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1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1)
“좀 더 빠르게!”
백천이 쉬지 않고 주변을 닦달했다.
단순히 빠르게 나아간다고 능사라 할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백천은 마치 적이 등 뒤를 찔러 대기라도 하는 듯 연신 소리쳤다.
“더!”
하지만 일행의 속도는 좀처럼 빨라지지 못했다.
“단숨에 쳐라!”
중간중간 조우하게 되는 적들? 물론 그들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사숙! 뒤쪽에 적이 따라붙었습니다!”
“빌어먹을, 내가 직접 간다!”
떨쳐 냈다 싶으면 다시 달라붙는 만인방? 당연히 큰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교전하는 동안만큼은 속도가 늦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까. 특히나 단 한 사람의 낙오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달리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알 사람은 알고 있었다. 일행의 속도가 좀처럼 붙지 않는 이유는 절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됐다! 가자!”
남궁도위와 함께 순식간에 적을 섬멸한 백천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친다. 하나 그 목소리를 들은 당패는 바닥을 박차기는커녕 되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뒤. 이미 지나쳐 온 그곳을 말이다.
“뭐 하십니까! 소가주님.”
“……죄송합니다.”
당패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앞으로 돌린다. 목에서 뿌득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마치 돌아갈 수 없는 것을 강제로 꺾어 내듯.
자꾸만 시선이 뒤로 간다.
두고 와서는 안 되는 것을 두고 온 사람처럼.
‘어째서 아직도 합류하지 않지?’
장강이 가까워질수록, 적과의 거리를 벌려 낼수록 실감하게 된다. 그들과 청명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직감한다.
그 역시 멍청이는 아니었기에, 지금껏 적의 주력도, 청명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안전해지고 있다.
이 지옥 같았던 강남행이 기어코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장강까지는 불과 지척, 그 사이 적의 노림수에만 당해 주지 않는다면 큰 문제 없이 장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당패를 더욱 껄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녹림왕.”
“…….”
바닥을 박찬 당패가 고개를 돌려 철갑이라도 씌운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임소병을 바라본다.
“앞을 막아서는 이가 없는 겁니까?”
“…….”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들이 우리를 여기까지 몰고 왔다면 반드시 포위하려 할 텐데. 장강에는 만인방의 병력이 절반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성질이 꽤 고약하시네.”
임소병의 입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각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목소리. 그렇기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미 알고 있는 걸 뭐 하러 묻습니까? 굳이 내 입을 통해 확인하려는 이유는 확신이 없어서입니까, 아니면 본인은 몰랐다는 변명을 하고 싶어서입니까?”
노기를 토하고도 남을 만한 모욕적인 언사. 그러나 당패는 그저 침묵했다. 그 말에 어려 있는 서늘한 날이 꼭 그를 향한 것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당패의 반응을 본 임소병이 입술을 살짝 깨문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
“뻔한 건 서로 묻지 맙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당패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형용하기 어려운 무거움이다.
하지만 어쩌면 임소병은 무거움을 넘어서 절망감마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군사의 역할은 한정된 상황 안에서 최선을 찾아내는 것. 그 최선을 찾아내는 것에 실패한 순간 군사란 존재는 더없이 무가치해지는 법이니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그 말 속에 임소병이 느끼고 있는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도장께 간 게 맞군요.”
“…….”
임소병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 확인해서 뭐가 달라진다는 말인가?
임소병의 표정을 확인한 당패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격렬하게 적들을 뚫어 내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이 보였다.
‘저들 역시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지금 그들이 어째서 이리 수월하게 장강으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적들이 어디로 몰려가고 있는지.
그런데 어떻게 저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화산검협과 한솥밥을 먹지 않은 그도 자꾸만 뒤에서 누가 잡아채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데. 저들은 대체 어떤 심정으로 검을 들고 있다는 말인가?
차마 짐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당 소가주님.”
그때, 누군가가 당패를 부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곽환소가 굳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화산검협께서 적들을 유인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당패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해남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대답이 될 뿐이다. 이들은 염치가 없는 이들도 아니고, 어리석은 이들도 아니다. 청명이 과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도 남을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면전에 어떻게 칼을 박아 넣으란 말인가?
“곧……. 아마 곧 합류할 겁니다. 청명 도장은 지금까지 항상 그랬으니까요. 범인의 시선으로 그를 재단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당패는 거기까지 말하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더 말을 이어 가기가 너무도 궁색했기 때문이다.
“…….”
곽환소 역시 당패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곽환소가 결국에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서두르십시오!”
때마침 들려온 백천의 강한 목소리가 그들이 이어 가던 상념을 지워 낸다.
“갑시다.”
“예.”
지금은 이런 생각으로 일행의 발길을 늦출 때가 아니다.
우려되는 것이 있고 저어되는 것이 있어도,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묻어 두고 그저 백천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게 그들을 살리기 위해 홀로 위험한 곳에 남은 청명의 의지일 테니까.
‘하지만…….’
당패가 시선을 옮겨 천천히 주위를 살핀다.
