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화.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5)
“우측에서 온다!”
백천의 목소리가 터지기 무섭게⋯⋯. 아니, 그보다도 먼저 남궁도위가 허공을 날아 백천의 우측으로 이동했다.
“오오오오오!”
새하얀 광채가 눈부시게 뿜어졌다.
콰아아아아아!
폭포처럼 쏟아진 검기가 달려드는 이들을 분쇄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광경이었지만 만인방도들은 제 동료의 몸이 바로 옆에서 으스러지고 있음에도 주춤하는 일 없이 아득바득 달려들었다.
“이, 이익!”
남궁도위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든 적들은 그가 보이지도 않는 듯 지나쳐 백천이 안고 있는 청명을 향해 도격을 날렸다.
“이 개자식들이!”
악에 받친 남궁도위의 검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허리가 끊어지면서도 만인방도들은 도 휘두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남궁도위가 눈을 부릅뜬 그 순간, 설소백이 청명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 냈다.
“으아아아아아압!”
새하얀 한기를 품은 설소백의 검이 적의 목을 뚫었다. 한기에 침식당한 만인방도의 육체는 금세 허연 서리로 뒤덮였다.
“소궁주!”
“제가, 제가 막겠습니다! 앞을!”
설소백이 이를 악물고 남궁도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눈에 어린 간절함을 본 남궁도위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만인방도들은 오로지 청명을 향해서만 죽어라 달려들고 있다.
언제나 보던 광경이지만 그 기세가 이전에 보던 것과는 뭔가 달랐다. 저건 광기에 찬 사람이라기보다는 겁에 질린 이들 같다.
알 것 같았다.
‘저들도 두려운 거야.’
이곳에서 청명을 살려 보낸다는 게, 그리하여 청명이 다시 의식을 차려 그 검을 들어 올리고 맞설 수도 있다는 게 너무도 두려운 거다.
저들은 대체 청명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제 죽음보다 청명의 생존을 더 두려워하게 된 걸까?
“흐아아아아아!”
짐승의 괴성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반대편에서 적들이 밀려왔다.
사아아아악!그들을 맞이한 건, 어느새 뒤로 돌아와 맹렬한 검을 휘두르는 유이설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그녀의 검이 스친 곳마다 붉은 피가 꽃처럼 피어났다. 하지만 목이 반쯤 베인 이도, 허벅지가 통째로 잘려 나간 이도 그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이.
카아아아앙!
한 만인방도가 내장을 쏟아내며 휘두른 검이 청명에게 채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갔다.
으득.
충격으로 인해 백천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완벽하게 막았다. 하지만 제 몸이 흔들리는 것까지는 백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지금 청명은 작은 충격만으로도 숨이 끊길 수 있다.
“더 철저하게 막아, 빌어먹을! 아예 무기를 휘두르게 두지 마라!”
대답은 없었다. 아니, 대답 같은 건 필요도 없다.
이미 모두가 같은 마음이니까. 제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청명을 살려낸다. 애초에 이 강남을 거슬러 내려갈 때부터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오오오오오!”
혜연의 장력이 넓게 펼쳐지며 달려드는 이들을 사정없이 떠밀었다. 그 앞으로 뛰어든 당패의 비도가 빛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윤종아!”
“압니다, 사숙!”
윤종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허공에 커다란 매화 그림자를 피워 냈다.
‘청명아!’
적을 베고 강하하는 그 짧은 찰나에마저 윤종은 고개를 돌려 청명의 상태를 확인했다. 얼굴을 뒤덮은 채 말라붙은 피,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하기만 했다.
으드득.
윤종은 입술을 짓깨물며 몸을 회전시켰다. 검기가 줄줄이 뿜어졌다.
적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달려든다. 기세 좋게 달려 나가던 오검의 발은 이미 멈춘 지 오래다. 청명에게 달려들어 오는 적을 밀어 내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에서 여력을 모조리 소모할 판이었다.
“이거⋯⋯.”
순간 임소병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된통 걸렸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찾는 건 이들 사이에 있을 호가명이었다. 하지만 호가명의 모습은 인파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만인방도들이 앞을 막으려 들었다면 뚫고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청명을 노린다면 막아 낼 도리가 없다. 백 명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한 사람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니까.
그 혼란한 와중에도 이쪽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철저하게 노린다. 그래서 호가명이 무서운 것이다.
