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404화 (1,405/1,567)

1404화. 더없이 훌륭했다. (4)

“막는 놈은 죽는다!”

우렁찬 외침에 더해 그 손에 들린 검까지, 확실하게 그들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파아아앗!

벼락같은 검기가 만인방도들을 향해 쏟아졌다. 가공할 위력을 품은 공격에, 만인방도들은 차마 앞을 막아서지 못하고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으아아아압!”

붉은 매화검기가 물러나는 만인방도들에게 쏟아진다.

“이 개자식들아!”

“곽회, 이 새끼야! 자리를 지켜!”

“흥분하지 마라! 놈들을 쓰러뜨리는 게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물러서는 적을 향해 달려들려던 곽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더없이 분노했지만, 또 동시에 냉정했다. 지금 무엇을 위해 검을 떨쳐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한번 붉은 검기를 내뿜을 때마다 적들이 분분히 나가떨어졌다. 선봉에 선 화산이 뿜어내는 붉은 검기. 그건 다른 문파에게도 확실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화산을 따라라!”

전력을 다해 적들을 막아 내던 남궁세가와 새외오궁의 두 문파도 화산을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이 개자식들!”

살벌하게 공격해 대던 이들이 몸을 빼내려 하자 만인방도들의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아무리 물러나라는 명이 떨어졌다지만, 농락이란 농락은 다 당한 채로 적들을 고이 보내 주는 것은 치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들끓는 분노와 치기는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든 암기 앞에서 금세 식어 버렸다.

“엄호하라!”

쏴아아아아아!

독침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으⋯⋯!”

“이, 이런⋯⋯.”

스치기만 해도 살이 썩어들어 갈 만큼 무시무시한 극독을 머금은 침. 저 독침의 빗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이는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광인뿐일 것이다.

“터뜨려라!”

퍼어어엉! 퍼어어어엉!

독침의 비가 적들을 밀어 내며 생긴 공간으로 검은 독연이 연이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무, 물러나라!”

“숨을 멈춰! 빌어먹을, 뒤로 물러나!”

사파는 본디 독에 익숙하다. 그들 역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병기에 독을 바르고, 독탄 던져 대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시야를 뒤덮은 건 그들이 사용해 왔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맹독이었다.

천하 독의 조종인 사천당가. 그들의 독이 어떤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몸소 확인하고 싶어 하는 정신 나간 이는, 단언컨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독침과 독연으로 이루어진 벽이 생겨났다.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벽 아닌 벽이 만인방도들의 앞을 완전히 차단했다.

“이 틈에 가십시오! 뒤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용기백배한 이들이 당가를 두고 달려 나갔다. 그 순간에도 당가의 가솔들은 철탑처럼 자리를 지켰다. 손에 든 암기를 꽉 움켜쥐며 독연 너머의 만인방도들을 응시했다.

“아군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 우리도 이탈한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라!”

“예.”

명령을 내린 당가의 장로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설마 우리가 이런 역할을 자처하게 될 줄이야.’

제 가문의 안위 외에는 관심을 주지 않는, 피도 눈물도 없는 가문. 그게 사천당가에 대한 천하의 평가였다. 그리고 사천당가 역시 굳이 나서서 그 평가를 부정할 생각 따윈 없었다.

한데 그랬던 그들이 지금 다른 문파들을 위해 후위를 자처하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당가도 참 많이 변했구나.’

사천에 화산검협이 찾아오고 원로원을 몰아내며 생겨난 흐름. 그 변화가 지금 당가의 정체성마저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로군.”

미소를 지은 당가의 장로가 손안의 비도를 꽉 움켜잡았다.

“구, 군사! 놈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이탈 중입니다!”

당연한 보고가 연신 귀를 때리듯 쏟아졌다. 호가명은 ‘나도 눈이 있다.’ 하고 일갈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눌렀다.

놈들이 멀어지고 있다. 갑자기 밀려들어 해안을 농락하고 떠나 버리는 파도처럼.

호가명의 시선은 자욱한 독연 너머의 한곳에 가 있었다.

검은 무복 차림의 화산 검수들이 철통처럼 둘러싼 곳. 그가 그토록 숨통을 끊어 놓으려 했던 매화검귀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도리가 없군.”

호가명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능력이 닿는 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 순간 저 매화검귀는 또다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제 실력으로, 그 귀신같은 판단력으로, 나아가 이해할 수 없는 천운까지 다 동원해서 말이다.

호가명은 완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저자를 잡을 수 없음을.

“부상자들을 끌어내라. 내버려 두면 독에 중독되어 죽을 테니.”

“구, 군사!”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추적에 나설 것이다.”

그 말에 부관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 순간, 호가명은 그들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인정했다. 결국 매화검귀 하나를 잡기 위해 감수했던 모든 희생이 개죽음으로 화해 버렸다는 의미다.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던가? 해남부터 이곳까지 죽은 이는 수백이 넘는다. 그런데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는 고작 해남파 제자를 반절쯤 잡은 것에 불과했다.

패배는 이미 수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껏 만인방의 역사를 모두 통틀어도 이토록 뼈아픈 패배는 없었다.

“전열을 정비하라고 하지 않았나.”

호가명이 다시 차게 명령하자 부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럴 수밖에. 전략을 짜고 이행하는 이라면, 이번 일로 얼마나 큰 것을 잃었는지 알 수밖에 없으니까.

상실한 전력 같은 건 정말로 그들이 잃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끔찍한 사실은, 그들이 직접 저 매화검귀에게 결코 무너지지 않는 완벽한 위상을 쌓아 줘 버렸다는 것이다.

