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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89화 (1,390/1,567)

1389화. 사람 우습게 보는군. (4)

허벅지에서 욱신욱신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허용한 일격이 생각 이상으로 깊은 모양이었다.

아찔한 현기증이 시시때때로 눈앞을 덮쳐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상처로 스며든 독 기운이 몸을 빠르게 좀먹고 있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숨이 점차 가빠졌다.

“후욱! 후욱! 후욱!”

하지만 지금 멈출 순 없다.

“쫓아라!”

험한 목소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추격자는 무자비하고 또한 잔인하다. 저들에게 잡히는 순간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 만큼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고통이 두려운 게 아니다. 정말로 두려운 건, 겨우 이런 곳에서 삶을 끝내는 것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손에 쥐지도 못한 채 버러지처럼 땅을 기다가 죽게 되겠지.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쇄애애애애액!

그 순간 장딴지에서 극통이 느껴졌다.

“큭!”

균형을 잃은 소년이 달리던 기세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몇 번이나 튕겨 오르며 구르기를 반복한 끝에 소년의 몸이 널브러졌다.

휘익!

짧은 파공음과 함께 소년의 앞쪽에 몇몇 무인들이 내려섰다.

“네 이놈…….”

청의를 입은 그들은 지독하고 악랄한 눈빛으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이미 전신에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으니 가여울 만도 하건만, 그들의 눈빛에는 동점 한 점 없었다. 차라리 철천지원수를 바라보는 눈이 더 온화하게 느껴질 정도로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에게 증오를 드러낸 이들에게도 정당한 이유는 있었다.

“감히…… 겁대가리 없이 사문의 귀보를 훔쳐 달아난 거로도 모자라, 방주를 시살해?”

“네놈을 천참만륙하여 방주의 원한을 갚겠다.”

지금 앞에 있는 소년은 일견 철없고 힘없는 아이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갈(蛇蠍)조차 두려워할 악독한 마귀였다.

그를 후계로 삼겠다며 특별히 대하고 무한한 은혜를 베풀어 준 방주를 운공 중에 습격했다. 그리고 방의 진신절기를 탈취해 달아났다. 심지어 이놈이 도주 중에 살해한 이들의 수만 해도 물경 열에 이르렀다.

“말 못 하는 개도 은혜가 뭔지는 안다. 이 개만도 못한 놈! 방주께서 네놈을 그토록 예뻐하셨거늘!”

“큭큭큭큭.”

드러누워 있던 소년은 억눌린 소리로 웃어 대다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은혜라…….”

피에 젖어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타고나길 색이 옅은 두 눈이 드러났다. 섬뜩한 광망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그런 게 있던가?”

“……뭐라?”

“그 늙은이도 결국은 나를 키워 제 수족으로 삼으려 한 것뿐이지. 내게 재능이 없었다면 과연 그 은혜라는 게 내게 돌아왔을까?”

“이놈이…….”

“사람들은 참 이상하지. 평소에는 그런 것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가다가, 입을 털어 대야 할 때는 대단한 것처럼 떠받들어 대니까 말이야.”

소년이 땅을 움켜쥐듯 손아귀에 힘을 주며 느리게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멍청한 놈. 설사 방주의 뜻이 그랬다 해도, 느긋하게 방주의 진전을 사사했더라면 너는 손꼽히는 고수가 될 수 있었을 터. 너는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비참하게 죽게 되겠지.”

“손꼽히는 고수라……. 그 늙은이 따위의 제자가 되어서?”

소년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낭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신랄한 비웃음과 자조까지 노골적으로 섞여 있었다. 도무지 어린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올 만한 웃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손에 꼽히는 고수라니. 이따위 시골구석에서 이름을 날려 봐야 대체 뭐가 바뀐단 말인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 비루하기 짝이 없는 명성.

그따위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삶이란 얼마나 무가치한가?

누군가는 그런 것에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소년은 아니었다. 오르지 못하는 삶은 비참한 죽음보다도 끔찍했다.

