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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88화 (1,389/1,567)

1388화. 사람 우습게 보는군. (3)

“이……!”

두 눈에 핏발을 가득 세운 조걸이 뭔가 소리치려 입을 뗐다. 하지만 그 전에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거의 부러지도록 콱 움켜잡았다.

돌아보니 윤종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조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건 부탁도, 조율 가능한 의견도 아니다. 장문대리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떨어진 명령이다. 애초에 ‘파문’까지 언급해 버린 이상, 타협의 여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조걸도 알고 있다. 알고는 있다.

하지만…….

“정말 그래야 하는 겁니까?”

그럼에도 참지 못해서 말이 나와 버렸다. 백천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자 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혼동하지 마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조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럼 저라도…….”

“말했을 텐데.”

백천은 더 들어 보지도 않았다. 얼굴이 자못 사나웠다.

“이견은 없다. 네가 화산의 제자라면 내 명을 따라라. 정 가고 싶다면 그 가슴에 새긴 매화를 내어놓고 가라.”

차갑디차가운 목소리에 조걸이 분노로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

“장문대리의 명을 받듭니다.”

하지만 조걸이 더 저항하기 전에 윤종이 선수를 치듯 말했다.

“조걸. 앞으로 나가 길을 열어라.”

“…….”

“당장!”

조걸은 윤종과 백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말도 없이 몸을 획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말없이 그들을 빤히 보던 유이설과 당소소도 그런 그를 따라 앞쪽으로 향했다.

“비켜! 이 개자식들아!”

울분에 찬 노호성을 내지르며, 조걸은 앞을 막아서는 이들을 순식간에 도륙했다. 잠시 주춤했던 일행이 다시금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땅을 박차며 백천은 제 옆의 윤종을 돌아보았다.

“조걸이를 도와줘라.”

“네.”

“……놈을 진정시켜 줘서 고맙다.”

“그런 말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장문대리의 명을 따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요.”

“…….”

“그리고 저는 사숙의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의도가 어긋나는 순간, 모두가 공멸하겠죠. 틀린 방향일지라도 끝까지 굳건하게 관철해야 실낱같은 길이라도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종이 한 말은 그가 내린 판단의 근거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무엇보다, 그들이 구하러 가는 걸 청명이 놈이 원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걸 내려놓고 달려가 봐야 마주할 수 있는 건 절망 어린 놈의 얼굴뿐이겠지. 백천은 그걸 보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때 윤종의 목소리가 조금 뒤늦게 흘러나왔다. 백천은 고개를 돌려 윤종을 바라보았다.

“마음은 도를 따르려 하지만, 몸은 그저 사람이기에 힘겨운 것이다. 저는 그 말을 이제 이해하겠습니다.”

“…….”

“사숙의 결정이 옳다는 것도 알고, 그게 사숙의 최선이라는 것도 이해합니다만…….”

윤종이 살짝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청명이 놈이 죽고 우리가 멀쩡히 살아 강북을 밟는 일이 벌어진다면, 저는 평생 사숙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그게 설사 틀린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반쯤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백천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윤종은 감탄, 아니 어쩌면 조소로 들릴 만한 말을 남기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장문인이 되셨군요, 사숙.”

홀로 남겨진 백천은 잠시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망설임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두 분은 좌우를 맡아 주십시오.”

그 침착한 분부에 혜연과 남궁도위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한숨을 내쉰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우로 갈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백천과, 다른 한 사람이었다.

“좋은 결정입니다.”

“…….”

“혹시나 장문대리께서 무모한 결정을 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제가 괜한 우려를 한 모양입니다.”

“녹림왕께서는…….”

“예, 후방에서 상황을 보겠습니다. 그럼.”

임소병은 뒤쪽으로 빠지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혹 장문대리라면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분을 어떻게든 억누를 뿐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깊은 숨을 아주 길게 토해 내고. 입 안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망할 새끼…….’

터지도록 움켜쥔 주먹에서 피가 배어났다. 그의 손톱이 손바닥 살을 가르며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은 그 손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표정만 봐선 그가 지금 어떤 기분에 젖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서둘러라. 장강까지 단숨에 간다! 한시라도 더 빨리!”

* * *

청명이 슬쩍 고개를 들어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훑어봤다.

“흐음. 구박할 일은 없겠네.”

적들이 밀려오는 형세를 보아하니, 다른 쪽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보였다. 신경 쓸 게 없다는 뜻이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백천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과도 같은 결정을 해 버릴까 봐 내심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런 선택을 할 놈이었다면 장문대리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청명의 이 모든 행위는 따지고 보면 백천에 대한 완벽한 신뢰에서 시작되었다.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그가 절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말이다.

청명이 작게 웃었다.

‘얼마 만이더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그의 뜻을 알고, 그 행동에 맞춰 줄 것이라 믿어 본 게. 그 사람의 명석함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믿어본 것이 말이다.

뇌리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항상 그를 구박하고 야단치면서도 언제나 그를 믿어 주었던 이의 얼굴이.

“에이, 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어림도 없지.”

