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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90화 (1,391/1,567)

1390화. 사람 우습게 보는군. (5)

천천히 숙여진 고개를 따라 내려간 시선이 제 손을 바라본다.

검을 들고 있는 손. 그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체력이 다했나?’

아니. 아닐 것이다.

쉴 만큼 쉬었다. 적이 아무리 끝없이 몰려온다고 해도, 그의 체력은 그리 쉽게 소진되지 않는다.

가장 청정한 내력을 모아 만들어 낸 그의 내력은 과거 이상의 지구력을 가져다 주었으니까.

그럼에도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마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 닳아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왜?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부분이었다.

과거의 청명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상황을 몇 번이고 겪었음에도 언제나 이겨 냈고, 언제나 극복했다.

그 과정 속에서 육체의 한계는 여러 번 경험했지만, 정신의 한계는 단 한 번도 직면한 적 없었다.

그런데 왜?

“저기다!”

수풀 속에서 적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온다. 순식간에 칼날처럼 눈빛을 가라앉힌 청명이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되레 뛰어들었다.

달아나는 이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은 무엇보다 쉬운 일. 적을 정말 상대하고 싶다면, 상대가 예측하지 못할 행동을 해야 한다.

바로 지금처럼.

“아아아아악!”

청명이 자신에게 달려들 것이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는지, 허우적대던 적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다. 붉게 튀어 오른 피, 그리고 처절한 비명.

그 두 가지가 또 다른 적들을 이곳으로 불러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청명의 칼날 같은 시선이 제 뒤쪽으로 돌아갔다. 적의 병력들이 우회하여 그의 등을 포위해 오는 것이 느껴진다. 감각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영역.

파아아앗!

청명이 바닥을 박차며 뒤쪽을 향해 섬전처럼 이동했다.

“죽어라아아아아!”

적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시야를 모두 뒤덮으며 달려든다.

겨우 몇 번의 검격을 날린 시간, 그 시간 만에 그의 등을 잡을 만한 이들이라면 그 실력이야 보지 않아도 뻔한 법.

예리하기 짝이 없는 공격들이 그의 전면으로 날아든다. 그의 살을 바르고, 뼈를 부수고, 영혼을 도륙 낼 의도를 그 날에 가득 새겨 넣은 채.

카카카캉!

섬전과도 같은 청명의 검이 날아드는 병기들을 일일이 쳐 낸다. 짧은 순간 수도 없이 맞닿은 쇳덩어리들이 피워 올린 불꽃들이 어두운 숲을 순간 환히 밝혔다.

그 어둠 한중간에 빚어낸 빛 속에서, 사신의 칼날이 적도의 목을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단번에 셋의 목을 베어 낸 청명이 상대의 생사도 확인하지 않은 채, 쓰러지는 이들의 사이로 파고든다.

그들의 육체로 제 몸을 감싼 청명의 검이 일순 폭발하듯 휘둘러지며 제 몸 주위에 핏빛의 반원을 만들어 낸다.

파아아아아앗!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그에게 달려들던 이들이 허리 잘린 시신이 되어 바닥으로 허물어진다.

“후욱!”

청명의 입가에서 거친 숨이 토해져 나온다.

하지만 숨을 돌릴 시간 따위는 없다. 즉시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돌진한다. 그가 있던 자리에 날아든 창들이 연이어 땅에 틀어박혔다.

- 너는 너무도 수월히 모든 것을 손에 넣어 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들이 네게는 너무도 간단했겠지.

사방에서 무언가 번쩍인다.

검 그리고 창. 육중한 도와 긴 사슬을 매단 낫까지.

그 수많은 병기가 오직 청명, 그 하나만을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 사람들은 그런 너를 대단하다 여기고, 또한 두렵게 여긴다. 어쩌면 너 역시 마찬가지겠지.

청명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으아아아아앗!”

그의 몸 주위에 매화가 폭발하듯 피어난다. 순식간에 퍼져 나간 붉은 매화는 꽃잎이라기보단 차라리 상처에서 터져 나오는 핏방울과 닮아 있었다.

- 하지만 청명아. 너는 스스로 얻어 낸 것이 없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그저 주어진 것. 네가 원치 않았음에도 네 손에 그저 들려있었던 것일 뿐이다.

‘그래서?’

청명이 두 눈이 광망을 토해 낸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래서 뭘 어쩌라는 말인가? 그런 게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콰아앙!

바닥을 부술 듯 박찬 청명이 앞으로 돌진한다. 생로는 오직 하나. 전방. 가장 두텁게 그를 막아서고 있는 곳이다.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들에게 돌진한 청명이 알 수 없는 울분을 담아 검을 내리친다.

카아앙!

그의 검을 막아선 육중한 도가 단숨에 끊어진다. 도를 든 이의 두 눈이 채 부릅떠지기도 전에, 청명의 암매검이 그의 전신을 세로로 갈라 버린다.

육체가 두 쪽 나며 뿜어낸 피가 청명의 전신을 덮친다. 살이 탈 것 같은 뜨거움. 끊어 낸 생명이 질러 대는 비명. 그 모든 것이 청명의 검 끝에 겹겹이 쌓였다.

- 그렇기에 나는 네가 그 무게를 알길 바란다. 스스로 노력하고, 대가를 치르며 얻어 낸 것의 가치를 말이다.

“나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에 넣은 게 아니야!

댁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나는!

- 하지만 청명아.

그 순간, 청명의 검 끝이 흔들렸다.

- 다른 한편으로 나는 두렵구나. 언젠가 네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얻었을 때, 거저 주어지지 않고 네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의 의미를 이해해 버렸을 때.

검이 허공을 가른다.

