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3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3)
“아오! 빌어먹을! 뭐가 이렇게 많아?”
조걸이 달려드는 적의 가슴을 베어 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입 좀 다물어라, 이 빌어먹을 놈아!”
“아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습니까?”
조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하소연했다.
적당한 위치까지 적과 마주치지 않으며 남경을 단숨에 돌파한다?
‘그 적당한 위치에는 아직 가지도 못했다고!’
천하에 존재하는 사파란 사파는 모조리 이곳에 모여들고 있는 느낌이다. 숲 하나 지나면 사파가 바글바글하고 시냇물 하나 건너면 또 사파가 바글바글하다. 문제는…….
“뭐, 뭐야!”
“적이다!”
“아니! 아까부터 니들이 왜 놀라냐고!”
조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환장할 노릇인 게, 사파를 만나 당황해야 하는 건 천우맹과 해남 쪽이건만 되레 저놈들이 더 놀라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자기 동네에서 뜬금없이 마교의 습격이라도 받은 양.
“진짜 뒈지겠…….”
파아아아앗!
조걸이 죽는소리를 늘어놓으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휙 타고 넘어 앞으로 치고 나갔다.
파라라라락!
잠자리가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이 사방으로 그 날개를 펼쳤다.
“아악!”
“아아아악!”
삽시간에 몸 곳곳을 베인 사파들이 상처를 부여잡고 나뒹굴었다.
“사고!”
“……뒤로 물러나. 계속 우는소리 할 거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조걸이 꿍한 얼굴로 변명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부상을 심하게 입기는 했지만, 유이설의 부상은 그보다 더 심했다. 그런 사고가 군말 없이 싸우는데 그가 우는소리를 늘어놓았으니 너무 한심해 보이지 않겠…….
“조걸아, 이미 한심하다.”
“사람 마음 읽지 마시라고요! 독심술이라도 익히셨습니까?”
무심히 말을 던진 백천이 치고 나가는 유이설의 뒤로 따라붙었다.
“사매! 괜찮으냐?”
“네, 사형.”
유이설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싸울 수 있어요.”
“무리하지 마라. 부상이 깊다.”
“네.”
무리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유이설의 검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전히 영활하고 깔끔하며, 또한 신속하다.
그리고 그 검을 보는 백천은 제 마음속의 무언가가 사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안도감이었다.
내심 걱정했었다. 혹시나 저 깊은 부상 때문에 유이설이 제 검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하고. 당장 그녀가 전력이 될 수 있는가는 둘째 치더라도, 유이설의 검은 화산이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보물과 다름없다.
하지만 저 검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가 괜한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
백천의 시선이 유이설이 베어 넘기고 있는 사파인들에게로 향했다.
“전위와 후위를 교대한다. 지친 이들은 힘을 보충해라!”
“예!”
곽환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유이설뿐 아니라 해남파 역시 적들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상대를 몰아붙이다 못해, 적당히 부상만 입히는 자비를 베풀 여유를 보일 정도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충분히 성장했기 때문에?
‘아냐. 저쪽이 너무 약한 거야.’
지금 그들이 조우하는 사파 무리는 광동에서 그들의 발목을 잡아 대었던 이들의 수준에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상한 것이다.
호가명이든 장일소든 그들을 잡을 작정으로 적을 배치했다면 저런 이들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런 이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두 사람이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썩어도 준치고, 망해도 구파라고, 해남을 중심으로 천우맹의 핵심이 가세한 이들에게 저런 잔챙이들이 상대가 될 리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그 장일소나 호가명이 이런 효과도 없는 소모적인 짓을 할 리 없는데.
“장문대리.”
그 순간 옆으로 달려온 남궁도위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백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눈치채신 모양이군요.”
“예.”
“이들은 우릴 상대하기 위해 온 이들이 아닙니다. 전력은 둘째 치고, 우리의 존재도 몰랐던 것 같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청명과 녹림왕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백천이 움찔하고는 고개를 고정했다.
‘의지하지 마!’
아군에 높은 식견을 지닌 이들이 있다는 건 더없는 축복이다. 하지만 모든 분석과 판단을 그들에게만 맡겨 버리는 순간 그 축복은 더는 축복이 아니라 족쇄가 되어 버린다.
그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그가 중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마다 저들이 곁에 있을 거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이 사파 무리는 어디에 도움이 되지?’
구파의 핵심들을 상대하는 데는 분명 전력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모으고 있는 이들이군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렇다는 건…….”
백천의 손등부터 소름이 돋아 올랐다.
구파의 핵심을 상대할 수 없는 병력이라 해도 정파의 중소 문파 정도는 언제든 상대할 수 있다. 그들의 눈에 어중이떠중이로 보인다고 해서 이들이 진짜 어중이떠중이인 건 아니니까.
문제는 이 사파 무리가 강남에 있는 이상은 강북의 중소 문파를 상대할 일이 절대 없다는 것이다.
“혹시…… 저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새 소림이 강북에서 세력을 규합한 건?”
“……가능하겠습니까?”
“그렇겠죠.”
말을 꺼낸 남궁도위도 자신의 말이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과거에는 소림이 깃발을 들고 소리쳐 외치면 수많은 문파가 그 아래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천하의 모든 이들이 매화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똑똑히 봤다. 자신들 역시 고립이 되는 순간 소림에게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버렸는데 미쳤다고 소림의 지시를 따르려 하겠는가?