웃어 버린 청명이 검을 들어 올렸다. 허세를 부리기는 했지만, 사실 여유를 부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백천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건, 결국 저 지긋지긋한 만인방 놈들이 그 하나만을 노리는 데 장애물이 없어졌다는 의미기도 하니까.

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이 상황을 이겨 내는 게 쉬울 리 없다.

“뭐, 그래도…….”

“죽어라아아아아아!”

달려드는 만인방도의 도를 일격에 쳐 내고는 단번에 그 목을 베었다. 잘린 경동맥에서 뜨거운 피가 화악 뿜어졌다. 동시에 몸을 날린 청명은 제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적의 비도를 연이어 튕겨 냈다.

“쉽지 않다는 말이 못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

포위당했다고 죽어야 한다면, 적이 그 하나만을 노린다고 목을 내주어야 한다면, 전생의 그는 목숨이 스무 개여도 부족했을 것이다.

콰아앙!

땅을 강하게 박찬 그의 머리 위로 붉은 무복 차림의 적도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매화검귀, 놓치지 않는다!”

“검귀?”

우두둑.

검 손잡이를 부러지도록 세게 움켜잡은 청명이 하늘을 향해 검을 발출했다. 연이어 쏟아지는 창끝을 순식간에 쳐 날린 그는 일순간 훤히 드러난 그들의 상체를 난도질해 버렸다.

“검존이라고 불러야지, 멍청한 새끼들아. 어디 어르신한테 그런 사특한 말을 붙여. 뒈지려고. 퉷!”

입 안으로 차오른 피를 뱉어 낸 청명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아직 아니야.’

조금 더.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한다.

그의 목적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도, 달아나는 것도 아니다.

너무 빨리 달아났다가는 적의 병력이 나뉜다. 그렇다면 뒤처진 이들은 따라잡을 가능성이 희박한 그를 쫓기보다는 본대를 뒤쫓는 선택을 하게 될 터.

그걸 저지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수를 더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여야 한다. 결코 그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그럼 그 틈에 화산과 해남이 강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강 건너에는 소림을 비롯한 구파가 있어서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그들을 쫓기가 쉽지 않을 테고 말이다.

“하핫…….”

조금 우스웠다.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조금 더 구하고 싶은 쪽을 포기한다. 그건 언젠가 청문이 그에게 강요했던 선택이다. 그리고 청명은 그 선택을 하게 했던 청문을 죽는 순간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그를 여전히 존경하고 친애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응어리를 풀어내지 못했다. 아마 청문은 죽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한스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름 아닌 청명이 백천에게 그 저주스러웠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과거 청문이 그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저승에서 사형을 만나면 사과해야겠네.’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투정부터 늘어놓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적어도 천마 새끼의 목을 따러 갈 때는 이해한다고 말했을 텐데. 말이라도 그렇게 해 줄 것을.

백천은 그를 원망할까? 과거 그가 청문을 원망했던 것처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버텨 내야 한다. 그리고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화산의 장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니까. 앞으로도 그는 이런 선택을 수없이 해야 할 테니까.

그 위대했던 청문처럼 말이다.

“그럼 남은 건…….”

청명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적들을 주시했다.

“쫓아라! 놈은 혼자다! 쉴 틈을 주지 마라!”

“……사람 우습게 보는군.”

혼자라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이제 그의 등 뒤에 당보는 없지만, 청명은 과거의 자신보다 더 단단해졌다.

이제 어떻게든 그를 지켜 내려 했던 청문은 없지만, 그는 스스로 타인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과거의 그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청명의 검이 환상처럼 허공을 갈랐다. 검 끝으로 매화를 그려 내어 달려들던 이들을 단번에 갈기갈기 찢은 청명은 이내 수풀 사이로 빠르게 기는 뱀처럼 쇄도했다.

“오오오오오!”

퍼어어엉!

눈앞에 터지는 검은 독분(毒粉).

숨을 잠깐 멈춘 청명은 몸을 더욱 낮춰 그 독분을 뚫고 지나갔다.

검은 연기를 뚫고 나가기 무섭게 사방에서 수십 개의 사슬낫이 날아들었지만, 청명은 일 검에 그 모든 사슬낫을 잘라 냈다.

잠시나마 몸에 과거의 감각이 깃드는 기분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뚫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정도쯤은……!

“여기 있었구나, 이 멍청한 새끼야! 누가 너 혼자 싸우게 내버려 둔대?”

두 눈을 부릅뜬 청명이 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악을 쓰며 달려오는 조걸도, 죽여 버리겠다는 듯 그를 노려보고 있는 백천도, 무표정한 유이설도, 울먹이는 당소소도…….

그곳에는 없다.

청명이 피식 웃었다.

파앗.

땅을 박찬 청명이 쾌속하게 앞으로 쏘아졌다.

가지 끝에 홀로 매달린 나뭇잎이 느릿한 바람에 흔들렸다. 바람이 잦아들고 세상이 다시 고요로 물들어도, 홀로 남은 나뭇잎은 여전히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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