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384화 (1,385/1,567)

1384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4)

“제기랄, 이제는 꿈에 나오겠다! 저 망할 새끼!”

조걸이 험한 말을 쏟아냈다. 이제는 호가명의 얼굴만 봐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인간을 꼽으라면 한 치도 주저 없이 장일소……. 아니, 법정? 어…….

아무튼, 누가 물어보면 장일소나 법정을 꼽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인간을 말하라면 이제는 정말 고민 없이 호가명의 이름을 외칠 자신이 있었다.

야밤에 눈알이 돌아가서 그의 처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청명이 놈도 저 인간만큼 지긋지긋하지는 않다.

그리고 입으로는 우는소리를 했지만, 상황은 그가 낸 목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 앞을 막고 있는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적이 다시 나타났으니 말이다.

‘벌써?’

백천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저놈들이 따라붙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토록 빠를 줄은 몰랐다. 적어도 남경에 거의 도착한 이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지금은 어디서부터 그의 예측이 잘못되었는지를 되짚어 보고 따져 볼 시간이 없었다.

“전속으로 돌파한다!”

“예!”

이곳은 장강에 인접한 곳으로, 너른 평야 지대다. 이전처럼 적의 노림수대로 불리한 지형으로 몰릴 위험은 없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몸을 숨길 만한 곳도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저 힘 대 힘으로 부딪쳐 돌파하는 것뿐.

“혜…….”

백천이 다급하게 혜연과 남궁도위를 부르려 했지만, 이미 그들은 뒤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굳이 지시받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듯 보였다.

마음이 조금쯤 놓인 백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콰앙!

땅을 거의 짓이기는 기세로 박찬 백천이 단숨에 곽환소를 지나 앞으로 쇄도했다.

“이설, 조걸, 소소! 뒤를 받쳐!”

“예!”

“장문대리! 저희도 돕겠습니다!”

“따라붙으십시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곽환소에게 일갈한 백천은 검에서 붉은 검기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타아아아아압!”

과격하게 뿜어져 나온 매화가 전방의 사파인들을 향해 폭우에 불어난 계곡물처럼 밀려들었다. 사파인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피, 피해…….”

비명조차 채 다 지르지 못한 사파인들은 밀려오는 검기에 속절없이 휩쓸렸다. 백천이 외쳤다.

“장강까지는 금방이다. 단숨에 가자!”

“예!”

지켜보는 호가명의 입가가 살짝 실룩였다.

“늦지는 않았군.”

상식적으로 무위가 더 높은 소수를 무위가 낮은 다수가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 불가능한 일이 가능했던 건 저들이 내린 멍청한 선택 때문이다.

호가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들이 둘러업은 부상자들이 똑똑히 보였다.

‘부상자들을 대동하면 아무리 날고 기는 놈들이라 해도 제 속도를 낼 수 없지.’

그 와중에 심지어 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중간중간 몸을 숨겨야 하니 평시 낼 수 있는 속도의 반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따라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멍청한 놈들.”

그였다면 부상자 따위는 가차 없이 버렸을 것이다. 살려내면 전력이 될 수 있는 이들이라고 해도, 당장 전력이 되지 않을 이들을 위해 모두가 전멸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호가명도 알고 저들도 안다. 저들은 절대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지금껏 수없이 외쳐 온 ‘인의’라는 두 글자가 그들을 얽어매는 족쇄가 되어 있으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 벗어 던질 수 없는 족쇄.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주살해라.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만인방도들이 대답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의 두 눈에 지독한 악의가 충천한다.

저 정파 놈들에게 원한을 가진 건 절대 호가명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사파에게 동료 의식이 희박하다고는 하나, 훨씬 수도 적고 나약한 이들에게 농락당하고도 원한을 품지 않는다면 사파 이전에 무인이라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더구나 그들은 만인방도다. 은혜를 잊어도 원한만은 결코 잊지 않는 자들. 만인방도들은 자신을 물고 달아난 사냥감을 다시 발견한 맹수처럼 살기를 쏟았다.

“카하아아아아앗!”

마치 붉은 파도처럼 달려드는 그들의 앞을 막아선 건 당연하게도 천우맹의 수문장들이었다.

“스님!”

“알고 있소, 시주!”

달려오는 이들의 앞에 선 혜연과 남궁도위가 시선을 교환했다.

한 사람은 구파일방의 수장인 소림을 대표할 것이 확실시되던 천년소림 제일의 기재.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남궁이라는 이름을 이어받아 오직 영광된 길만을 걸어갈 것이라 여겨졌던, 천하제일세가의 소가주.

천하에서 가장 축복받는 길을 걸었어야 할 이들이 나란히 선 곳은 현 강호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무거운 곳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이곳에 선 것은 누구도 아닌 그들의 의지에 의해서였으니까.

“오오오오오오!”

“타아아아아아압!”

두 사람이 뿜어낸 권력과 검기가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맹렬하게 쏘아졌다.

콰아아아앙!

소림의 불광과 남궁의 검기가 폭탄처럼 터지며 순간적으로 세상을 환히 밝혔다. 실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달려들던 만인방도들이 말 그대로 일격에 분쇄되었다.

