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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95화 (1,396/1,567)

1395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5)

“군사! 정(丁)조가 포위망을 완성했습니다! 무(戊)조와 기(己)조는 지정된 위치로 이동 중입니다!”

“을(乙)조, 현재 매화검귀와 교전 중입니다! 포위는 돌파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쏟아지는 보고를 듣는 호가명의 눈빛은 점점 서늘해졌다.

매화검귀 청명이 포위를 뚫어 내는 속도가 점점 더뎌지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번 포위를 뚫어 내고 나서 달아나는 거리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이전이었다면 놈이 본대가 달아날 시간을 버느라 고의로 그러고 있다고 해석했겠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건 다르다.’

호가명이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시간을 끌수록 놈의 주변을 에워싸는 포위가 점점 두터워진다. 그 상황을 알지 못할 놈이 아니다.

알고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건, 포위를 돌파할 힘이 부족하다는 의미.

그 괴물 같은 놈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호가명이 슬쩍 주변을 훑어보았다. 부관들 역시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인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호가명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결국⋯⋯. 그대도 결국은 사람이었군.”

부관들은 침묵하며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호가명의 목소리엔 많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원한과 증오. 이제야 겨우 상대를 그물 안으로 밀어 넣었다는 안도감. 마침내 련주의 명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하지만 그 목소리를 직접 들은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미묘한 안타까움 역시 실려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만인방의 군사. 더 나아가 사패련의 군사로서 결코 내보여서는 안 될 감정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실각의 여지마저 줄지 모른다.

하지만 부관들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호가명의 실태(失態)를 지적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끝내 내뱉고 만 호가명의 심정을 그들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급할 거 없다.”

호가명이 스스로 마음을 다잡듯 말했다.

“느려도 확실하게 숨통을 끊는다.”

“예, 군사!”

확신을 얻은 호가명이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였다.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매 울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눈을 가늘게 뜨며 위를 올려다본 호가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급보?’

먹이를 낚아채듯 강하한 매가 뻗어진 호가명의 팔 위로 푸드득대며 내려앉았다. 호가명은 매의 발에 달린 통에서 서찰을 꺼내 지체 없이 읽어 내렸다.

“⋯⋯천우맹?”

이내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모한 게 천우맹 놈들의 장기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를 넘었군.”

호가명이 내민 서찰을 본 부관들이 얼굴을 굳혔다.

“군사, 이건⋯⋯.”

“당황할 것 없다. 그래 봐야 아무것도 못 할 테니. 하지만⋯⋯ 대비는 해야겠지.”

호가명은 청명을 에워싼 포위망 위치를 조금씩 조정하며 지시를 내리고는 담담히 말했다.

“놈이 있는 곳으로 간다.”

“구, 군사! 위험합니다!”

“위험?”

주위에서 만류하는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호가명의 얼굴엔 이렇다 할 표정 변화조차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놈이 살아 돌아가는 것보다 더한 위험이 있나?”

부관은 순간 말문이 막힌 채 호가명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안내해라.”

결국 부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부관을 따라 발을 뗀 호가명의 두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단 하나의 변수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청명의 완벽한 죽음. 이 모든 여정에서 호가명의 목적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 ❀ ❀

“자, 잠시!”

남궁도위가 다급하게 외쳤다. 본디 그의 장기는 웅혼한 내력을 바탕으로 적을 분쇄하는 검기다. 검술의 특성상 그의 공격은 범위가 넓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가 검을 떨치려 할 때마다 자꾸만 앞으로 누군가가 끼어든다는 점이었다.

“도, 도장! 잠시만!”

“뭘 잠시만이야, 젠장!”

조걸이 악을 쓰며 남궁도위의 앞으로 치고 나갔다. 폭발적으로 뿜어진 붉은 검기가 달려드는 만인방도들을 순식간에 난자했다. 일 검으로 셋이 넘는 이들을 쓰러뜨리고도 만족하지 못한 그는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낮추며 앞으로 쇄도했다.

“으아아아아압!”

하지만 조걸보다 먼저 뛰어오른 설소백의 공격이 더 빨랐다.