“방주뿐만이 아니다! 사문의 모두가 네놈에게 기대를 걸었다. 네놈이라면…….”

“기대라니. 대체 뭘?”

소년이 비웃으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내가 대단해진다고 너희의 삶이 바뀌나?”

“이, 이놈!”

“그런다고 너희의 가치가 달라지는가? 어차피 쓸모없는 인생일 뿐인데.”

사내는 이제 분노하다 못해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그때 소년의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문? 기대? 그따위 것에 기대고 있으니까 너희가 그렇게 사는 거다.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 바꾸고 싶다면, 얻고 싶다면 학대해야 할 것 역시 자신뿐이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가 분에 넘치는 걸 손에 넣어 봐야 결국 남는 건 비참함뿐이지.”

“…….”

“나는 그런 식으로는 살지 않는다. 원하는 게 있다면 내 손으로 얻고, 그 대가로 치러야 할 희생 역시 스스로 감내할 것이다.”

어린아이의 치기나 세상을 모르는 이의 오만……. 이런 말로 소년을 표현할 수 있을까?

아이의 목소리에는 그의 배는 넘게 살아온 이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독기가 어려 있었다. 도무지 그 근원이 무엇인지 짐작도 안 갈 정도였다.

“……네놈이었구나.”

그때 한 사내의 입에서 앓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야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이.

“조령문(朝嶺門)의 소문주를 죽이고 비전을 취한 이도…… 악호방(惡豪房)의 공녀를 죽이고 신물을 수습해 달아난 이도…… 모두 네놈이었구나.”

그 말에 모두가 충격을 받으며 말을 꺼낸 이를 바라보았다.

“그, 그럼 요 몇 년간 문파마다 일어났던 사건이 전부……?”

“……말도 안 돼. 그들이 그리 멍청할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멍청해서 당했나?”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절대 멍청할 수가 없다.

명도방(明道房)은 복주 일대에서는 사신과도 같은 명성을 떨치는 문파였다. 수뇌가 정말로 멍청했다면, 지금과 같은 지위를 무슨 수로 손에 넣었겠는가?

“우리가 멍청한 게 아니다. 저놈! 저놈이 너무도 요악한 것뿐이다. 그 짧은 시간 만에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 넘길 만큼.”

사내들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누군가가 경멸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개만도 못한 놈.”

“큭큭…….”

소년은 제 얼굴에 흘러내린 피를 느릿하게 훔쳤다. 붉은 피가 입꼬리를 따라 마치 경극 배우의 과장된 화장처럼 번졌다. 얼핏 보기엔 광인이 입을 활짝 벌리며 웃는 모습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소년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순진하고 정명해 보이던 얼굴이 더없이 요사한 마귀의 얼굴로 돌변했다.

“그게 과연 내 잘못인가?”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고……!”

“알 수 있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어떤 생각으로 너희를 보고 있는지.”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간악한 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서다.

“모르겠지. 당연히 모를 수밖에. 타인의 마음 같은 건, 타인의 의도 같은 건 알아낼 도리가 없으니까. 겨우 일 장 앞에 서서 증오하듯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절대 알 수 없겠지.”

사내들의 눈이 짧게 떨렸다. 소년은 미소를 흘렸다.

“그런데 대체 너희는 무슨 배짱으로 속마음조차 알 수 없는 타인을 그리 철석같이 믿었지? 그리고 어째서 배신당했다며 분노하는 거지? 너희가 준 믿음은 당연히 돌려받아야 하는 건가? 그러지 못하면 비난하고 욕할 권한을 얻는 거고?”

“무슨 궤변을…….”

“그런 거라면 얄팍하기 짝이 없네.”

어쩌면 이건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궁금증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에게 의지하는 이들도, 타인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도, 다른 이들이 제 뜻대로 움직여 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마저도.