‘지독하군.’

호가명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 광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저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어야 했다. 그러니 그 권은 나약해지고, 검은 무뎌졌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 저들이 보여 주는 모습은 오히려 이전의 그들이 보여 주었던 것보다 더욱 날카롭다. 그리 무위가 높지 않은 호가명의 눈에도 또렷하게 보였다.

‘이 와중에도 성장한단 말인가?’

머리로는 이해한다.

저들은 강호에서 가장 촉망받던 기재들이고, 세상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했으니까.

장담컨대, 정파 무림 어디를 뒤진다고 해도 저들만큼 지독한 실전을 겪은 이들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눈앞에서 저만한 기재들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체감하는 건 느낌이 전혀 달랐다.

아마 지금 호가명이 느끼고 있는 건 공포감일지도 모른다. 그가 직접 제어할 수 없는 지척에서 맹수가 하루하루 자라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이의 공포감 말이다.

호가명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 아직 덜 자란 맹수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저들의 목숨을 거두는 것으로?

아니다.

호가명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천우맹이라는 맹수의 진정한 목숨줄. 그리고 이들은 성장시키고 있는 근원으로.

‘화산검협. 아니……. 매화검귀.’

일행의 중앙에서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청명과 눈이 마주쳤다. 호가명의 눈빛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들어라. 이건 내 명이 아니다. 련주님께서 내린 명이니 목숨을 걸고 수행해라!”

“예!”

“어떤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그 말이 나온 순간, 부관들의 얼굴이 더 굳을 수 없을 만큼 굳어졌다.

“화산검협만은 살려 보내지 않는다. 반드시 죽여라! 설령 그 대가로 다른 모든 이들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복명!”

터져 나오는 대답을 들으며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처참한 패배를 겪었다. 아마 그가 저지른 실수는 평생을 두고도 만회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가치 없는 패배는 아니었노라고.

그 패배로 인해 련주께서 매화검귀의 목을 거두겠단 결심을 하게 되었으니 절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절대 살아갈 수 없다, 매화검귀.”

호가명이 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 * *

“좌우에서 밀려온다!”

“겪어 봤잖아, 대응해!”

해남은 더 이상 과거의 해남이 아니었다. 딱히 누군가의 명을 들은 게 아님에도 스스로 움직여 응전했다. 신속하고, 또한 정확했다. 굳이 입을 뗄 필요가 없을 만큼.

하지만…….

“좋지 않군요.”

임소병의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슬쩍 제 옆에 있는 청명을 돌아보며 물었다.

“생각보다 이르지 않았습니까?”

“…….”

“그럼 예상 못 한 변수가 있었다는 건데……. 저는 보통 이럴 때는 한 가지부터 먼저 생각합니다만.”

“그럴 일은 없어.”

“배신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아니, 그럴 일은 없어.”

임소병의 얼굴에 묘한 빛이 어렸다. 방금 그 대답에 수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청명은 배신자가 없을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신자가 있을 거라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배신자를 색출해 내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믿고 나아가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설사 그게 그들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한이 있더라도.

“여전히 과격하시다니까.”

임소병이 살짝 초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쩌실 겁니까? 이미 쓸 만한 수는 다 썼고, 적들은 후미에 따라붙었습니다. 장강이 지척이라고는 하지만, 이들과 교전하며 장강에 도착한 순간 남아 있는 이들은 불과 십여 명뿐일 텐데.”

십여 명.

청명은 임소병이 굳이 숫자를 언급한 이유를 안다. 지금 그는 은근히 해남을 버리자고 종용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말해 왔다. 청명 스스로가.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해남을 버리겠다고. 그들보단 천우맹의 일원들이 몇 배는 더 중요하니까.

저들을 살리려다 천우맹에서 함께 온 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긴다면, 다름 아닌 청명 스스로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아니면, 정말 도장께서는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대단한 협의지사였던 겁니까?”

청명이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냉소했다.

“매번 말했지만…… 나는 내가 협객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런 게 되고 싶지도 않고.”

어쩐지 묘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임소병은 눈이 이채를 띠며 청명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협곡을 빠져나온 이후 그가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어떤 실패를 겪었건, 적에게 앞을 가로막히지 않는 이상은 해남을 떼어 내고 천우맹끼리 살아남는다는 선택지가 언제든 존재했으니까.

“좋은 대답이군요. 그럼 결론은 정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다만…….”

“……예?”

임소병의 귓가에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정도는 위기가 아니지.”

“……도장?”

청명의 두 눈이 들끓고 있었다.

최근 어둡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만을 보여 주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임소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직감했다. 청명은 지금 끝끝내 억눌러 왔던 무언가를 놓아 버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중얼거린 청명이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를 눈치챈 임소병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옷자락을 움켜잡으려 했지만, 손에 잡힌 것은 그저 허공이었다. 청명은 이미 달려가고 있었다.

“도장! 도자아아아앙!”

임소병이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눈이 벌게졌다. 어째서 자신이 그토록 광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속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