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7화.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2)
파아아앗!
청명의 검이 내질러졌다. 힘이 모조리 실린 검이었다.
카가각!
하지만 도를 꿰뚫지 못한 검은 튕기고 말았다.
“아아아아아아아!”
튕겨 나가는 검을 양손으로 재차 움켜잡은 청명이 절규를 내지르며 적을 향해 검을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이, 이 미친놈이!”
이미 쓰러진 이의 가슴을 연신 내려치는 청명을 보며 만인방도들이 기겁했다.
“죽어!”
만인방도 하나가 청명의 등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콰득!
날아든 도기가 청명의 등을 난자했다. 진득한 핏물이 방울져 튀어 올랐다.
청명은 생각한다.
있었을까, 그가 있을 곳이?
파아아앗!
주위를 둘러싼 만인방도들이 사방에서 뛰어올라 청명을 향해 도를 내리쳤다. 청명은 지체 없이 바닥을 구르며 날아드는 도를 피해 냈다.
서걱! 서걱! 서걱!
전신을 스치고 간 도기들이 청명의 몸 곳곳에 얕은 상흔을 남겼다. 손을 뻗어 흙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킨 청명이 발작처럼 검을 휘둘렀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내, 내 다리!”
“쿨럭!”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는 청명의 입에서 피 섞인 기침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거기에 있었을까?
- 누군데 남의 방을 훔쳐보고 있어? 도둑놈이냐?
청명은 늘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이미 있어야 할 곳을 잃은 이니까.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맞이할 결말을. 처음부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남겨지지 않았어야 할 망령이니까.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이가 맞이할 운명의 끝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니 그 최후가 오기 전에 못다 한 것을 할 수만 있다면 족하다 여겼다. 하지만⋯⋯.
- 너 이름이 뭐라고?
- 윤종입니다!
고백하건대, 때때로 청명조차 그 사실을 잊었다.
투웅!
몸을 일으키려던 청명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힘을 잃었다.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허물어졌다.
“이 틈이다!”
굶주린 승냥이들이 상처 입은 맹수를 그대로 둘 리 없다. 청명의 약세를 확인한 이들이 가열하게 달려들었다.
카앙!
손을 뻗어 땅을 짚은 청명은 한 손으로 검을 가까스로 움직이며 창과 도를 연이어 쳐 냈다.
콰득! 콰드득!
하지만 등 뒤에서 날아든 창까지는 방어하지 못했고, 여지없이 날붙이가 등으로 파고들었다. 청명의 몸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휘청이며 쓰러졌다.
‘기회!’
놈의 목을 베어 내는 것! 그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확실한 전과(戰果)다. 거인이 쓰러지자 이를 목도한 이가 욕망에 뒤덮인 얼굴로 청명의 전면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도를 채 휘두르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청명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커헉!”
쓰러지는 청명과 적이 서로 얽혀 앞으로 엎어졌다.
“끄륵⋯⋯. 노, 놓⋯⋯.”
이를 악문 청명은 엎어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몸을 비틀었다. 목을 틀어 잡힌 이의 몸이 강제로 청명의 위쪽으로 돌려졌다. 이윽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청명을 노리고 쏟아지는 무수한 도기였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눈을 부릅뜬 그의 몸이 도기에 무참히 난자당했다.
“끄, 끄으으⋯⋯.”
빛이 꺼져 가는 눈에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날아드는 무언가가 보였다.
콰드득! 콰득!
비처럼 쏟아진 병장기들이 이미 숨이 끊긴 시신을 무수히 뚫었다.
“쿨럭!”
내력이 채 빠지지 않은 시신임에도 가차 없이 꿰뚫을 만큼 거센 검과 도가 그 아래의 청명의 몸까지 쑤셨다.
“으⋯⋯.”
청명은 벼락처럼 검을 휘둘러 제 몸에 박힌 검을 잘라 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세게 바닥을 굴렀다.
콰아아아앙!
그가 조금 전까지 있던 곳으로 장력이 우수수 쏟아지며 가공할 폭발이 일었다.
그 여파를 감당하지 못한 청명의 몸이 태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힘없이 튕겨 나갔다.
- 너는 누구?
하지만 이제는⋯⋯. 그래, 이제는 알 것 같다.
있어야 할 자리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그가 있고 싶은 자리만 있을 뿐이다.
조금 늦게 알아 버렸지만 말이다.
쿠우웅!
청명의 몸이 곤두박질쳤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갈 만큼 거대한 충격이 온몸을 덮쳤다. 하지만 어떻게든 의식을 부여잡았다. 의식을 놓아 버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니까.
쇄애애애액!
