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6화.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1)
땅을 박차는 호가명의 낯빛은 점점 어둡게 굳어졌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건만, 눈앞의 참상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온통 시신뿐.
처참하게 널브러진 시신과 땅을 적신 검붉은 피까지, 혈로(血路)라는 말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도리가 없는 광경이었다.
‘이걸 정말 한 사람이⋯⋯.’
분노 이전에 경외감이 찾아들었다. 이건 결코 무력의 강함만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지금 천하에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가 저 매화검귀 말고 또 있겠는가? 심지어 만인방을 상대로 말이다.
이 광경을 보고 나니 왜 고작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이토록 더뎌지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딱히 호가명이 아니더라도, 이 같은 상황에서는 모두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만큼 지금 그가 목도한 광경들이 충격적이었다.
한 사람이 이 참상을 만들어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베어 낸 걸까? 얼마나 숱하게 검을 휘두른 걸까?
‘하지만 그 대가로 놈 역시 절대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가 사람인 이상⋯⋯. 아니,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 해도 이런 짓을 벌이고 멀쩡할 수는 없다.
“서둘러라.”
“예!”
호가명이 경신의 속도를 높였다. 놈 역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을 터. 이번에야말로 그 숨통을 반드시 끊어 놓아야 한다.
❀ ❀ ❀
“몰아넣었다! 놓치지 마라!”
서걱!
아쉽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잃은 무력에 대한 상실감? 잃고 싶지 않았음에도 잃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들에 비하면 그 몸에 쌓았던 것 따위야 하찮기 그지없다.
“둘러싸라! 빠져나갈 틈을 주지 마!”
서걱!
하지만 그 무력이 있었다면, 지금 이 어깨를 베고 간 칼 정도야 막을 수 있었겠지. 옆구리를 파고든 이 검도 피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많은 이들을 상대하면서도 태연히 비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돌아온 이후로 무력을 되찾는 데만 전념했다면⋯⋯. 아니, 하다못해 조금만 자신을 더 위했더라면 그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검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고고하고 강인한 무인으로서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새삼 아쉬운가?
글쎄⋯⋯.
파아아아앗!
섬전처럼 뻗어 나간 검이 적의 목을 여지없이 꿰뚫었다. 죽음의 순간을 믿지 못하는 적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스친다. 이내 그 입에서 붉은 피가 왈칵 새어 나왔다.
“쿨럭⋯⋯.”
꿰뚫은 검 끝에 둔중한 무게가 실렸다. 온전한 한 사람의 무게다. 평소에는 느끼지도 못할 만큼 가벼울 텐데, 하지만 이 순간만은 그 무게가 버겁게 느껴졌다.
지쳐서일까? 아니면 그가 느끼는 생의 무게가 더는 예전 같지 않은 것일까.
“이 지독한⋯⋯.”
청명이 쓰러질 듯 쓰러지질 않으니 잔뜩 질린 적이 잠시 주춤대는 게 느껴졌다. 덕분에 겨우 숨 돌릴 틈을 얻어낸 청명은 숙였던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세상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몇 명째더라? 모르겠다. 세는 건 이미 포기한 지 한참이었다.
‘뜨겁군⋯⋯.’
몸이 불덩어리 같다. 아니, 한없이 차가운 얼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겠지.
내력은 이미 오래전에 바닥을 드러냈고, 짓이겨진 상처들은 육신을 제멋대로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그 많은 이들을 죽인 대가라면 결코 비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여파는 지금 청명을 분명한 하나의 결과로 몰아넣고 있다.
눈두덩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반쯤 감긴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어디를 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붉은 옷을 입은 적들뿐이다.
한때는 이런 광경이 더없이 익숙했다. 이 안에서 숨 쉬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광경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건, 청명이 나약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스르륵.
숨 끊긴 적의 시신이 검에서 빠지며 흘러내렸다. 실려 있던 무게가 사라졌지만, 검은 여전히 무거웠다. 들어 올리기도 어려울 만큼.
세상이 연신 경계를 잃어 간다.
이젠 세상에 적의밖에 남지 않은 것만 같다. 하지만 눈을 돌려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부여잡은 것을 놓아 버리고 편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련이라도 남았나?
다른 이들에게서 제대로 이해받아 본 적 없는 이는 대체로 모든 것을 비웃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습관 같은 것이다. 동떨어진 기이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보다는 차라리 적의 어린 시선을 받는 게 나으니까. 그건 다른 의미의 이해일 테니까.
이번에도 어떻게든 입꼬리를 뒤틀어 올려 보려 했지만, 얼굴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입꼬리는 더는 여유도, 위압도 머금지 못했다.
