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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87화 (1,388/1,567)

1387화. 사람 우습게 보는군. (2)

“더 빨리!”

“예!”

대답은 곁이 아닌 저 앞에서 들려왔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니, 그가 입을 열어 그 뜻을 전하려 들기도 전에 사형제들이 이미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와 이런 말을 하자면 조금 이상하겠지만, 저놈들과 호흡이 특별히 잘 맞는다고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화산의 제자들은 하나하나 그 개성이 너무도 강해서 어우러지기 어려웠으니까. 청명이라는 구심점이 없었다면, 어쩌면 평생 서로를 소 닭 보듯 지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마치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다. 단순히 명을 듣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백천을 중심으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앞이 조금 느슨해졌다고 생각하면 조걸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앞을 메운다. 지금 조걸의 상태로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윤종이 달려간다.

유이설이 무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려 보면 이미 당소소가 귀신처럼 그 뒤에 달라붙어 있다. 격정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검 끝에는 유이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마치 지금 백천의 마음처럼 말이다.

백천이 검을 벼락처럼 떨쳤다. 붉은 검기가 윤종의 옆으로 달려드는 적도를 단번에 베어 냈다.

“감사합니다, 사숙!”

“신경쓰지 말고 앞만 봐라!”

“예!”

백천의 눈이 살짝 사나워졌다. 딱히 대단한 구석이 없는 적들이지만, 그것도 시간에 한계가 있단 조건이 추가되면 더없이 부담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곳엔 더 이상 그들만 있지 않다.

“하아아압!”

위로 솟구치며 기합을 내지른 당패가 손을 휘둘렀다. 그 끝에서 수십의 빛살이 뿜어졌다. 이내 그것들은 주춤주춤 물러나던 적들의 정수리에 족족 박혔다.

그 정체를 본 조걸이 순간 경악했다.

“아니, 뭔 솔잎으로……?”

“저 정도야 침도 필요 없죠! 죽이지는 못하지만 도움은 될 겁니다!”

“……암기도 배울 만하겠네.”

당가의 피를 이은 이가 그 뒤를 받치고, 설소백 역시 아직 여물지 못한 손에 잡은 검을 필사적으로 휘두르고 있다.

“화산에만 맡겨 두지 마라! 우리가 살아날 길은 우리가 열어야 한다!”

“예!”

그리고 언제나 백천의 명만을 기다리던 해남의 제자들도 어떻게든 천우맹보다 더 앞서 나가 적을 격살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가자, 자양!”

“예, 사형!”

곽환소와 이자양은 섬광처럼 앞으로 쇄도해 당황한 사파들을 일거에 베었다. 두 사람의 검 끝에서 흘러나온 물빛 검기는 언젠가 봤던 해남의 바다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백천의 얼굴에 묘한 감상이 떠올랐다.

이런 광경을 또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아니, 이런 광경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가의 소가주가 화산 제자의 어깨를 밟으며 뛰어오르고, 해남의 장문제자가 빙궁 궁주를 향해 날아드는 도를 쳐 내려 몸을 날리는 광경을 말이다.

정파로 묶기도 어렵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는 정파라 부를 수 없는 이도 있으니까.

출신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살아온 길도 다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제 옆에 선 이를 어떻게든 지켜 내고, 함께 길을 열어 낼 뿐이다.

‘어쩌면…….’

백천의 입술이 움찔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흥이 무엇인지 확실히 단정 지을 수가 없어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로 소원하던 화산을 하나로 묶고, 결코 이어질 수 없을 것 같던 여러 문파를 인연이라는 끈으로 동여매고, 모두가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조차 어떻게든 구해 냈던 그 모든 일.

청명이 놈이 저질러 댄 그 모든 일은 어쩌면 이 광경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놈이 직접 말해 줄 일이야 영원히 없겠지만, 물어본들 비웃음만 사겠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사숙!”

“그래!”

백천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을 떨쳤다.

‘나도 멀었군.’

모든 정신을 하나로 집중해 길을 열어야 하는 와중에 이런 헛생각이라니. 아직 장문인으로는 한참 모자라다. 그는 자책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거리는 얼마나 벌렸지?’

상황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청명이 놈을 비롯한 혜연과 남궁도위가 시간을 끌어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실력만으로 ‘수’를 극복하는 게 가능했다면 세상 그 어떤 강자도 세력 따위는 만들지 않을 테니까.

결국 적은 추격해 올 것이다. 백천은 이들을 모두 이끌고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저 먼 광동에서부터 이곳까지 악착같이 따라붙은 놈들이다. 그들을 떼어 낸다는 게 정말 가능하긴 할까? 심지어 이렇게 부상자들까지 데리고?

하지만 사실 백천의 확신은 중요하지 않다. 할 수 있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그저 멸망뿐이니까.

그때였다.

“사숙, 뒤쪽에……!”

백천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전력을 다해 달려오고 있는 혜연과 남궁도위가 보였다. 땅을 박찰 때마다 튀어 오르는 핏방울이 그들이 얼마나 악전고투를 겪고 왔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두 사람이 단숨에 해남 제자들을 뛰어넘어 백천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장문대리!”

“두 분 고생하셨…….”

백천의 입이 그대로 굳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발견한 것이다. 악에 받친 듯하면서도 겁에 질린 듯한 그 표정이.

순간 백천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 장문…….”

“청명이는.”

“…….”

“청명이는 어디 있습니까! 뒤쪽에 아직 남은 겁니까?”

백천의 물음에 혜연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를 대신하여 남궁도위가 절박한 얼굴로 외쳤다.

