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8화.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3)
의식 잃은 청명의 어깨를 움켜잡은 채, 백천은 손을 잘게 떨었다.
살아는 있는 걸까? 숨은 쉬고 있는 걸까?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미약한 열기가 금방이라도 식어 버릴 것 같았다.
‘청명아⋯⋯.’
그에게 청명은 태산과도 같았다.
결코 흔들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사람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해서도 안 되는 그런 태산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 태산 같았던 이는 당장 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을 입은 채 의식을 잃었다.
왜 때로 잊게 되는 걸까.
이놈 역시 사람이라는 걸. 그들과 똑같이 상처 입고 고통을 느끼며 고민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다.
청명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댄 백천이 그의 몸 안으로 기운을 불어넣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백천이 이미 의식을 잃은 청명에게 속삭이고는 그를 끌어당겼다.
치미는 것들을 꾹 누르는 듯한 백천의 시선이 청명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차가운 가면이 깨어진 듯한 표정으로 이곳을 응시하는 호가명이 있었다.
호가명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명 당혹감이었다.
‘어떻게⋯⋯.’
분명 저자는 조금 전까지 그의 감각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공간을 격한 것처럼 한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호가명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목을 잃고 쓰러진 십비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무리 호위와 암살이 전문이라 해도, 십비 정도면 강호 어디에 내어 놔도 부족할 게 없을 만한 무위를 갖춘 실력자다.
그런 이를 단 일 검에 처리한 것이다.
물론 호가명은 그리 대단한 무인까진 아니니 그의 이목을 속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십비의 목을 일격에 베어 내는 것 역시 그렇게 난해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호가명이 파악하고 있던 백천의 무위로는 그게 불가능하단 점이었다.
그 짧은 시간 만에 저놈의 무위가 급격하게 상승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호가명은 백천의 형형한 시선을 마주하며 중얼거렸다.
“화산 놈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군.”
그 말에 실린 게 감탄인지, 비아냥인지 호가명조차도 명확히 자신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봐야 달라질 건 없다.’
호가명이 냉정하게 백천을 쏘아보았다.
백천의 몸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피가 의복을 물들이다 못해 푹 적셔서 뚝뚝 떨어진다. 청명이 입은 상처도 중하지만, 백천이 입은 상처도 그에 못지않아 보였다.
아마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왔겠지.
덕분에 청명의 목이 떨어지는 건 막아 냈지만, 그의 힘으로 의식 잃은 매화검귀를 대동한 채 이곳을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
“의리라기에는 무모하고, 협의라기에는 어리석군.”
청명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성을 잃었을 백천을 도발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백천은 의외로 일말의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미동 없는 눈빛으로 호가명을 응시할 뿐이었다. 감정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눈빛. 그 눈빛 앞에선 호가명조차 희미한 섬뜩함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는 걸 느끼며 호가명이 입을 뗀 순간, 백천이 먼저 말했다.
“⋯⋯죽어?”
“⋯⋯.”
“누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가장된 냉정함 아래에서 지독한 분노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 따위가 감히 누굴 죽인다는 거냐?”
그 목소리를 들으며 호가명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분노를 확인해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듯이.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로는 무리겠지.”
“잘 알고⋯⋯.”
“하지만.”
백천이 씹어뱉듯 말했다.
“우리라면 다르지.”
그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무언가 날아들었다. 호가명이 고개를 황급히 든 순간, 주위에 있던 만인방도들이 빠르게 주위를 에워싸며 그를 보호했다.
촤아아악!
명검으로 비단폭을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백천의 지척에 있던 만인방도 둘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탁.
일 검에 두 사람을 고혼으로 만들고 사뿐히 내려선 이가 청명부터 확인했다.
언제나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무심함에 일순간 금이 갔다.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깨문 유이설은 그렇게 잠시간 청명을 바라보다 백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백천이 짧게 말했다.
“⋯⋯살아 있다.”
묻고 싶은 건 그것이었겠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백천의 대답에 유이설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만인방도들을 노려보았다.
연이어 위에서 또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쿠웅!
강한 착지에 흙먼지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먼지구름이 가라앉은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본 것은 붉은 승포 자락을 휘날리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주위가 절로 고요해졌다.
내려선 승려는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도 없이 청명을 응시했다. 그렇게 아주 한참을 굳은 채 청명을 보던 그는 숨이 막힐 정도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움찔.
그 시선을 마주한 만인방도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승복을 걸친 승려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 안에 타오르는 증오가 모두를 짓눌렀다.
으득.
혜연이 제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분노는 고스란히 살기가 되어 흘러나왔다. 자신이 불자라는 것마저 잊은 혜연의 주먹에 새파란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하지만 그 노기가 채 터져 나오기도 전에 몇몇 그림자들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청명아아아아아!”
내려선 조걸이 전력으로 청명을 향해 달렸다. 격하게 뻗었던 손은 청명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상처가 없는 구석이 없었으니까.