‘탈출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청명을 버리고서라도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청명이 다소간의 상처를 입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달려 나가야 한다.
그래, 그게 옳다. 군사로서 당연히 내놓아야 할 의견이다.
하지만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 백천의 등이 눈에 걸렸다. 조금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는 굳건한 등이.
입이 저도 모르게 다물리고 말았다.
‘알고 있겠지.’
그래. 임소병이 아니라도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친 듯 밀려오는 적들, 의식 없는 청명을 향해 연이어 쏟아지는 공격.
이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눈을 감아 버린다면, 모른 척 그 공격을 내버려 둔다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럼 제 목숨 하나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망설이지 않는다. 제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청명이 죽는 꼴은 볼 수 없다는 듯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짜내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임소병의 시선이 백천이 안은 청명에게로 향했다. 멍청하고 무모한 짓만 반복해 온 이.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던 이.
임소병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군사고 나발이고⋯⋯.”
애초에 전략을 논할 거였다면 여기까지 온 것부터가 실수다.
‘이래서 나 같은 놈은 마지막엔 쓸모가 없다니까.’
땅을 박찬 임소병이 청명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부채로 쓸어내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호가명.’
패배는 언제나 쓰디쓰다. 하지만 이번 패배는 딱히 전처럼 속이 쓰리지만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에는 이기는 거보다 나은 패배도 있는 모양이다.
“나부터 죽여 봐라! 이 더러운 사파 새끼들아!”
임소병이 악을 쓰며 부채를 휘두르자 새파란 선기(扇氣)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 그의 활약을 지켜보던 백천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사방이, 온 세상이 적으로 채워진 것만 같다.
하지만 백천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느낀 건 그저 안쓰러움뿐이었다.
‘이게 네가 보던 광경이구나.’
이런 곳에서 홀로 싸우며, 대체 어떤 심정으로 검을 휘둘렀을까? 어떤 심정으로 버텨 냈을까?
“넌 항상 사람을 짜증 나게 한다니까.”
백천이 피식 웃는 순간 그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시커먼 독분이 사방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백천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막아 내라!”
“오오오오오오오오!”
혜연이 곧장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손이 수백, 수천 개로 불어났다. 허공이 황금빛 손으로 뒤덮이는 광경은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연이어 터지는 독분은 그런 혜연의 장력마저도 비집고 들어왔다.
콰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뛰어든 남궁도위가 검기를 쏟아냈다. 막대한 검기가 독분을 휘감아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렇게 한 번! 또 한 번! 다시 한번!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남궁도위는 멈추지 않고 단전이 터지도록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빚진 목숨!’
그의 목숨은 애초에 그의 것이 아니다. 아낄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파아아아앗!
그가 날린 검기 아래로 화산의 붉은 매화가 우수수 피어났다.
매화가 필 리 없는 땅임에도, 마치 저 먼 섬서의 어느 척박한 산처럼.
콰아아아앙!
“큭!”
“소궁주!”
“돌아보지 말고 싸워요! 앞을 봐!”
염려하는 목소리에 설소백이 발작하듯 외쳤다. 검으로 반응하기에 늦어 버린 도기를 몸으로 틀어막은 대가로 그의 가슴은 쩍 벌어진 채 피를 쏟고 있었다.
그러나 설소백은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날아드는 도기를 재차 후려쳤다.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이따위 상처야 열 개를 더 입어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청명은 다르다. 그는 지금 작은 상처 하나로도 목숨이 위험하다. 그런데 우는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다.
“죽어라아아아아아!”
하지만 상처로 살짝 움직임이 늦어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든 적이 설소백을 뛰어넘었다. 청명에게 도를 찔러 넣으려는 그 움직임에, 설소백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 순간, 누군가의 팔이 청명의 앞을 막아섰다.
콰득!
도가 뼈까지 박히는 소리와 함께 피가 울컥 쏟아졌다.
“유 도장!”
설소백이 악을 쓰며 검을 휘둘러 그 만인방도의 목을 쳐 냈다. 하지만 유이설은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다른 이들을 베어 내고 있었다.
쥐어짜 낸 내력과 한계까지 끌어 올린 집중력이 이젠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한계를 명백히 실감하면서도 누구 하나 의지를 잃지 않았다.
“커흑!”
