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5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5)
“도, 도장?”
달아나고 있던 해남의 제자들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청명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계속 가!”
“예!”
하지만 청명의 외침에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게다가 저 청명이 예측 못 한 기행을 벌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까.
오히려 이들을 당황케 한 건, 청명이 아닌 그 뒤에서 망부석처럼 청명을 바라보는 임소병의 모습이었다.
녹림왕 임소병.
아무래도 해남의 제자들이 가깝게 느낄 만한 이는 아니다. 천우맹의 이름하에 함께 오지 않았다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사이조차 아니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항상 냉소적인 태도로 모두를 바라보던 임소병이 저런 모습으로 서 있다니.
“……노, 녹림…….”
으득.
누군가가 말하는 목소리에, 순간 임소병이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항상 여유롭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부채가 핏줄 돋은 그의 손안에서 부러질 듯 휘어졌다.
잡아먹을 듯 청명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임소병의 시선이 그의 앞에서 멈칫한 해남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뭐 합니까?”
“……예?”
“주춤대지 말고 앞으로 따라붙으십시오! 당장!”
“아, 예! 예!”
해남의 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짓쳐 달렸다. 그런 그들을 흘낏 본 임소병은 입술을 깨문 채 청명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몸을 휙 하고 돌렸다.
‘빌어먹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이깟 해남 따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사를 함께한 동료? 언젠가는 힘이 되어 줄 자들?
웃기는 소리!
동료고 미래고 일단은 내가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던가? 동료야 새로 만들면 되고, 힘이 될 이들은 길러 내면 그만이다. 그 무엇도 당장의 내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니, 중요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저런 것들을 위해 위험을 자초해야 한단 말인가? 대체 저 정신 나간 인간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기에?
그때, 녹림왕을 발견한 윤종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녹림왕. 청명이는……?”
임소병은 순간 일그러질 뻔한 표정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답했다.
“후방을 막을 겁니다.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가십시오!”
“후방이요? 이미 두 사람이…….”
“이럴 시간 없습니다! 앞쪽을 뚫으십시오! 뒤에 남은 사람들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아, 알겠습니다!”
윤종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땅을 박찼다.
녹림왕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앞을 급하게 뚫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들이 화산검협의 의도를 알아채서 그의 뜻과 다른 행동을 하는 순간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어느 한쪽으로 확실하게 노선을 정하지 못한 계획은 파멸을 가져온다는 걸, 임소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미 후방을 향해 멀리도 달려갔다.
우드득.
결국 부채를 콱 틀어쥐어 부러뜨려 버린 임소병은 냉정히 고개를 돌렸다. 깨물려 있던 입술에서 피가 배어난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스님!”
“압니다!”
쿠웅!
진각을 내밟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는 것과 동시에, 혜연의 주먹에서 수십 줄기의 권력이 쏟아졌다. 대개 진중하고 묵직한 소림의 무학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협적으로 보이는 권력이다.
파죽지세로 밀어닥치던 이들이 그 권 앞에 주춤거렸다.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겁화를 혜연의 권이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혜연도 알고 있었다. 그와 남궁도위의 힘만으로 이들을 저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은 그저 저 앞으로 간 이들이 조금이라도 멀리 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우오오오오!”
남궁도위의 검이 무수한 백광을 뿜었다.
그의 검도 혜연의 권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화려하고 거대하지만, 실속은 부족한 검. 오직 적을 위협해 밀어 내기 위한 검이다.
“큭!”
쏟아지는 검기에 만인방도들이 주춤했다. 두 사람의 공격에 얼마나 강한 내력이 실려 있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콰득!
“커헉!”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던 이의 목을 꿰뚫고 시뻘건 도가 삐죽이 나왔다. 제 수하의 목에 직접 도를 찔러 넣은 이의 눈은 핏발이 돋아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그가 괴성을 질렀다.
“물러서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선택해라! 저놈들에게 죽을 건지, 아니면 내 손에 죽을 건지!”
이 말을 듣고도 물러설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모두가 이를 악물었다.
“달려들어라, 당장!”
대답 대신 짐승과도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혜연은 어떻게든 적들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 다시 한번 권력을 내뿜었다.
“아―미―타―불―!”
웅혼한 사자후와 함께 터져 나온 장엄한 불광이 마라(魔羅)처럼 달려드는 이들을 때리고 짓눌렀다. 그러나 달려드는 이들은 압력에 의해 피부가 터져 나가는 와중에도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죽어라아아아아아아!”
어느새 혜연의 앞엔 만인방도 하나가 피떡이 된 채 기어이 도달했다. 혜연이 이를 악문 그 순간.
파아아아아앗!
순간적으로 날아든 붉은 검기가 만인방도의 목을 비정하게 갈랐다.
놀란 혜연이 시선을 돌렸다. 비조처럼 쇄도해 오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해, 이 멍청이들아!”
“도장!”
청명이 지체 없이 그들을 지나쳐 적의 한중간으로 뛰어들었다.
파라라라라락!