“으⋯⋯.”
조걸의 손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탓이었다.
“사, 사형. 사형⋯⋯. 청명이가⋯⋯.”
그 바로 옆으로 온 윤종은 한마디 말도 없이 청명의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몸에 새겨진 상처 하나하나를 모두 눈에 새기겠다는 듯이.
“비켜요!”
그런 둘을 밀치고 당소소가 달려와 청명에게 달라붙었다. 벼락처럼 몇 개의 침을 박아 넣은 당소소가 뒤로 손을 뻗으며 고함쳤다.
“요상단, 빨리!”
“여기 있다!”
당패가 내민 병을 받아 든 당소소가 입구를 부술 듯 열어 청명의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신속하게 몇 개의 혈을 짚어 약을 청명의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 여기가⋯⋯. 아⋯⋯. 여기도⋯⋯.”
대체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어디 하나 위중하지 않은 상처가 없고, 어디 하나 심각하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런 상처를 입고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게다가 기존에 입었던 상처가 덧나 상태가 최악이었다.
지금껏 숱한 상처를 입고도 멀쩡히 살아난 청명이지만, 이번엔 그런 낙관을 품을 수준이 아니었다.
“제발, 사형⋯⋯. 제발!”
당소소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몸에 겹겹이 아로새겨진 상처들만 보아도 청명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지 생생히 느껴졌다.
“아아⋯⋯.”
설소백은 거의 혼이 달아난 얼굴이었다. 충격과 슬픔, 공포, 분노가 한꺼번에 그를 덮친 듯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런 설소백을 위로하거나 안심시키려 들지 않았다.
모두의 신경이 청명에게로 쏠려 있으므로. 지금 설소백에게 신경을 나눌 여력이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도장.”
남궁도위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넘실거렸다. 심지어는 임소병조차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린 채 이를 드러냈다.
어찌할 수 없는 노기. 몸을 태울 것 같은 증오.
그들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청명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산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노할 수밖에 없다.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걸어온 생의 길은, 그 한결 수월했던 길은 청명의 피와 고통으로 지탱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형⋯⋯. 사형, 제발⋯⋯.”
당소소는 정신없이 청명의 상처를 지혈하고 약을 발랐다. 이렇게 허둥지둥 손을 떨어서야 과연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당소소의 손은 단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때, 그런 당소소의 귓가에 서늘한 백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살 수 있겠느냐?”
당소소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차마 확신 어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청명의 상처를 돌봤다.
“소소.”
“⋯⋯.”
“소소!”
결국 당소소가 울분에 찬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두 눈에 독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백천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재차 그녀를 채근했다.
“대답해라.”
“⋯⋯.”
“어서.”
당소소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이⋯⋯대로면⋯⋯.”
그 말에 백천이 눈이 절로 감겼다.
지옥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누구도 입을 열 수 없는 그 침묵의 끝에 백천의 눈이 다시 뜨였다.
“이대로면 죽는다⋯⋯.”
“⋯⋯.”
“그건 이대로가 아니면 살 수 있다는 말이로군. 방법은?”
당소소의 눈동자가 순간 격하게 떨렸다. 미처 생각도 못 한 것을 백천이 짚어 주었다는 듯이.
“아,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당가주님께 가야 해요! 당가주님이라면!”
“알겠다.”
백천이 곧장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을 뚫고 당군악에게 가는 건 분명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청명이 죽어 가는 꼴을 손 놓고 지켜보는 것에 비하면 천 배는 더 쉬운 일이었다.
다른 이들의 생각 역시 다르지 않은 듯했다. 당군악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모두가 움직일 준비를 마쳤으니까.
유이설의 검 끝에서 붉은 검기가 흘러나왔다. 그 어떤 말이나 표정보다도 더 선명하게 분노를 담아 내는 검기였다.
모두의 몸에서 자욱한 살기가 쏟아졌다. 확고한 결의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들의 두 눈에 우뚝 서 있었다.
백천이 청명의 어깨를 조금 더 강하게 꽉 당겨 안았다.
‘아마 너는 화를 내겠지.’
어리석다 할 것이다, 분명.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의 생각은 하나뿐이다.
모두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청명을 살려 낸다.
‘화 따위야 얼마든지 받아 주마. 그러니까⋯⋯ 그러니까 절대⋯⋯. 절대!’
백천이 청명을 끼고 일어서며 나직이 말했다. 이 순간에도 그는 끊임없이 청명에게 기운을 밀어 넣고 있었다.
“해야 할 건 알고 있겠지?”
돌아오는 대답 따윈 없었다.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의미 없는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하다.
이 순간 백천이 해야 할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가자.”
서로 다른 문파, 서로 다른 출신, 서로 다른 입장.
그 모든 것이 지금 하나의 목적으로 경계를 허물었다. 한 줄기 섬전으로 화한 이들이 가야 할 길을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