소년이 보기에 그건 한 치도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짓거리나 다름없었다. 그 안에 어떤 괴물이 있을지, 어떤 심연이 있을지도 모르는 채 근거 없는 낙관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거는 광인의 행각 말이다.

저들은 그를 미친 인간쯤으로 볼지도 모르겠지만, 소년이 보기에 미친 건 오히려 세상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이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소년의 눈에 그런 세상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웠으며…… 동시에 더없이 아름다웠다. 반짝거렸다.

그렇기에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그가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것들이 가득한 이 세상을.

“뭐라 지껄이든 상관없다. 우린 네놈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받아 내겠다.”

“너희 따위가?”

“배짱은 인정하마. 하지만 어린놈아. 너는 세상을 너무 몰랐다. 그리고 네 덕에 다른 이들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명도방의 복수가 얼마나 잔인하고 철저한지!”

그 말을 들은 소년이 비웃음을 흘렸다.

물론 몸 상태는 최악이다. 이 와중에 저 멀리 또 다른 추적자들도 그를 쫓아오고 있다. 하지만 소년은 조금의 고독도 외로움도 느끼지 못했다.

“이래서 머리가 나쁜 것들은…….”

“뭐라고?”

“네 입으로 지껄였지. 조령문의 비급을 훔친 이도 나고, 악호방의 귀보를 훔친 이도 나라고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움찔했다.

“그럼 그것들을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나? 푼돈에 팔아먹기라도 했을까 봐?”

“다, 당장 저놈을…….”

“이젠 알겠니? 내가 달아난 이유는 너희 따위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여기서 내 이름이 더 퍼지는 걸 원하지 않은 것뿐이란다. 미리 알았어야지!”

소년의 두 눈에서 요사스러운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악에 받친 고함.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피부를 찌르는 듯한 살기.

온 세상이 오직 그 하나를 잡아 죽이기 위해 거세게 소용돌이치며 악을 쓰는 것만 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세상은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그 역시 세상이 다르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이 더러운 세상을 발아래 굴복시키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온전히 찾게 될 것이다.

비록 그 길을 걷다 찢기고 찢겨 단 한 점의 육신마저 남기지 못하고 해진다고 해도, 후회 따위 있을 리 없다.

그저 한번 웃고(一笑) 지옥으로 가 버리면 그만.

“쳐라!”

달려드는 이들을 보며 소년, 장일소가 눈을 휘고 웃었다.

‘나는 손에 넣는다.’

얻지 못할 그 모든 것을.

* * *

천천히 눈을 뜬 장일소가 나른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드문 일이군.’

꿈 같은 건 잘 꾸지 않았는데 말이다. 비참하게 굴러다니던 그때의 꿈은 더욱이.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장일소는 문득 묻고 싶었다.

얻으려 했던 것을 얻었는가?

아니다. 아직 얻지 못했다. 무엇 하나 손에 넣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지독히도 부러워하는 이 권력도, 더없이 드높은 명성도, 평생을 써도 마르지 않을 이 부귀조차도 여전히 하찮기만 했다.

그 무엇 하나 그가 진정으로 얻고자 했던 건 아니니까.

하지만 장일소는 확신했다. 이 길을 관철하면 곧 모든 게 그의 손안에 떨어질 것이라고.그 뒤에는…….

“……글쎄.”

장일소가 나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뒤는 내 알 바 아니지. 안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목표를 이룸으로써 얻게 될 삶이 아니라, 목적을 이룬다는 그 사실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마 그걸 이해해 줄 이는 지금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서 발버둥 치고 있을 것이다. 과거의 장일소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아마 과거의 장일소가 느꼈던 모든 것들을 똑같이 느끼겠지.

장일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도 그럴 수 있을까?

“어느 쪽이든 괜찮단다.”

얼핏 자애로워 보이는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붉은 입술은 점차 뒤틀리며 섬뜩한 기운을 흘려 내었다.

“네가 이쪽으로 오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

그럼 장일소는 얻게 될지도 모른다.

천하에 단 하나. 유일하게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자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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