등밖에 보이지 않는 화산 제자들의 얼굴은 접어 두고라도, 남궁도위와 혜연, 심지어 해남 제자들의 얼굴마저 더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장. 당신이 원했던 게 정말 이런 겁니까?’
어쩌면 이곳 모두는 희생 없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남는다고 해서 이들이 그 생존을 떳떳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가장 죽지 말아야 할 이를 희생시킨 대가로 얻어 낸 목숨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을까?
청명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거라면 당패는 청명을 증오할 것이다.
그들을 최소한의 염치라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면, 그런 판단은 내릴 수 없다. 이들 중 누구도 청명의 희생을 대가로 제 목숨을 구하고 싶은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당패가 입술을 깨물었다.
묻고 있지만 알고 있다. 결국은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위험해지는 길과 다른 이들이 위험해지는 길. 남은 것이 오직 그 두 길뿐이었다면 청명은 당연히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지금껏 그는 항상 그런 선택을 해 왔으니까.
그렇기에 모두가 그를 따랐다. 그렇기에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껏 청명을 따르게 했던 그 방식이 이 순간 최악의 결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가, 그리고 그들이 반드시 치러야 했을 대가였다는 것처럼.
그래서 원망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런 최악의 결말은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 누구도.
그리고 그때.
“아…….”
당패의 두 눈에 거짓말과도 같은 광경이 들어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의 끝.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너른 숲의 끝.
낮은 능선을 넘어 펼쳐진 대지. 그 대지의 끝이 하늘보다 더 어두운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검은 선의 정체를 이해한 이들이 하나둘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제 몸에 이는 격동을 이기지 못한 듯이.
누군가가 홀린 듯이 내뱉은 목소리가 그들의 사이로 고요히 흘렀다.
“장……강이다.”
장강.
중원의 남과 북을 가르는 거대한 강.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보고자 했던 곳.
그 장강의 모습이 지금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러지 않을 거라 여겼던 당패조차도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는 몸을 다잡아야 했다.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안도감? 탈력감? 아니면 그저 단순한 기쁨?
그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한 단어로 정의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그 짙은 감정 속에서 당패는, 그리고 그의 주위를 채운 다른 이들도 그저 전율할 뿐이었다.
“우욱.”
그 순간, 당패의 앞쪽에서 이자양이 고개를 떨군다.
“……자양.”
곽환소가 그런 이자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이자양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억지로 삼켜 낸 이자양의 입에서 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살아서……. 살아서 이 광경을 볼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 못 했습니다.”
그 말이 모든 해남 제자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고작 열 명.
그들을 구하러 온 이들의 수는 고작 열이었다.
그들을 믿고 강남을 돌파하겠다는 생각을 감히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심하게 죽지는 않겠다는 마음으로 밟은 강남 땅이었다.
한데 수많은 희생과 지옥과도 같은 길을 버텨 낸 끝에 마침내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물론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저 강을 넘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일 테니까. 어쩌면 그 과정에서 남은 이들이 모두 유명을 달리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저 장강을 두 눈에 담은 감회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제 정말 한 걸음이다.”
“예. 사형.”
곽환소의 말에 이자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곧입니다.”
저 강에 남아 있는 위험을 굳이 언급하지 않은 채, 곽환소와 이자양이 서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 말을 들은 해남의 제자들 역시 단호히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제껏 오직 앞만을 바라보던 백천이 고개를 돌렸다.
냉막하기 짝이 없는 표정. 철갑이라도 씌운 듯 딱딱한 얼굴의 백천이 곽환소를 바라본다.
“곽 소협.”
“예. 장문대리.”
곽환소가 정면으로 백천을 마주했다.
그는 이제 백천이 불구덩이로 뛰어들라 하면 그리할 것이고, 그 목숨을 내어놓으라 해도 그리할 것이다. 백천은 그럴 자격이 있는 이니까.
“저기가 장강입니다. 저곳만 넘으면 강북이 있습니다. 강북에 도달하면 천우맹이든 구파일방이든 해남을 마중하러 올 것입니다.”
곽환소의 눈썹이 살짝 꿈틀한다.
불쾌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백천이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궁금했을 뿐. 그가 아는 백천은 굳이 뻔한 말을 늘어놓는 이가 아니었다.
“화산의 은혜에…….”
“소협.”
백천이 양손을 포권하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뜬금없는 예에 곽환소가 움찔하고는 백천을 바라본다.
“화산이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입니다.”
“……예?”
곽환소가 얼이 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장강의 경계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을 것입니다. 날이 밝기 전에 강을 넘으십시오. 그걸로 해남은 안전할 수 있을 겁니다.”
“자, 잠시만요. 장문대리.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강을 넘으라니요? 그럼 화산은?”
백천이 고개를 들어 곽환소를 마주 본다.
그 눈빛.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그 눈빛을 본 순간 곽환소는 백천이 할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당연한 것을 물으시는군요.”
그런 백천의 곁으로 화산의 제자들이 걸어와 선다. 그들의 눈 역시 백천의 눈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멍청한 사질 놈을 데리러 갈 겁니다.”
“자, 장문…….”
“분명히 놈도.”
백천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흘러나왔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