청명이 다시 한번 땅을 걷어차며 몸을 굴렸다.
콰가각! 콰가가각!
연이어 내리꽂힌 도기가 땅을 흡사 진흙처럼 움푹움푹 베었다. 그 와중에 미처 피하지 못한 도기가 청명의 목을 여지없이 스쳤다.
깊게 베인 목에서 핏물이 울컥 솟구쳤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검을 들어 다가오는 적을 겨눴다.
귓속에서 심장 박동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매화⋯⋯.’
수도 없이 피워 낸 매화. 하지만 그의 검 끝은 더 이상 매화를 피우지 못한다. 반쯤 그려지다 이내 허무하게 이지러지고 스러진다.
‘살아⋯⋯.’
겨울을 맞은 매화가 시들어 가듯, 그의 검 역시 시들어 간다.
“으아아아앗!”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들이 단번에 청명의 위로 뛰어오르며 도를 내리쳤다.
그 도를 피해 몸을 날리는 건 순전히 본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땅을 박차며 가까스로 도를 피해 냈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숱한 병장기가 그를 향해 쏟아졌다.
서걱! 서걱!
처절하게 구르고 또 구르며 적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몸엔 확실하고 선명한 상흔이 조금씩 더해졌다.
“제, 제발 죽⋯⋯!”
서걱!
간절한 마음으로 달려들던 만인방도의 가슴을 청명의 검이 꿰뚫는다.
콰앙!
하지만 적의 사혈을 정확히 꿰뚫지 못한 검은 반격의 여지를 남겼다. 가슴을 꿰뚫린 이가 쓰러지기 전 날린 권이 청명의 가슴에 작렬했다.
청명이 입으로 피를 내뿜으며 뒤로 나뒹굴었다.
쿵! 쿵!
땅을 찧으며 튀어 오른 청명이 다시 풀썩 엎어졌다. 짙은 신음을 흘리며 기어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콰득!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쇠 창이 청명의 오금을 꿰뚫고 땅에 박혔다. 앞으로 박차고 오르려던 청명의 몸이 그대로 다시 엎어졌다.
얼굴이 흙바닥에 처박혔다. 누군가의 피로 이미 진득하게 물들어 있는 곳에.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미약한 신음만이 겨우겨우 흘러나왔다.
‘나는⋯⋯.’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는 그만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얼마나 더 고통을 겪어야 할까? 얼마나 더 이 지옥을 겪어야 할까?
내려놓으면 된다. 내려놓기만 하면 편해질 수 있다. 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
‘화산으로⋯⋯.’
청명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진득한 핏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바닥까지 길게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꺾일 듯 힘없는 고개는 기어코 부득부득 뒤쪽으로 돌아갔다. 덜덜 떨며 내뻗은 손으로 무릎을 꿰뚫은 창을 힘겹게 움켜잡았다.
“으⋯⋯.”
하지만 안간힘을 써도 창이 뽑히질 않았다. 피에 젖은 손은 자꾸만 미끄러지기만 할 뿐, 무엇 하나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청명은 결국 안간힘을 쓰며 창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살을 파헤치고 찢으며 비틀린 창대를 끌어안듯이 잡고, 이로 콱 깨물었다.
손에 힘이 없으니 물어서라도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으드득. 그그극. 그극.
입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든 창이 무릎을 비집으며 천천히 뽑혀 나온다. 그 광경에 달려들려던 만인방도들조차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처절하다. 적이지만,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툭.
기어코 뽑혀 나온 창이 땅에 떨어졌다. 벌린 입을 다물지조차 못한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 소형제는 누구신가? 화음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 같은데.
손끝이 시리다. 아직도 한기를 느낄 만큼 감각이 남아 있음에 안도해야 할까?
편해지고 싶다. 그만 놓아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살고 싶다.
- 청명 소협! 거기 좀 서 봐요!
너희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그토록 닮고자 했던 등을, 너희는 내게서 봤을까?
잠시 미동조차 하지 않던 청명의 손이 꿈틀했다.
너무도 미약하게 움직이는 그 손을 모두가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숨 막히도록 느리게 움직이는 손이 바닥을 더듬더니 이내 제 검을 움켜잡았다.
누군가의 신음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반쯤 감겨 버린 눈. 성한 곳 하나 없이 엉망이 되어 버린 몸. 죽어도 몇 번은 더 죽었어야 할 상황에서도 저자는 여전히 싸우려 들고 있다.
만인방도들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두려운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저런 꼴이 된 이를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은 그들 역시 무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파라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무학에 인생을 건 이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무인으로서 살아 본 이라면, 이 모습에 경외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이 자리를 피해 버리고 싶었다.