어깨를 꿰뚫린 당패의 얼굴을 향해 푸른 도기를 품은 도가 맹렬히 떨어졌다.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뒤쪽에서 튀어나온 강철 부채가 떨어지는 도를 거세게 후려쳤다.
“정신 차려!”
“녹림왕!”
임소병이 이를 악물며 부채를 휘둘렀다. 항상 깔끔하게 얹혀 있던 그의 관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얼굴 역시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싸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죽어라아아아아아!”
그들의 기세가 주춤한 것을 눈치챘는지, 만인방도들은 더욱 공세를 더했다. 도가 닿지도 않을 거리에서부터 푸른 도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청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어림없다! 개자식들아!”
콰앙!
충격과 함께 조걸의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날아드는 도기를 남김없이 모조리 후려쳤다. 검과 도기가 맞닿을 때마다 내부가 진탕되고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검은 결코 멈춰 서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앙!
그때 누군가가 날린 장력이 조걸을 덮쳤다. 몸이 쏘아진 포탄처럼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걸아!”
그그그그극!
가까스로 검을 땅에 박아 넣은 조걸은 쓰러지지 않고 기어이 몸을 멈춰 세웠다. 피를 더 토해 내며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의식을 잃은 청명이 놈이 보였다.
“잘도 자네, 새끼⋯⋯.”
조걸이 히죽 웃었다.
“걸아! 일단 뒤로⋯⋯.”
“으아아아아!”
백천의 만류를 뿌리친 조걸이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입술을 깨문 백천이 청명을 향해 날아드는 창을 전력으로 쳐 냈다.
카앙!
동시에 백천은 몸을 빙글 돌렸다. 창 뒤에 숨어 은밀하게 날아들던 검은 비도 두 자루가 그의 등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지독한 고통이 번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백천은 청명의 몸 안으로 기운을 더욱 불어넣었다.
중과부적.
백천의 입에서 문득 웃음이 흘러나왔다.
세상은 그들을 두고 어찌 말할까?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키려다 죽은 영웅이라 부를까? 아니면 협의를 위해 사패련에 맞서다가 산화한 협사라 부를까?
‘아무래도 상관없지.’
둘 다 아니니까.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저 제 성질을 못 이겨 이곳까지 달려와 뒈지는 멍청이들일 뿐이다. 세상도, 문파도, 그 어떤 것 하나 지키지 못하고 목숨을 내던져 버린 얼간이다.
하지만⋯⋯.
“얼간이면 된 거지.”
자꾸 웃음이 새었다.
합리를 따지고 이론적으로 옳은 일만 할 거였다면 검 따위는 잡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백천은 그랬다. 지금 그는 스스로 원했던 곳에 있다. 그리고 스스로 원했던 결말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니 후회가 있을 리 있겠는가?
이 마음은⋯⋯ 속을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다들 같을 것이다.
콰득!
윤종의 허리춤에 박혔던 도가 쑥 빠져나왔다. 하지만 윤종은 신음도 내지 않고 그를 제치고 가려는 이의 등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 눈에 어린 것은 간절함, 오직 그것뿐이었다.
백천은 가만히 속으로 불러 보았다.
‘윤종아.’
“아아아아아압!”
어디를 어떻게 베였는지, 피투성이가 된 당소소도 악을 쓰며 적들을 찔러 대고 있다. 산발이 된 머리가 휘날릴 때마다 그녀의 두 눈에서 새파란 눈빛이 쏟아졌다.
‘소소.’
콰득! 콰득!
다리를 베인 조걸이 땅을 내구르며 적의 발등에 검을 연이어 박아 넣는다. 그 등판에 도기가 작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조걸.’
콰앙!
날아드는 장력을 막아 낸 유이설이 주르륵 밀려난다. 울컥 토해 낸 피가 그녀의 가슴팍으로 쏟아졌다. 검을 잡지 않은 팔이 들썩이다가 다시 툭 떨어졌다. 아마 팔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설아.’
그들만이 아니다.
쿠우우웅!
“스님!”
“오오오오오오!”
아수라처럼 날뛰는 혜연. 살계를 여는 걸 극히 꺼리던 그가 지금은 자신을 내려놓고 적을 막아 내는 것에 남은 힘을 모조리 쏟아붓고 있다.
‘혜연.’
콰아아앙!
남궁도위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진다. 설소백은 다급히 몸을 날려 그에게 쏟아지는 도기를 등판으로 막아 내었다.