파앗!

설소백의 검이 섬전처럼 적을 베자, 적들의 몸에 금세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길을 뚫는 둘은 흡사 경쟁하는 듯 보였다.

아니, 길을 뚫는다는 말은 이 광경과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적이 모두 쓰러졌는지, 제대로 마무리는 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적진 사이로 뛰어드는 걸 두고 그렇게 표현하기는 힘들 테니까.

“비키라고! 망할 새끼들아!”

두 사람은 악을 쓰며 연신 검을 휘둘렀다.

그 위태롭기 짝이 없는 모습에 남궁도위가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백천을 찾기 위해서였다.

“자, 장문대리. 일단 수습⋯⋯.”

이 정신 나간 이들을 진정시킬 사람은 이곳에서 오직 백천뿐이니까.

하지만 그가 간절하게 찾는 백천은 이미 곁에 없었다.

“막는 놈은 죽는다!”

전방에서 붉은 검기가 날카롭게 솟구쳤다. 채 매화가 되지 못한 검기. 화산의 검에 필수적으로 함께해야 할 정교함을 내다 버린 채, 오직 쾌속한 힘만을 실은 검기가 적들을 투박하고 과격하게 휩쓸었다.

‘어, 언제 저기⋯⋯?’

해남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들이 갖추었던 체계는 이미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모두가 서로 경쟁하듯 뛰쳐나가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모습에 남궁도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오오오오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찬란한 황금빛 불광이 터져 나왔다.

“야, 이익⋯⋯!”

남궁도위가 격하게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가 있던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불광은 물러나는 만인방도들을 단번에 짓이겨 버렸다.

콰아아아아앙!

이어지는 기의 폭발에 불자의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대경한 남궁도위가 혜연을 획 돌아보았다.

“스, 스님. 위험합니다!”

“뭐가 말이오?”

“아, 아니, 저뿐만 아니라 방금 장문대리도 휩쓸릴 뻔⋯⋯.”

“알아서 피하겠지! 못 피하겠으면 비키라고 하십시오!”

“⋯⋯.”

“느려!”

이내 고함을 친 혜연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이형환위?’

마치 도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전방에 다시 나타난 혜연은 우렁찬 사자후와 함께 권을 내질렀다. 극성에 달한 나한권이 전개되며 그의 팔다리가 몇 개로 불어난 듯 사방을 찔렀다.

남궁도위가 할 말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화산에서 제일 침착한 윤종이 거의 야차처럼 날뛰고 있고, 화산의 막내인 당소소가 제 사형을 내리밟으며 돌파해 간다.

이상한가?

아니, 이상하지 않다. 생각해 보면 천우맹은 원래 그런 곳이었다. 남궁도위도 알고 있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이 광경이 이제 와서 어색한 이유는 하나다.

‘다들 지금까지 꾹 참았던 거구나.’

해남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저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짊어진 채 자기 자신을 억제해 왔는지 이 광경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더는 짊어진 것 없이 청명을 구한다는 한 가지 목적만이 남게 되자 다들 거칠 것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 이들도 지칠 대로 지쳤다.

하지만 여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악착같이 적을 몰아붙이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위험에 처한 청명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나, 나도!’

이를 악문 남궁도위가 앞으로 박차고 나아가려는 순간, 문득 그의 검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어?’

당황하여 돌아보니 한 사람이 보였다. 유이설, 그녀가 제 검을 남궁도위의 검에 지그시 댄 채 누르고 있었다.

“이설 도장?”

남궁도위는 순간 의아했다. 그가 나설 때가 아니라는 걸까?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은 무심하고도 명확했다.

“날려.”

“⋯⋯예?”

“날려.”

“⋯⋯.”

“빨리!”

남궁도위는 얼결에 땅을 콱 내밟으며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검에 가볍게 몸을 실은 유이설이 비조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이내 전방을 막아선 적들의 머리 위로 강하했다.

파아아앗!

유이설의 매화검이 허공에 유려한 반원을 그려 내었다. 반원에 휩쓸린 이들의 목이 위로 속속 솟구쳐 올랐다.