저자가 그들의 동료를 수도 없이 죽였으며,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퍼져 나갔다.
금방이라도 끊길 듯한 청명의 작은 숨소리만이 그 고요 속에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뭐 하고 있지?”
그때, 메마른 정적을 깨며 서늘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호가명이 무감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후방에 있던 그가 어느새 이곳까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구, 군사!”
“뭘 하고 있느냐 물었다.”
만인방도들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호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들을 한번 훑어본 호가명은 이내 차디찬 시선을 청명에게로 돌렸다.
만인방도들은 주춤주춤 좌우로 물러나며 그와 청명 사이의 길을 터 주었다. 하지만 호가명은 굳이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청명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더없이 비참한 모습이다. 그와 만인방을 지독하게 괴롭혀 온 검귀라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처참하다.
하지만 호가명은 마지막 한 줌의 경계를 풀지 않았다.
“⋯⋯죽여라.”
묵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추상과도 같은 군사의 명이 떨어졌음에도 만인방도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호가명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째서 모르는가?
주저는 오히려 저자의 고통을 늘릴 뿐이라는 것을.
지금 저자에게 보일 수 있는 최상의 경외는 고통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 주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서로 간에 주고받은 것이 원한밖에 없는 사이라 해도, 저만한 자가 고통에 신음하다 비참히 죽어 가는 꼴 따위는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청명을 증오할 호가명조차도 그랬다.
“십비(十匕).”
“예, 군사.”
“검귀의 목을 가져와라.”
“복명!”
호가명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이가 무정히 청명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소매에서 모습을 드러낸 비수가 섬뜩한 빛을 머금었다.
서늘한 살기가 다가왔다.
죽음이란 두 글자가 조금 더 선명한 형태를 갖추며 청명을 찾아오고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시린 빛을 띠고.
하지만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면서도 청명은 저항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제 더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잿빛으로 바래 버린 것만 같다.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다시 화산의 땅을 밟고 싶다.
화산을 가득 채운 매화 향 속에서, 사형제들과 취기 오른 목소리로 웃고 떠들어 대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늘 그래 왔듯이.
‘⋯⋯청진아.’
알 것 같았다. 홀로 죽어 간 청진이 그 생의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너도 그랬겠구나.’
이제야 알 수 있다. 청명에게 남은 건 원망도, 회의도, 걱정도 아니니까. 그저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었다. 그 바보 같은 놈들을.
파아앗!
그 순간 맹렬한 기운이 청명을 향해 쏘아졌다. 세상이 암전하는 듯한 커다란 충격이 전신을 덮치고 이내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부여잡고 있던 의식이 서서히 멀어졌다.
언젠가 느껴 본 감각이다. 거기에 몸을 내맡긴 청명은 한없이 차가운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끝없는 부유감과 시린 한기.
- 조금 늦었구나.
그 속에서, 무언가 따뜻한 것이 청명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색한 그 온기가 아주 굳게 닫혀 버린 것만 같던 눈을 뜨이게 했다.
흐릿한 세상, 그 사이로 무언가가 형체를 갖춰 갔다. 이윽고 마주한 것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의 얼굴이었다.
‘⋯⋯사⋯⋯형?’
청문. 그가 청명을 보며 빙그레 웃음 짓고 있었다. 그저 기특하다는 듯.
알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이 북받쳤다.
‘사형, 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무언가 말을 해 보려 했지만, 형태를 갖춰 내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청문은 그런 청명을 그저 따뜻한 미소로 기다려 주었다.
원망의 말, 그리움의 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것들⋯⋯.
뭐든 꺼내려 할 때, 그를 마주 보던 청문의 얼굴이 다시금 흐릿하게 변해 갔다.
익숙한 얼굴에서 낯선 얼굴로, 하지만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로.
‘사형?’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조금 어색했으니까. 하지만 그 얼굴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을 때, 청명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르게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사⋯⋯숙?”
도무지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만큼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물기를 머금은 채 붉게 물든 두 눈은 분명 청명이 수도 없이 봐 온 이의 것이었다.
죽기 전에 보는 환상인가?
환상이라 해도 이건⋯⋯ 이건 너무도 가혹하다.
그 순간,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기다렸지?”
백천의 손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청명의 어깨로 그 온기를 전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어깨에 전해지는 떨림이 말해 주었다. 이게 환상이 아니라고.
말을 잃은 청명이 멍하니 백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모든 힘을 소진한 청명의 몸이 이내 천천히 앞으로 허물어졌다.
백천은 쓰러지는 청명을 조심스레 받쳐 들었다.
“⋯⋯돌아가자, 청명아. 네가⋯⋯.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