“도장께서……! 도장께서 합류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사라졌습니다!”

“……예?”

불의의 공격이라도 당한 듯, 백천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남궁도위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토해 내듯 말했다.

“적진에 파고든 도장께서 방향을 달리하여……. 빌어먹을! 뭐라 말해야 하지! 아, 동쪽! 동쪽으로 가셨습니다! 놈들의 태반이 저희가 아니라 도장을 쫓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절반 이상이! 그…… 수는 별 차이가 없는데, 그게…….”

평소의 남궁도위라면 결코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언어로 횡설수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당황하고 절망적인 기색이 역력했다.

백천은 그 엉망진창인 말을 듣고도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놈들이 녀석을 따라갔단 말입니까?”

“예, 장문대리!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백천의 눈이 휘청 흔들렸다.

정상적이지 않다. 그 많은 이들이 겨우 한 사람을 추적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그 순간 백천의 시선이 격하게 한쪽으로 꽂혔다.

“녹림왕!”

비명 같은 외침에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던 임소병이 시선을 마주했다. 특별히 놀란 기색이 없는, 그저 싸늘한 눈빛이었다.

그제야 백천은 깨달았다. 평소였다면 내도록 옆에 달라붙어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을 임소병이 조금 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으…….”

백천이 이를 갈아붙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미 그도 이해하고 있으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왜 청명이 놈이 방향을 틀었는지, 그리고 왜 녹림왕이 침묵하고 있는지.

“이 등신 같은 새끼가!”

백천의 입에서 끝내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도 안다. 지독할 정도로 노력해 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청명이 놈은 합류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미끼가 되어 후방에 있는 이들을 끌어들인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이 살아남을 테니까.

조금 전 백천이 보았던 대로 이곳에 있는 이들의 역량은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높아졌다. 적의 주력과 맞상대하는 일만 없다면, 살아서 강을 건너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럼 청명이는요?”

백천이 움찔했다.

조걸이 어느새 그의 곁으로 뛰어와 있었다. 두 눈이 격한 감정으로 일렁였다.

“그럼 청명이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정적만이 돌아왔다. 말할 것도 없다. 이미 보았으니까. 적을 저지하기 위해 홀로 남은 청명이 놈이 어떤 꼴이 되었었는지.

협곡이라는 지형의 이점까지 활용하고도 놈은 조걸과 유이설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잃을 만한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넓은 개활지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더 많은 이들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어딥니까!”

조걸의 입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동쪽? 동쪽이라고 하셨습니까? 사숙! 그럼 우리도 방향을…….”

“안 됩니다!”

하지만 임소병이 칼날 같은 목소리로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건 청명 도장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뭔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럼 선택하십시오.”

“……예?”

“적의 주력과 맞상대해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해남을 버리고 능력이 되는 이들만 빠져나가는 것.”

조걸이 입을 다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장강은 짐을 끌고 돌파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모두가 알고는 있다. 장강에 도착하는 순간이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진짜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을. 하지만 그저 외면해 왔을 뿐이다.

“그건 그때 가서 어떻게든…….”

“요행 같은 소리 할 거라면 아예 지껄이지 마십시오. 상대는 장일소입니다. 우리에게 요행 따위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짧게 몸을 떨었다. 장일소라는 세 글자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이들이다.

“해남을 살리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적의 주력과 맞상대하지 않는 것. 그러려면 누군가가 그들을 유인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청명이라고요?”

“예.”

임소병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다행히 저놈들도 우리 따위에겐 딱히 관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장일소 놈은 해남과 우리를 모두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만큼은 반드시 죽일 생각인 것 같으니까요. 강남행이 시작될 때는 그럴 의도가 없어 보였지만, 중간에 마음이 바뀐 것이 분명합니다.”

“…….”

“그러니 내버려 두고 가십시오. 그게 청명 도장이 원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개 같은 소리 작작 지껄이십시오!”

조걸의 두 눈에 살기가 치솟았다.

“누가 그 새끼를 제물로 바치고 살아나고 싶다고 했습니까? 말 같은 소리를 지껄여야지. 화산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럼 죽으러 가시겠습니까? 모두를 이끌고?”

“당연히…….”

“알았어야지!”

임소병이 그답지 않게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당신들이 입만 열면 지껄이는 그 협의라는 건,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짓거리라는 걸! 그걸 용인할 생각이었다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가 같은 짓을 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순간 주변이 싸늘할 만큼 조용해졌다. 임소병이 냉소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알았어야지, 멍청한 인간들아.”

조걸은 말없이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발견했다. 넓은 소매 안에 반쯤 감춰진 임소병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그렇기에 이제 조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히 백천이었다.

“사숙. 명을 내려 주십시오.”

“…….”

“놈을 구하러 가야 합니다!”

“들어라.”

그 순간 백천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명한다. 이견은 용서하지 않는다. 특히 화산에 소속된 자가 이 명을 거역할 시, 파문으로 다스릴 것이다.”

“……사숙?”

묘한 불길함에 조걸이 백천을 바라보았다. 깎아 놓은 듯한 얼굴에선 감정의 편린조차도 느껴지질 않았다.

“……청명이 놈 쪽의 상황은 무시한다.”

“사, 사숙!”

조걸이 저도 모르게 황급히 손을 뻗었다. 이어 나올 백천의 말을 틀어막으려는 듯이. 하지만 그의 손이 채 닿기 전에 백천의 입에서 냉정한 명령이 흘러나왔다.

“전원 장강으로 간다. 전력을 다해 길을 열어라. 이견은 용납하지 않는다.”

서늘한 비수가 그들의 가슴을 베어 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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