강남을 종단하여 해남을 구출하고, 만인방의 추적을 따돌리며 강북으로 돌아왔다는 위업.

그 과정에서 매화검귀가 선보였던 수많은 일들은 이제 신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매화검귀는 그 신화의 주인으로서 사패련과 다시 맞설 것이다. 매화검귀가 존재하는 곳마다 정파 놈들의 사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이고, 그를 상대해야 하는 만인방도들은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전략을 논하는 이들을 알 수밖에 없다. 무너지지 않는 위상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그들은 만인방의 가장 완벽한 천적이 될 이를 그들의 손으로 완성하고 만 것이다.

호가명이 슬쩍 부관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의 표정만으로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멍청한 놈들, 호가명은 속으로 혀를 차며 짧게 말했다.

“다 끝난 것 같으냐?”

“⋯⋯.”

“물론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는 추적을 이어 간다고 해도 놈들을 저지할 수 없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

냉정한 평가가 쏟아지자 부관들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호가명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 지금 저들이 향하는 곳으로 련주님께서 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었느냐?”

그 말에 부관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놈들은 분명 대단하다. 하지만 잊지 말도록. 이제부터 저들이 상대해야 할 이는 다름 아닌 패군 장일소다. 우리는 그저 련주님의 손에 들린 장기짝에 불과하다. 그리고 장기짝에게 패배 따위는 없다!”

사기를 북돋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부관들의 눈에는 조금 전까지 없었던 생기가 피어났다.

맞는 말이었다.

그들은 패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만인방이되 만인방이 아니고, 사패련이되 사패련이 아니다. 장일소가 없는 만인방은 만인방일 수 없고, 장일소가 없는 사패련은 사패련일 수 없으니까.

“움직여라. 련주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내다보고 계실 것이다. 어쭙잖은 자책으로 그분의 계획을 어긋나게 하는 이들은 내 손으로 찢어 죽일 것이다!”

“예, 군사!”

부관들이 벼락처럼 움직여 반쯤 무너져 버린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호가명이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멀어지는 천우맹의 군세를 보았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실패고, 분노조차 일지 않는 완벽한 패배다.

이런 상황 속, 호가명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조금 엉뚱한 것이었다.

‘련주께서는⋯⋯.’

어찌 예측하셨을까?

그가 매화검귀를 잡을 거라고 여기셨을까? 아니면 결국은 실패할 것이라 여겼을까?

호가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할 필요 없다. 그는 그저 제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서둘러라. 한시바삐 전열을 재정비하고 놈들을 추적한다!”

그는 그저 일개 장기짝.

장기를 두는 이의 의중을 짐작할 필요 없다. 그가 아무리 고민해 봐야 장일소의 의지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테니까.

호가명은 그저 마지막으로 몸을 빼는 당가를 시리디시린 눈으로 보았다.

❀ ❀ ❀

“아, 아악! 아픕니다!”

“엄살떨지 마라, 이놈!”

운검은 제 등에서 비명을 지르는 조걸의 등짝을 검집으로 후려쳤다. 조걸이 꺄악 비명을 질렀다.

“주, 죽는다니까요?”

“끄응.”

운검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구하기 전까지는 눈물이 자꾸 나서 참기가 어려웠는데, 막상 구해 내고 나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응?”

“강북에 계셨잖아요.”

조걸의 물음에 다른 오검도 마침 궁금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살기는 했지만, 천우맹이 도우러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장강을 넘는 것이야 결단의 영역이지만, 그 장강 너머에서 그들을 찾아내는 건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운이 좋았지.”

“예?”

운검이 고개를 내저었다.

“맹주님께서 결단을 내리셔서 도하하기는 했다마는⋯⋯ 솔직히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던 차였다. 그런데 저놈이 갑자기 미친 듯이 달리더구나.”

“저놈이요?”

“저놈.”

운검이 뒤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가 가리킨 건, 당군악이 안고 있는 청명. 정확히는 그런 청명의 목에 들러붙은 백아였다.

“아, 백아! 백아가! 저놈이 우리에게로 안내한 겁니까?”

“아니.”

“⋯⋯예? 그럼요?”

“놈이 안내한 곳에서 해남을 만났지.”

“⋯⋯.”

“영물, 영물 하더니 대단하긴 하더구나. 그 잠깐 만났던 이들의 냄새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우리가 만난 건 장강 어귀에 도착해서 도하할 시점을 노리던 해남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는 지체 없이 이곳으로 안내를 했지.”

“아, 아니, 어떻게?”

조걸의 말에 대답한 건 다름 아닌 그의 옆을 달리고 있던 곽환소였다.

“이상할 게 뭐가 있습니까? 지금껏 수없이 써 왔던 표식인데.”

“⋯⋯어?”

“자양이 녀석을 같이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놈이 계속 표식을 남겼던 겁니다. 저희는 그 표식을 보고 추적했던 거고요.”

“아, 아니, 그 양반은 중간쯤에 낙오했는데?”

전력으로 내달리느라 무위가 약한 이자양마저 챙길 수는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지척까지만 오면 백아 녀석이 너희를 찾을 수 있으니까.”

“아⋯⋯.”

조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어 버렸다.

서로 말을 해 둔 것도 아닌데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필연에 필연이 겹쳤다.

천우맹이 목숨을 걸고 강을 넘지 않았더라면, 해남이 이자양을 그들에게 붙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미 지옥을 건넜던 해남에게 다시 한번 지옥으로 뛰어들 용기가 없었더라면 이미 그들은 산 사람이 아닐 테니까.

“그런⋯⋯.”

“왜 그러느냐?”

“아뇨, 아뇨. 그냥⋯⋯.”

조걸이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냥요.”

그들이 한 모든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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