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1화. 더없이 훌륭했다. (1)
“전방에 적! 적입니다, 군사!”
“화산입니다!”
“화산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군사아아아!”
다급한⋯⋯. 아니, 처절한 절규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절규는 호가명에게 닿지 못했다. 돌처럼 그 자리에 굳은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달려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왜?’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직면한 호가명은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왜 천우맹이, 화산이 이곳에 있는가?
알 수 없었을 텐데. 아무리 장강을 넘었다고 한들, 이 넓은 강남 땅에서 저들의 종적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어째서⋯⋯.”
입술을 비집고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넋두리처럼 흘러나왔던 소리는 마침내 고함이 되어 터져 나갔다.
“어째서어어어어어어어!”
숲이 통째로 울렸다.
발소리가 지축을 뒤흔들고, 그 울림과 함께 일백에 달하는 화산 문도들이 하나가 되어 돌진했다. 그들의 눈에 실린 분노가 화산의 검들을 위협하던 만인방도들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니다.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직 한곳을 향해 달려가는 모두의 의지가 자연스레 그들의 진형을 하나의 형태로 완성해 냈다.
적을 꿰뚫는 쐐기 형태. 아니, 오히려 곧게 뻗은 검에 가까운 진형을 갖춰 낸 화산의 검수들은 폭발할 듯한 기세 그대로 만인방의 포위망을 향해 쏘아졌다.
“오, 온다!”
“마, 막아⋯⋯. 아니! 피해! 피해라아아아아!”
곳곳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마치 수라(修羅)처럼 살기를 내뿜으며 짓쳐 달려드는 외팔의 검수와 맞닥뜨려야 했다.
“오오오오오!”
붉은 검기를 머금은 매화검이 들끓는 분노를 싣고 적도의 목을 쳤다.
파아아아앗!
공포로 표정이 일그러진 채 베여 나간 만인방도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한 사람의 목숨을 순식간에 끊어 낸 운검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돌입하라아아아아아!”
콰아앙!
땅을 거세게 박찬 현상이 검을 펼쳤다. 붉은 검기가 매화처럼 사방으로 번지며 피어났다.
“무, 물러⋯⋯. 크아아아아악!”
만인방도들이 속수무책으로 검기에 꿰뚫린다.
선두에 선 둘의 검은 강했다. 그리고 연이어 쏟아지는 화산 문도들의 검은 그 이상으로 강력했다.
파아아아앗!
붉은 검기가 연신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선두가 나아가는 길을 따라 연이어 붉은 매화가 피어나는 광경처럼 보일 것이다.
실로 아름답고, 환상적인 광경.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품은 것은 치명적인 칼날이었다.
서걱! 서걱!
꽃잎처럼 하늘거려서 한없이 여려 보이는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할 때마다 적들의 육신에는 여지없이 시뻘건 상흔이 피어올랐다.
“으아아아아아악!”
화산 검수들의 눈에선 새파란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들의 눈에 똑똑히 박혔기 때문이다. 전신에 상처를 입은 채 죽어 가고 있는 그들의 사형제가.
으드득!
누구 하나 소리 높여 적을 성토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주변을 독려하지 않는다. 대신 넘치는 분노와 증오를 칼날에 남김없이 담아 냈다.
내지르는 고함조차도 사치다. 지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피 흘리고 있는 그들의 형제를 구해 내는 것뿐이다.
파아아아아앗!
벼리고 벼린 붉은 검기가 사정없이 적들을 유린했다. 하나의 붉은 검이 된 화산의 검수들은 앞으로, 오직 앞으로만 나아갔다.
“마, 막아라! 앞을 열어 주지⋯⋯.”
콰드드득!
당황하여 고함을 지르려던 이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눈조차 감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한 이의 입에는 시커먼 독비(毒匕)가 박혀 있었다.
“도, 독이다!”
“당가 놈들이다! 아악! 고개 숙여!”
파아아아앗!
어떻게든 전열을 정비해 보려 했지만, 머리 위로 수많은 비침이 날아들고 시커먼 독분이 터지니 도리가 없었다. 만인방도들의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엄호해라! 화산의 발을 잡게 두지 마라!”
당잔의 외침에 당가인들이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앞에서는 화산의 문도들이 하나의 검이 되어 쏘아지고, 머리 위에서는 독의 조종 당가가 날리는 암기와 독이 비산한다.
실로 지독한 조합이었다. 해남에서 이곳까지 추격전을 벌이며 힘을 거의 소진해 버린 만인방이 아니라 만전의 만인방이라 해도 상대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왜, 왜 여기에 화산 놈들이!”
“미, 밀지 마, 빌어먹을!”
물러나려는 이들과 어떻게든 항전하려는 이들, 주춤대는 이들까지 뒤엉키며 진형이 허물어져 갔다.
붉게 피어나는 매화 주변으로 녹빛 섬광이 수놓인다.
그때 만인방도 하나가 외쳤다.
“빌어먹을! 당황하지 마라, 그래 봐야 몇 놈 되지 않는⋯⋯!”
콰아아아아아앙!
하지만 그의 몸은 이내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백색 검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하늘빛 무복을 갖춰 입은 검수들이었다.
“소가주를, 맹도들을 구해라!”
“복명!”
매화의 숲 위로 푸른 하늘이 드리워진다. 창천이라는 이름에 더할 나위 없이 걸맞은 남궁세가 검수들이 전력을 다해 만인방도들을 향해 쇄도했다.
“궁주! 지금 도착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시린 얼음 같은 흰 무복을 입은 검수들과, 야수궁주 맹소를 필두로 한 야수궁의 전사들도 달려왔다.
“만인방 놈들을 쓸어내라!”
“예!”
