞을 막아서는 것은 만인방이 아니다. 사패련 전체가 저 장강으로 집결하고 있다.”

현종 주변으로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천우맹을 만나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이들도, 목숨을 걸고 동료를 구해 내 한껏 고양되었던 이들도 이 순간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패련(邪覇聯). 아무리 억눌리지 않으려 해도 그 이름은 너무도 거대했다.

그 순간 조걸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직 놈들이 완전히 집결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흑귀보도 오고 있는 거고, 수로채도 북상 중인 거니까! 빨리만 가면 놈들을 전부 상대하지 않고도 강을 넘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건 당군악이었다.

“도장의 말이 맞네.”

“여, 역시 가주님.”

“서두른다면 가능할 걸세.”

“그럼 빨리 가야죠, 빨리! 사숙조! 뭐 하십니까! 빨리 달리셔야죠!”

조걸이 운검을 닦달하고 난리를 피웠다. 현상이 그 모습을 슬쩍 보더니 윤종에게 물었다.

“윤종아. 옆으로 가 줄까?”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제가 죽더라도 저 새끼는 죽이고 죽어야⋯⋯.”

그 너스레에 순간 분위기가 밝아졌다.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보던 당군악의 눈빛이 이내 슬쩍 어둡게 가라앉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이미 그들을 앞질러 간 만인방을 피할 도리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만인방의 주력에는 장일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제아무리 장일소가 대단하다고 해도, 그리고 만인방의 주력이 가진 힘이 미지수라고 해도⋯⋯ 만인방 단독으로 천우맹을 막아서기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녹림왕은?”

당군악이 고개를 돌려 임소병을 찾았다.

“저요?”

뻔뻔하게도 남궁세가 장로의 등에 업힌 임소병이 슬쩍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어찌 생각하는가?”

솔직히 툭 터놓고 의논하기에는 아직 껄끄럽지만, 청명이 의식을 잃은 상황에서 판 전체를 볼 수 있는 이는 임소병 외에 없었다. 머리 돌아가는 것만 따지자면 당군악도 몇 수 접어 줘야 하는 이가 임소병이기도 했고.

“흐음.”

별다른 질문 없이도 임소병은 당군악이 어떤 것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지 이해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냉정하게 봤을 때, 만인방이 단독으로 우리의 앞을 막아서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만인방을 움직이는 건 다름 아닌 그놈이니까요.”

당군악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가는 강하다. 남궁세가는 전력을 크게 상실했지만, 그럼에도 웬만한 문파만큼의 힘은 가진 곳이다. 소수만 온 빙궁은 조금 애매할 수 있겠으나, 야수궁의 힘은 웬만한 문파는 이름 내밀기 힘들 만큼 강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는 화산이 있다.

지금 천하에서 화산이 지닌 힘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두 사람이다. 하나는 당군악.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일소 본인이겠지.’

그는 결코 화산이 가진 힘을 평가절하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화산을 당군악 이상으로 높게 평가할지 모른다. 항상 그래 왔으니까.

“쉽지 않은 일이겠지.”

“예. 사실 멍청한 짓이지요.”

임소병이 부러진 부채로 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오히려 상대가 그 장일소이므로 교전은 벌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장일소는 손해 보는 걸 극히 싫어한다. 아무리 사패련의 이름이 걸린 일이라지만, 천우맹을 막기 위해 만인방의 전력을 모조리 갈아 넣는 짓은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순리대로 생각하자면⋯⋯ 흑귀보보다 늦게 도착하지만 않는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장강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순리대로라면 말인가?”

“예. 순리대로라면⋯⋯.”

순간적으로 당군악과 임소병의 얼굴에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뇌리에 동시에 떠오른 것은 한없이 오만한 얼굴로 천하를 비웃는 장일소의 얼굴이었다.

“⋯⋯쉽게 끝나지는 않겠군.”

“아마도.”

순리대로라면 교전이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장일소는 반드시 그들을 막아설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두고,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등에 칼을 찔러 넣는 게 바로 장일소다.

“어떻게 되든, 일단 서둘러야겠군.”

“예.”

당군악과 임소병의 얼굴에 각오가 서렸다.

장일소의 수는 예상할 수 없다. 천하의 누구도 그가 둘 수를 미리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놈이 둘 수 있는 수를 줄이기라도 해야 한다.

흑귀보와 수로채가 만인방에 합류하기 전까지 장강에 도달하는 것. 그게 지금 천우맹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다.

‘최악의 상황에는⋯⋯.’

당군악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달리는 모두가 보였다. 그 하나하나의 얼굴을 눈에 담은 후 제 품에 안긴 청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천우맹의 미래만은 반드시 이어야 한다.’

그게 먼저 산 이들의 의무이자 어른의 책임이다.

현종과 같은 뜻을 눈빛으로 교환한 당군악이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찼다.

‘장강까지 불과 한 시진!’

그들의 운명도 한 시진 안에 판가름 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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