적의 목을 베어 내고, 심장을 꿰뚫는 그의 검은 단 하나도 바뀐 게 없다.

그저…….

- 네가 지금과 같을 수 있을지. 여전히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지 말이다.

콰득!

부러진 도의 날이 어깨에 박혀 든다. 두꺼운 도가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생생한 감각. 그 섬뜩한 고통 속에서 청명이 발을 내디뎠다.

‘장문사형.’

청명이 입술을 짓깨문다.

청문은 항상 그런 식이다. 청명은 그가 좋았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바라보는 곳이 너무도 달랐으니까.

‘당신은 내가 정말…….’

파아아앗!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킨 청명의 검이 사방을 찔러 든다.

“크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달려오던 이들이 그 일수에 몸에 바람구멍이 뚫리며 나뒹굴었다. 폭죽처럼 터지는 핏속에서 청명이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른이 되길 바랐던 겁니까?’

알 것 같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청문은 언제고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보라 했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그 같지 않은 이들과 같은 곳에 서 보라 했다.

언제나. 그래, 언제나.

하지만 청명은 지금 이 자리에 서고서야 알 수 있었다. 청문의 진짜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언제나 청명에게 다른 이들을 이해하라고 했지만, 어쩌면 영원히 그가 다른 이들과 같은 곳에 서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청명 같은 이가 다른 이들을 이해해 버리는 순간 어떤 짐을 짊어져야 하는지를 청문만은 알았을 테니까.

도란 자신을 깎아 나아가는 것.

그 길을 누구보다 먼저 걷고 있었던 청문이기에,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통스러운지를 이해한 청문이기에, 어쩌면……. 청명만은 자신과 같은 길을 영원히 걷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게 도인의 본분에서 어긋난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흐…….”

스스로보다 타인을 우선하는 삶.

청문은 평생 그 길을 걸었다. 자신보다 다른 이가 먼저였고, 자문보다 타문을 우선시했다.

희생해야 한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희생했고, 희생시켜야 한다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를 희생시켰다.

‘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걸 버텨 냈던 겁니까? 사형?’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알 것도 같았다.

“저기다!”

숲 전체가 순식간에 살기로 뒤덮인다. 그 밀려오는 살기를 직면한 청명의 손이 다시 한번 떨린다.

‘아…….’

그 순간, 청명은 이해했다.

어째서 자꾸 손이 떨리는지. 어째서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던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지.

‘나는 지금…….’

청명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게.

‘두려운 거구나.’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할 것을 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여겼다. 삶이라는 게 그리 대단한 가치가 있다 여기지 않았으니까.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제 할 일을 끝내지 못한 어정쩡한 끝. 그저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처음으로 죽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절감하고 있었다.

다시 마주할 수 없다.

그가 알던 이들을.

더없이 익숙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고, 시답잖은 농담으로 낄낄대며 웃어 댈 수 없다. 고개를 돌리면 당연히 있어야 할 얼굴이 없다.

모든 것이 여전한 곳.

그곳에 오직 청명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청명이 제 입을 틀어막는다.

갑자기 구역감이 몰려 왔다. 배 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을 리 없음에도 몸이 자꾸만 무언가를 토해 내려 한다.

그가 모두를 지키려 한 이유가 무엇이었더라?

그래. 그는 두려웠다. 그가 만들어 낸, 더없이 소중한 그 관계에 공백이 생겨나는 것이.

백천이라는 이름이, 유이설이라는 이름이, 윤종이라는 이름과 조걸이라는 이름, 당소소라는 이름이, 그리고 혜연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문득 고개를 돌렸는데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허공이 그를 마주하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두려웠다.

존재하던 이들의 부재(不在)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그보다 뼈저리게 실감한 이는 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좋은가?

그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좋은 것인가? 그곳에 청명이 없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청명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그만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중 몇을 잃게 되더라도 그가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지금도 늦지 않았다.

지금의 몸 상태라면 이 포위를 빠져나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나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대가로 이곳에 있는 이들 중 태반이 화산과 해남의 뒤를 뒤쫓게 되더라도, 그 대가로 해남이 전멸하고 그가 알던 얼굴 중 몇몇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더라도 그만은 살아…….

“우웨에에에엑!”

청명의 입에서 붉은 피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입을 틀어막은 손에 잔뜩 묻은 피를 흐려진 눈으로 바라본 청명이 쿡쿡하고 낮은 웃음을 흘렸다.

“……심마(心魔)가 와도 더럽게 왔군.”

그래. 두렵다.

죽는 것은 너무도 두렵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손 닿을 곳 하나 없이 또다시 홀로 죽어 가는 것이다. 십만대산에서 홀로 죽어 가던 그 기분을 다시 한번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다.

적들이 검은 물결처럼 그에게 몰려든다.

“어이, 사형. 보고 있습니까?”

청명이 하늘 위를 올려다본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형이 바라던 건 하나도 해 준 적이 없네요.”

청명이 검을 움켜잡는다.

그의 발이 바닥으로 파고든다. 절로 떨어지려는 발을 그 바닥에 묶어 두기라도 하려는 듯.

“그러니까……. 바라지도 마십시오. 나는 원래 그런 놈이니까.”

적들이 덮쳐 온다.

떨리는 손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고, 심장은 여전히 울부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청명은 그 자리를 지켜 냈다.

여전히 그의 안에 자리한 진득한 후회가 그가 지켜 낸 것과 이어질 것이다. 설령 그 과거와 미래가 맞닿은 곳에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의지란 목숨으로 잇는 것이 아니니까.

파아아아앗!

벼리고 또 벼려 낸 냉정함이 검으로 화해 허공을 꿰뚫는다.

그건 검귀의 검이자, 또한 검존의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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