창에 다리가 뚫리며 고꾸라진 당패는 그 와중에도 암기를 날리고, 부러진 부채를 내던져 버린 임소병은 이제 양손으로 장력을 미친 듯 뿜고 있다.
‘모두들⋯⋯.’
백천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렀다. 입술 새로 검은 피가 줄줄 쏟아졌다. 무리하게 끌어 올렸던 공력의 반동이 찾아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이 단전에서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백천은 청명의 몸에 내력 불어넣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떠냐. 이 망할 새끼야.”
백천이 피에 젖은 입술을 휘며 빙긋 웃었다.
“다들 너 하나 지키겠다고 이러고 있다. 그러니까⋯⋯ 다시는 꼴같잖게 외로운 척하지 마라. 혼자 뭘 하겠다고 나대지도 말고.”
지켜 줄 수는 없다.
그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지켜 낼 수 없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청명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같이 뒈져 줄 수는 있으니까.”
쿡쿡 웃어 버린 백천이 남은 힘을 모조리 청명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적에게 밀려난 이들이 피를 뿌리며 그가 있는 앞에서 나뒹굴었다.
백천은 만신창이가 된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적들도 그들의 한계를 직감했는지 살짝 기세를 늦추며 천천히 포위를 좁혀 왔다.
“미안하다.”
어째서인지 그 말이 흘러나왔다.
“지랄.”
그러자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사숙. 내가 선택한 겁니다.”
“애초에 사숙이 시킨 것도 아닙니다.”
“오만해.”
“난 원래⋯⋯ 좀 재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피투성이가 된 화산 제자들이 한마디씩 날렸다.
백천은 화를 내기는커녕 가볍게 웃었다.
“그래. 사과는⋯⋯ 이 새끼한테서 받자.”
“그건 받아야지.”
“저는 개 팰 겁니다. 죽을 때까지 팰 거예요.”
“⋯⋯지옥에나 떨어지라지.”
“그래도 도장한테⋯⋯.”
화산의 제자가 아닌 이들도 모두가 악담 하나씩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후회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의지뿐.
‘나쁘지 않지.’
백천은 웃었다.
그가 생각하던 죽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적당히 비굴하게 천수를 누리다 맞이하는 죽음 따위보다야 백배⋯⋯. 아니, 천배 나을 것이다. 적어도 스스로 당당할 수는 있을 테니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백천이 눈을 살짝 감았다. 마음속에 남은 죄송함을 묻어 둔 그가 이내 눈을 번쩍 뜨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화산의 제자다. 당당하게 죽어라!”
“예!”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적들이 악을 쓰며 몰려들었다.
“오오오오오오오!”
만인방도들의 도기가 일시에 폭포처럼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막아 낼 수 없는 공격. 백천이 눈을 부릅떴다.
똑똑히 지켜볼 것이었다. 마지막 한 사람의 최후까지. 그게 그에게 남은 마지막 사명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본 것은⋯⋯ 한 줄기 녹빛 섬광이었다.
콰드드드드드득!
고막을 통째로 찢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달려들던 적들이 폭주하는 수레에 치인 것처럼 튕겨 나갔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쏟아지던 도기 역시 찢기고 으스러졌다.
‘⋯⋯뭐?’
당황한 백천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완전히 늦지는 않은 모양이군.”
백천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익숙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
왜 저기에 저 사람이 있는가? 꿈인가?
오연하게 흔들림 없는 자세로 선 그의 냉막한 얼굴엔 분노가 한기처럼 서려 있었다.
이윽고 그 옆으로 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아⋯⋯.”
그 모습을 본 화산의 제자들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 검은 무복, 가슴에 새겨진 매화, 그리고⋯⋯ 추상과도 같은 기도에, 정제된 분노.
그의 시선이 중앙에 있는 백천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백천의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꿈도, 환상도 아니다.
“화산 제자들에게 명한다!”
“장문이이이이이이이인!”
백천의 입에서 절규와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적을 섬멸하고!”
하늘 높이 치솟았던 현종의 검이 단호히 앞을 겨누었다.
“화산의 제자들을 구해 내라!”
“복명!”
운검과 현상이 선두로 짓쳐 달려들며 뛰어올랐다. 그 뒤로 화산의 검은 무복을 입은 제자들이 터질 듯한 분노를 머금고 내달렸다.
메마른 강남 땅에 붉은 매화가 꿈처럼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