‘허세마저 다됐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적을 위협하기 위한 비웃음이 아니라, 자조 섞인 헛웃음이.
“뭣들 하는 거냐! 죽여라! 놈은 한계다!”
“이, 이야아아아압!”
누군가 발작적으로 창을 찔러 왔다. 본능적으로 휘둘러진 검이 날아드는 창을 가로막았다.
콰득!
날카로운 쇳소리와 날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공기가 아닌 살을 타고 머리로 전해지는, 섬뜩하게 벼려진 날이 몸을 파고들 때 나는 소리.
맞부딪친 순간 튕겨 나간 쪽은 수많은 이들을 베어 낸 당가의 혼이자, 단 한 번도 청명의 의지를 배반한 적이 없는 검이었다.
사실 창격 자체는 그리 대단할 게 없었지만, 힘을 잃은 그의 검은 평범한 공격조차 막아 내지 못했다.
“엇⋯⋯.”
파아아아앗!
청명은 이를 악물고 다시 벼락처럼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되레 당황해서 주춤했던 만인방도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청명의 무릎이 꺾였다.
검은 한없이 무력하고, 반응은 점점 더 느려진다. 그 안에 쌓이고 쌓였던 모든 것이 역류해 몸 밖으로 흘러내리는 것만 같다.
“쿨럭⋯⋯.”
기침할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하지만 쓰러질 듯 휘청거리던 몸은 이내 다시 용케도 균형을 잡았다.
“쿨럭! 쿨럭!”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청명을 노려보던 적들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그 매화검귀가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바닥을 드러냈다. 어쩌면⋯⋯ 어쩌면 다름 아닌 그들의 손으로 저 짐승의 목을 잘라 내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없이 위험하지만, 또한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그 앞에 흔들리지 않을 만한 이는 적어도 이곳에는 없었다.
마른침을 삼킨 이들이 조심스레 청명을 향해 발을 뻗었다. 청명을 둘러싼 원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했다.
꽈악.
청명은 심장 위쪽에 박힌 창을 좌수로 콱 잡았다. 힘을 주어 창을 당겼지만, 갈고리 같은 창날이 살에 제대로 틀어박혀 있어 쉽사리 뽑히질 않았다.
우드득.
결국 미련 없이 창대를 분질러 버린 그는 입 안에 고인 피를 퉤 뱉어 냈다.
좁아진 시야에는 오로지 적뿐이다. 세상 전체가 그의 적으로 가득 차 있다. 적, 적, 적, 그리고 또 적.
‘⋯⋯베어 버리면 돼.’
베고 쓰러뜨린다. 그리고 길을 연다. 수없이 반복했던 대로. 여지까지 해 왔던 것처럼. 그러면 길을 열 수 있다.
‘그 뒤에는?’
또 적이 있겠지. 그들을 쓰러뜨려도 그 뒤에 새로운 적이 나타날 것이다.
베고, 베고, 또 베어 내고. 다시 또 베고⋯⋯.
그 끝에 뭐가 남았더라?
“흐⋯⋯.”
웃음인지,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달라질 건 없다. 언제나 이랬으니까.
자신의 강함을 과신한 적은 없다. 어떤 싸움에서도 살아 돌아올 것이라 무모하게 확신했던 것도 아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싸움을 연이어 치르면서도, 용케 계속해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딱히 간절히 살아남기를 바라지 않았음에도.
그 운이 이곳에서 다한다 해서 이상할 건 없다.
모두가 맞이했던 결말. 청명 역시 맞이했어야 했던 결말이 그를 찾아온 것뿐이다. 지독히 느리게, 지독히 선명하게.
검으로 힘겹게 지탱하며 청명은 자꾸만 허물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주, 죽어!”
상대가 도를 뻗기도 전에 그의 검이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검 끝에서 발출된 검기가 여지없이 상대의 가슴에 박혔다.
“끄륵⋯⋯.”
검기에 다친 적은 잠시 주춤했지만, 그뿐이었다. 상처를 움켜쥔 채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텼다.
검기조차 이제는 제힘을 발휘하지 못 하고 있다. 인간의 무른 육체마저 완벽하게 뚫지 못하는 것이다.
후회하나?
아니다. 후회하고 말 것도 없다.
과거의 그는 세상을 구했지만, 정작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모두 잃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다르다.
‘⋯⋯나는 지켜 냈다.’
진작에⋯⋯. 그래, 진작에 이래야 했다.
홀로 살아남아 죽은 모두를 바라보는 경험 같은 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에서 홀로 허물어지는 고통 따위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으니까.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거리라고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애초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사형⋯⋯.’