하늘까지 울려 퍼질 듯 우렁우렁한 맹소의 고함과 함께 야수궁도들이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가열하게 돌진했다.
서로를 친구라 부르는 이들. 자신을 스스로 맹도라 부르는 이들이 이곳에 집결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이들을 지켜 내기 위해.
그리고.
“화산검협을 구해라! 지금이야말로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때다!”
“예!”
해남 장문 금양백의 외침과 함께 곽환소를 필두로 한 해남의 제자들도 전력을 다해 돌진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이지만, 그 입으로 협을 논하고, 그 검으로 정의를 논하는 이라면 숨이 끊어진다 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한뜻으로 뭉친 이들이 벼락처럼 적들을 향해 내달렸다.
“빌어먹을! 왜 여기에⋯⋯!”
“막아라! 막⋯⋯.”
발작처럼 도를 휘두르는 적들에게로 연신 검이 날아든다.
파아아아악!
잘린 목 하나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단 한 줌의 자비 없이 일 검에 적의 목을 날려 버린 현종이 매화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아이들이 바로 저기에 있다.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힘이 다 빠져 몸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며 현종의 가슴속에선 생애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지독한 분노가 일었다.
누구인가?
감히 저 아이들이 피 흘리게 만든 이가 누구인가?
파아아아앗!
강대한 내력을 머금은 검이 물러서는 만인방도들을 단숨에 양단했다. 뜨뜻한 피가 튀며 백발을 물들였지만, 현종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피로 물든 길을 걸었다.
이것은 그가 망설인 데 대한 대가다.
그가 흘렸어야 할 피를 아이들이 흘리고 있다.
진정 누구인가? 저 아이들이 피 흘리게 한 이들은?
콰아아아아아아앙!
극성으로 전개된 자하신공.
어마어마한 검기가 전방으로 떨어지며 서 있기도 힘들 만큼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서걱!
그 순간 측면에서 날아든 도가 현종의 뺨을 스쳤다.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튀었지만, 현종은 작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를 진정 고통스럽게 하는 건, 이런 늙은 몸뚱이에 새겨지는 상처 따위가 아니다.
아이들의 몸에 남은 생채기 하나, 이곳에서 흘린 피 한 방울이 모두 하나하나 녹이 슨 비수처럼 현종의 심장에 박혔다.
“으, 으아아!”
콰아아아앙!
적을 일격에 양단해 버린 현종이 땅을 박찼다.
“태상 장문인을 엄호해라!”
화산의 검수들이 일사불란하게 현종의 좌우로 움직였다.
굳이 말로 꺼내서 풀지 않아도 그 의지가 전해진다.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보는 곳이 같다.
“마, 막아⋯⋯.”
콰득! 콰득! 콰득! 콰득!
현종의 앞으로 달려드는 이들의 정수리에는 녹빛 섬광이 어김없이 박히고 들었다.
싸늘한 시신이 되며 허물어지는 이들 사이로 현종은 나아갔다. 검에서 붉은 검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상!”
“예!”
무각주 현상이 그의 검이 되어 적을 몰아쳤다.
“운검!”
“예!”
백매관주 운검이 그의 방패가 되어 달려드는 이들을 단번에 밀쳐 냈다.
현종은 그 길로 나아간다. 화산의 검들이 뚫어 내고, 화산의 방패들이 막아 낸 길로. 그 모든 이들이 한 의지를 담아 열어 낸 길로.
콰아아아아앙!
그리고 다름 아닌 그의 검으로 부순 길을 향해 현종이 나아갔다.
저벅. 저벅.
점점 현종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진다.
저벅.저벅.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그의 발이 완전히 멈추었다.
막아서는 이들을 모두 뚫고 이곳에 온 현종은 앞에 있는 이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자꾸 눈앞이 흐려졌다. 입술을 조금만 열어도 울음이⋯⋯. 아니, 통곡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저벅.
조금 더 가까이 나아간 현종은 제 손에 닿는 어깨를 묵직하게 툭 두드렸다.
“장⋯⋯.”
조걸이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장문⋯⋯.”
윤종도, 당소소도, 유이설도.
여전히 그 검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어깨를 하나하나 짚은 현종은 이내 가장 뒤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사람 앞에 섰다.
그렇게 잠시간 말이 없이 바라만 보았다.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청명을 보호하듯 움켜잡고 있는 백천을.
가슴이 미어진다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현종이 떨리는 손을 뻗은 찰나, 백천이 움찔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 바람에 현종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태상장문께⋯⋯ 고합니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몸을 수습한 백천이 현종을 향해 예를 표했다.
“대화산파⋯⋯ 장문대리 백천, 명을 완⋯수하지는 못했으나⋯⋯.”
“⋯⋯.”
“⋯⋯화산의 의지에⋯⋯ 어긋나지 않게 이행하였습니다.”
멈췄던 현종의 손이 다시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백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제 더는 떨리지 않는 손이 백천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더없이.”
“⋯⋯.”
“더없이 훌륭했다.”이번엔 백천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 떨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진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눈가에 맺힌 눈물과 한없이 인자하여 보는 사람을 절로 안심시키는 미소였다.
“뒤는⋯⋯ 내게, 사형제들에게 맡기거라. 이제 우리가 왔으니까.”
적을 짓뭉개며 달려든 화산의 제자들이 상처 입은 제 사형제들을 호위하듯 둘러쌌다.
단호한 의지가 서린 등을 보며, 백천은 결국 억누르고 또 억눌렀던 것을 놓고 말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이내 피가 말라붙은 뺨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명을 받듭니다, 태상장문인.”
청명이 혼자가 아니듯이, 그들 역시 그들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다. 그들이 가야 할 곳.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이 그들을 찾아 이곳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