“더 빨리 달려, 이 굼벵이 새끼들아!”

“아, 안다고요!”

백천은 물러나는 적의 몸에 이를 악물고 검을 쑤셔 넣었다. 쓰러지기를 기다릴 틈도 없이 그 가슴을 박차고 오르며 무수한 검기를 뿌렸다.

‘더 빨리!’

마음이 급할수록 그의 턱에 힘줄이 불거졌다.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이 개미 떼 같은 놈들은 그 끝을 모른다. 아무리 싸워도 영원히 적이 충원될 것만 같다.

지금 백천이 다급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들을 상대하는 일이 버겁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청명은 홀로 이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알 수 있다. 지금 천우맹 일행을 막아서는 적의 수준이 그리 대단치 못하다는 것을. 상대가 만인방임을 고려하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한다. 만인방 중 실력이 뛰어난 놈들은 하나같이 청명을 쫓는 일에 투입되었다는 의미다.

버틸 수 있을까?

물론 괴물 같은 놈이지만, 정말 그 몸으로 그들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을까?

“으아아! 빌어먹을!”

백천이 광기 어린 눈으로 검기를 쏘아 냈다.

달아날 수 있겠지. 물론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천은 또한 알고 있다. 놈은 이런 상황에서 절대 달아나지 않는다는 걸. 한계까지 시간을 끌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몰려서야 제 길을 열려 할 것이다.

설사 그 결말이 좋지 못하더라도.

‘누구 마음대로, 이 개 같은 자식아!’

백천의 눈이 살기가 솟구쳤다.

“사숙! 저기!”

그 순간 근처에서 터져 나온 고함에 백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과연 한 무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천우맹 일행이 아닌 그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천은 직감했다.

저기에 있다. 저놈들만 뚫어 내면 그 뒤에 청명이가 있다!

저 벽과도 같은 포위망은 결코 넓은 범위에서 펼쳐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전력으로 내달린 백천이 검을 펼쳤다.

카아아앙!

하지만 그의 검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순식간에 날아든 도에 가로막혔다. 두 눈에 살기를 띤 이들이 으르렁대며 백천을 노려보았다.

“애송이 놈이!”

지독한 살기를 품은 새파란 도기가 연신 쏟아졌다.

이를 악문 백천은 그 공격들을 쳐 내며, 앞쪽에 선 만인방도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하나, 또 하나. 더디지만 베어 낸다. 느리지만 뚫어 낸다.

하지만⋯⋯.

‘모자라!’

이 정도로는 안 된다. 더 강해야 한다. 더 빨라야 한다. 그래야 이 길을 늦지 않게 뚫을 수 있다.

“모자라다고, 빌어먹을!”

결국 그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분노와 절박함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력하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이런 놈들쯤은 순식간에 쓸어 버렸을 것이다. 만일 그가 청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청명이 그를 구하러 오는 길이었다면 이미 백천이 있는 곳에 도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강해지면 된다. 시간이 많이 들더라도 강해지면 된다.

언젠가 했던 그 다짐은 이 순간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그가 강해야 하는 순간은 언제나 그가 강해지는 순간보다 이르게 찾아온다. 그 벽에 좌절하는 건 이미 지겹도록 겪지 않았는가?

뇌리에는 자꾸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 그려졌다.

적의 칼에 난자된 청명의 모습. 그리고 뒤늦게 그곳에 도달한 그.

‘안 돼!’

그 꼴만은 죽어도 못 본다.

순간적으로 백천의 몸에서 커다란 기운이 터져 나왔다.

“사숙!”

“야, 이 미친 인간아!”

불완전한 자하신공. 백천은 그걸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본디 아직 완숙에 접어들지 못한 신공은 시전자의 몸을 갉아 먹는다. 언제 주화입마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천만한 짓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자살행위라 해도 무방했다.

“비켜!”

기겁한 윤종과 조걸이 황급히 잡아채려 했지만, 백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떨쳐 버리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검에서 쏟아진 붉은 검기가 서녘을 물들이는 노을처럼 번져 나갔다.

‘제발, 어떻게든 살아만 있어라!’

반드시 구해 낼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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