그 별것 아닌 선택이 천하의 많은 정파들에게 각자도생의 길을 열어 버린 것이다.
‘그러게, 왜 멍청하게…….’
대의란 그냥 단기간의 결과만 두고 보면 어리석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대의인 이유는 결국은 옳은 결과로 돌아오기 때문.
만일 그때 소림이 뒤를 따지지 않고 남궁을 구하러 달려들었다면, 소림이 내는 목소리에 실리는 힘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소림이 가진 명망과 힘으로는 강남에 대한 총공격이 불가능하다. 자신을 따르는 몇 문파들을 이끌고 공격하는 건 가능할지 모르나, 중소 문파들까지 모두 규합하는 건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건 단 하나.
“……강을 넘겠다는 건가? 이 사파들을 이끌고?”
“가능할까요? 그 넓은 장강을 맨몸으로 넘을 수 있을 만큼 무위가 높은 이들도 아니잖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들이 다라고 해도 수많은 선단이 몇 번은 왕복해야 할 겁니다. 그걸 구파가 눈 뜨고 지켜볼 리 없잖습니까?”
“그새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봐야겠죠. 그 도하를 막을 수 없는 일이.”
“그런…….”
남궁도위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대화를 종합하면 결론은 명백하다.
북진. 장일소가 칼을 뽑아 든 것이 분명하다.
‘지금?’
남궁도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가능하다. 언제든 가능하다. 그 장일소라면 언제든 강을 넘어 전쟁을 시작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은 안정과 완벽한 승기를 원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혼란과 그를 이용한 극적인 승리니까.
그 모든 걸 알고 있었음에도 이 사실에 전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은 아닐 거라 여겼던 거다, 나 역시도.’
전쟁은 언제든 벌어진다. 그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두가 생각한다. 그 전쟁이 벌어지는 시기가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조금 더 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시일이 지난 뒤일 거라고 말이다.
장일소는 그런 그들의 확신과 바람을 대놓고 비웃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거꾸로 생각하면 지금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
“천하를 살아가는 건 천하만민이지만, 그 천하를 움직이는 건 소수입니다. 그 소수의 시선이 지금 모조리 강남으로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
“장일소라면 그런 상황을 이용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가려 하겠죠.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해도 조건이 맞는다면 그 정도는 무시할 겁니다.”
“그럼…….”
남궁도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저 말의 의미가 너무도 생생하게 와 닿았으니까.
“저희 때문에…… 다른 누구도 아닌 저희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는 말입니까?”
백천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쟁은 언제고 벌어졌을 겁니다. 그 시기가 조금 빨라졌다고 해서 꼭 저희 탓인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백천이 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럼 이런 결과를 알았다면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강북에 그대로 남아 있으셨을 겁니까?”
그 말에는 남궁도위도 대답하지 못했다.
“상대는 장일소입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움직이지 않은 대로, 해남을 무너뜨렸다는 사실로 또 다른 계략을 꾸몄을 겁니다. 애초에 그런 놈이니까.”
남궁도위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지금은 이 상황을 돌파하는 것만 생각합시다.”
“바로 정답입니다!”
불현듯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이 획 돌아보았다. 임소병이 손에 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두 분도 나름 성장하신 모양이군요. 이 책사는 무척 기쁩니다.”
“기분이 더러운데.”
“사파 놈이 한 칭찬은 욕 아닌가?”
두 사람이 괜히 욱했다. 그때 눈빛을 갑자기 어둑하게 가라앉힌 임소병이 말했다.
“그보다 다른 것에 집중해야지요.”
“예?”
“장일소가 정말 전쟁을 벌일 생각인 거라면……. 북으로 진격할 생각이었다면 그동안 우리가 누려 오던 한 가지 이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겁니다.”
“이득이요?”
두 사람이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대체 그 장일소 놈 덕분에 무슨 이득을 누렸다는 말인가? 손해를 보면 봤지.
특히나 장일소 덕에 가문의 태반을 잃은 남궁도위는 살기까지 띤 눈으로 임소병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임소병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단호히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더는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균형?”
“천우맹의 존재.”
그제야 임소병의 말을 이해한 두 사람이 침묵했다.
“지금까지 장일소는 천우맹을 방치하는 것으로 정파의 균열을 노려왔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천우맹은 전쟁의 최전방에서 가장 지독하게 싸울 확률이 높은 세력이니까.”
“확실히…….”
그러기 싫어도 그러게 될 것이다. 어느 한 놈이 눈이 돌아가서 악을 써 댄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
“지금까지는 이득이 되었으니 살려 두었지만, 이제는 방해가 되니 죽이려 하겠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입니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뒤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한 사람, 청명에게로 말이다.
“그…….”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뭔가 말을 보태려던 백천이 순간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청명이 아닌 조금 더 뒤, 그들이 이미 지나쳐 온 숲 쪽으로 향한다. 높이 삐쭉삐쭉 솟은 나무들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버, 벌써…….”
“오는군요.”
임소병이 부채를 접으며 꽉 움켜쥐었다.
“단단히 각오하십시오. 지금까지와는 다를 테니까.”
콰아아앙!
이윽고 커다란 나무들이 연이어 무너지더니 너무도 익숙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만인방 무복.
그 한중간에 선 호가명이 시린 눈빛으로 으르렁댔다.
“사파의 복수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려 줘라.”
백천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