앞으로 달리는 와중에도 그의 검 끝에선 매화잎이 줄줄이 뿜어져 나왔다. 흡사 달려 나가는 청명의 등 뒤로 꽃잎의 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저건……!’
혜연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알아본 것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저 신기하기만 할 저 광경에 얼마나 지고한 무학의 경지가 녹아 있는지.
“매, 매화검귀다!”
“죽여! 물러서지 말고 죽여라!”
순간적으로 주춤했던 만인방도들이 더욱 폭발적인 기세로 달려들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아야 할 만인방의 제일대적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죽여라! 매화검귀의 목을 베는 이는 평생 상상할 수도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죽여라!”
어차피 길은 없다. 물러서는 순간 아군의 손에 죽는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걸고 저 악귀의 몸에 도를 박아 넣는 수밖에.
만인방도들이 일순 가속하며 달려드는 모양새가 마치 급류가 폭포로 화하는 것만 같았다.
그 지독한 공세 속에 청명의 검이 차분하게 움직였다. 작게, 또 작게. 소담스레 원을 그려 낸 검 끝으로 매화잎들이 휘감겨 왔다.
검 끝으로 따라붙은 매화잎들은 어느 순간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도 느릿해서 퍼지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점차 속도가 붙더니 이내 주변을 완전히 휘감았다. 일대를 뒤덮은 모습이 장관이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만인방도들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뭐, 뭣…….”
푸르르던 숲도, 눈앞의 사람들도 모두 매화로 뒤덮인다. 사위가 모두 붉었다.
“저, 저거!”
그때 남궁도위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매화…… 향이…….”
결코 그럴 리 없건만, 매화 향을 맡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눈앞의 광경이, 꽃잎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했다.
매화검결(梅花劍結),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대화산파 검학의 최고봉. 매화검결의 일수가 이 순간, 백 년 전의 과거를 재현하듯 피어났다.
진정 꿈결과도 같은 광경.
전력을 다해 달려들던 이들도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잊었다. 하늘거리며 날아온 매화잎들이 그런 이들의 몸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서걱!
몽롱해졌던 의식을 날카로운 통증이 일깨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본 것은 은은히 스며드는 향처럼 어느새 육체 주변으로 밀려와 있는 꽃잎의 향연이었다.
“아, 안……!”
화아아아아아아악!
하늘거리며 퍼져 나간 매화잎이 불길처럼 모든 걸 뒤덮었다. 적의도, 그 적의를 품은 사람도, 그리고 그들이 질러 내는 비명까지도.
부서지고, 또 부서져 산산이 흩어진 매화잎은 이내 환상처럼 사라졌다. 분명 존재함에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꽃향기처럼.
“어…….”
코앞에서 매화잎이 사라져 가자, 창백하게 질려 있던 이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세상이 멈췄다.
악을 쓰며 매화검귀에게 달려들던 이들도, 그런 그들을 맞이하던 매화검귀도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절로 의심을 품게 되는 광경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벌써 죽은 게 아닐까? 그렇기에 이 광경을 영원히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때였다.
털썩! 털썩! 털썩!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만인방도들이 그 자리에 일제히 허물어졌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어…….”
이에 압도된 이들이 제 입장도 잊고 홀린 듯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스륵.
똑똑히 느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매 끝의 움직임이, 아직 그 경기를 채 가다듬지 못한 검 끝에 남은 잔떨림이, 그리고 이곳을 향해 내디뎌지기 시작한 그 발의 움직임까지.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이토록 홀린 적이 있었던가? 심지어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이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저 검이 모두를 홀리는 것이다. 저 검이 모두를 강제로 끌어당긴다. 마치 저 검 끝에 빨려 들어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그때, 현실과 환상 사이 어디쯤을 부유하고 있던 그들에게 청명이 달려들었다.
파아아아아앗!
순간적으로 쇄도하며 휘둘러 낸 검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만인방도의 목을 단숨에 쳐 날렸다.
세 개의 목이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치며,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저…….”
피 냄새가 퍼져 나가기도 전에 비웃음 섞인 청명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네까짓 놈들이…… 감히 누굴 죽이겠다고?”
호가명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 멀리 선 청명이 서늘하게 노려보는 게 자신이라는 걸 확연히 알고 있었다. 그 시선 앞에 서 있자니 몸속이 들끓었다. 노기와 독기가 입을 통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청명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주제를 모르는군. 너나 그 머저리 같은 장일소 놈이나.”
그러더니 주변을 훑어보았다.
청명의 뒤를 에워싼 만인방도들마저 멈춰 선 상황.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해남의 본대는 착실하게 이곳과 거리를 벌려 나가고 있었다.
그 상황을 힐끔 바라본 청명은 호가명과는 대조적으로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죽여라!”
호가명이 크게 외쳤다. 어쩐지 비명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반드시 죽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놈만은 죽여야 한다! 죽여! 죽여어어어어어어!”
그에 전염이라도 된 듯, 매화잎 속에서 살아남았던 만인방도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단 한 사람을 향한 만인방의 질주. 그 끝에선 청명이 부러지도록 검을 콱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