당신은 모르겠지. 당신이 내게 맡긴 임무가 나를 어디까지 몰아 넣었는지.
이해할 수 없겠지. 죽어 버린 이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까.
모두의 죽음 끝에 홀로 남은 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당신들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지금에 와서야 말하지만⋯⋯ 나는 당신들 생각처럼 대단하지도, 강하지도 않았어.
파아아앗!
수십의 도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의식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청명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육체에 새겨져 있는 본능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카앙!
도기가 산산이 부서진다. 으스러진 도기의 파편이 적을 꿰뚫고, 지쳐 버린 청명의 육체 곳곳에도 박혔다.
“쿨럭!”
비릿한 핏덩어리가 자꾸만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이미 몸 안의 피가 모조리 말라 버린 느낌인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힘겹게 고개를 드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 어스름의 붉은 하늘이 그를 굽어보았다. 마치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하늘처럼.
그가 기억하는 화산의 마지막처럼 말이다.
그날, 그의 사형제들이 죽어 가며 가장 바랐던 게 화산이 매화를 다시금 피워 내는 것이었다면, 그가 그때 가장 바랐던 것이 차라리 그의 죽음으로 하나라도 더 많은 이들을 살리는 것이었다면⋯⋯.
이제 청명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닐까?
이루려던 것은 이뤘으니까. 사형제들이 바라던 것은 이뤄졌으니까. 물론 미덥지 않고, 한심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지만⋯⋯ 그렇지만 좋은 녀석들이니까.
그러니 충분하지 않을까?
이겨 낼 것이다. 그가 없다고 해도.
아무리 차가운 삭풍이 불어온다 해도 버텨 내고 이어 가겠지. 과거에 스러져 간 이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것들을 이어 가고, 의지를 더할 것이다.
‘원망할까, 나를?’
그럴 것이다. 그런 놈들이니까. 화내고 욕하고 또⋯⋯. 또 울어 대겠지.
하지만 이내 잊힐 것이다.
그가 청문을 잊고 새로운 이들과 삶을 이었던 것처럼. 과거의 화산 대신 새로운 화산에서 웃고 떠들었던 것처럼.
그의 빈자리는 잠시간 모두를 슬프게 하겠지만, 결국은 잊히게 될 것이다. 상처에 새 살이 돋고, 말라붙은 땅에 언젠가 다시 풀이 자라나는 것처럼.
그게 조금은⋯⋯ 아주 조금은⋯⋯.원망스럽다.
“뭣들 하느냐! 죽여라! 당장 죽여 버려! 놈은 한계다!”
적들이 달려든다.
시야가 흐리고 더는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감각도 무뎌졌다. 누군가를 이겨 내기에, 지금의 그는 너무도 초라하고 작기만 했다.
서걱!
암향매화검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손끝에 스몄다.
적의 어딘가를 벤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라도 더 베어야 한다.
그가 끊어 낸 목숨이, 살아남을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하나라도 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서걱.
‘장문사형.’
웃어 줄까? 청명이 돌아와 해낸 일을 두고 훌륭하다고 칭찬해 줄까?
어쩌면 나무랄지도 모르지. 항상 그랬으니까. 그렇게 무리할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화를 낼지도 모르지.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장문사형.’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를 조금만⋯⋯. 조금만 안쓰럽게 생각해 줘요.
끝내 무릎이 꺾인다. 땅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세상이 어지럽게 빙빙 도니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와는 다른, 또 다른 죽음이 그를 찾아오고 있었다.
괜찮다. 두고 왔으니까.
섬서의 어딘가에, 매화 핀 화산의 어딘가에, 울어 댈 이들의 가슴속에, 아직 다 여물지 못한 검 끝에 남겨야 할 것은 충분히 남겼다.
그러니 이게 마지막이라 해도 더 이상 후회는 없다. 하지만⋯⋯.
“숨통을 끊어!”
“놈이 힘이 다했다! 목을 베라!”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카아아앙!
날아든 도가 불시에 솟구쳐 오른 검에 부딪혔다.
땅을 박찬 청명이 적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처절하게 쏟아져 나온 검기가 적들을 단번에 양단했다.
“아⋯⋯.”
청명의 입이 열리고, 이내 짐승과도 같은 절규가 터져 나온다.
“아⋯⋯ 아아아아아아!”
살고 싶었다.
쥐어짜 낸 검기가 악의밖에 없는 이들을 가른다. 근육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있지만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살고 싶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살아서 다시 웃고 싶다. 살아서 다시 화산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가 떠나온 곳. 그리하여 돌아가야 할 곳.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곳.
“아아아아아아아아!”
솟아오른 적의 칼날 사이로 뛰어드는 청명의 울부짖음이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