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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82화 (1,383/1,567)

1382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2)

“보고드립니다! 사패련주 패군 장일소가 탄 마차가 현재 남경에 접근 중, 이대로라면 세 시진 안에 남경 인근에 도달할 것이라 예상됩니다!”

“보고드립니다! 흑귀보 병력이 상주(常州) 방면을 통과, 빠른 속도로 남경을 향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도착 예측 시간은?”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속도를 조절하는 중이라 정확한 도착시간을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상황을 두고 봤을 땐 세 시진에서 다섯 시진 사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보고드립니다! 황산 인근의 사파인들이 남경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 수를 예측 중이지만, 워낙 사방에서 몰려오는 터라 정확한 파악이 어렵습니다. 다만 최소 오천 이상으로 보입니다!”

사방에서 보고가 쏟아져 들어올수록, 개방 장로 자오개(慈烏丐) 능삼(能三)의 얼굴은 더 이상 굳을 수 없을 만큼 굳어졌다.

들려오는 소식 하나하나가 심장을 오그라들게 할 정도로 위험천만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를 기겁하게 할 만한 소식은 그 뒤에 들려왔다.

“자, 장로님!”

쾅!

내실 문이 격하게 열리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거지 하나가 박차고 들어왔다.

“기, 긴급입니다! 긴급!”

“무슨 일이냐?”

“강남에서 온 보고입니다! 혀, 현재 황산 위쪽에서 대규모 수레의 행렬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수레?”

“예! 정확하게 확인한 것은 아니나, 실려 있는 짐의 형태로 볼 때 양곡일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양…….”

순간 능삼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곡식이 실려 있다는 말이, 지금 이 시기에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곡식이 대규모로 장강을 향해 이동할 이유가 따로 무엇이 있겠는가?

‘군량미!’

장일소가 갑자기 도에 눈을 떠 장강 유민들에게 양곡을 베풀 마음을 먹은 게 아니라면, 그 의도는 너무도 명확하다.

“지, 진심인가?”

능삼의 손끝이 절로 벌벌 떨렸다. 군량미를 보충한다는 건, 장일소가 이 상황을 단순한 단발성 충돌 정도로 끝낼 생각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그가 잠깐 말을 잃은 사이 다른 거지들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군량미를 동원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허세입니다! 사패련의 정예에게 곡식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멍청한 소리! 사패련 놈들이야 며칠 곡기를 끊는다고 해도 문제가 없겠지만, 지금 저들은 중소 사파들마저 모조리 끌어들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이끌고 북진할 생각이라면 군량미는 반드시 필요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친 듯이 밀려온 보고서를 양손에 가득 든 정보각 각원들이 서로 다투듯 언성을 높였다.

물론 이 역시 정보를 해석하는 이들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눈 한 번 깜빡할 동안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올바른 대처를 찾아내는 게 그들의 역할이니까.

하지만 능삼은 알아챘다. 오가는 격한 목소리 속에 채 다 숨기지 못한 두려움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 잠시 진정하십시다! 군량미를 끌고 온다는 게 반드시 도하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장강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대치를 구상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사패련이 이미 전선을 굳힌 구강을 두고 굳이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만!”

결국 자오개 능삼이 격해진 논쟁을 끊어 냈다.

“우선은 본단 쪽으로 소식을 넣고, 현재 남경으로 이동하고 있는 구파 쪽으로도 바로 연락을 취해라!”

“예!”

“판단할 수 없는 건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 있는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는 게 최우선! 분석은 그다음이다!”

“예!”

그 말에 몇몇 이들이 재빠르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장로님, 천우맹! 천우맹 쪽은 어찌합니까?”

“……전달해라, 그쪽에도.”

“예!”

명을 끝내려던 능삼이 달려 나가려는 이를 다시 한번 붙들며 고함쳤다.

“아, 그리고 북상하고 있는 해남과 접촉할 방법이 있는지, 강남에 진입해 있는 흑의단에 확인해라!”

“자, 장로님, 그건…….”

“확인해!”

“예, 알겠습니다!”

달려 나가는 거지의 뒷모습을 보던 자오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토록 허술했단 말인가?’

정보각은 개방의 자랑이었다. 그들은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끌어모으고 분석한다. 옆집 사람이 오늘 아침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이웃은 몰라도 개방은 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말이다.

자오개 능삼 역시 그런 정보각의 기능에 늘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마주한 정보각의 민낯은 그가 생각해 오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평시에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정밀하게 돌아가던 정보각의 체계는 상황이 이토록 긴급해지자 여기저기서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엇박자를 일으키고 있었다.

‘강호가……. 그간 강호가 너무도 평화로웠구나.’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고 여겼다.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다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오만이었는지 이 광경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날카로운 명검이라도 검집 안에서 수십 년 동안 박혀 있다 보면 날이 무뎌지고 예기를 잃기 마련이다. 그 사실을 오늘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본단에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느냐?”

“아, 아직은…….”

능삼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적어도 방주만이라도 멀쩡했다면…….’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젊은 자가 개방을 이끌도록 해야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더라면 현 방주가 이렇게 쇠약해지기 전에 방주의 위를 계승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후회도 너무도 늦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방주 자리를 이양한다는 것은 더 큰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화산.’

자오개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화산 장문인이었던 현종이 스스로 장문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제자를 장문 자리에 앉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오개는 그가 크게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어린 화산정검 백천을 장문대리의 자리에 앉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현종이 노망이 난 것이라 여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천하에 현종을 폄훼하는 이들이야 수없이 많겠지만, 그중 현종이 몰락한 화산을 되살린 장문이라는 사실까지 부정할 이가 하나라도 있겠는가?

물론 그 모든 일을 이뤄 낸 게 현종이 아닐 수도 있다. 현종은 그저 지켜보기만 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물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잘 흘러가고 있는 체제는 굳이 바꿀 이유가 없으니까.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현상을 유지하여 흐름을 이어 가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이 상황을 겪고서야 이해하게 됐다. 현종이 어째서 스스로 물러났는지. 어째서 젊은이에게 그 자리를 이양했는지 말이다.

“타 문파들은! 지원을 요청한 구파의 답은 돌아왔느냐?”

“아직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예. 현재 분타주들이 각 지역에 있는 문파에 들어 그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답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대체 왜!”

참다못한 자오개가 벌컥 노성을 터트렸다.

“이미 소식이 전해진 지 한참일 텐데 왜 아직도 답이 없다는 말이냐! 이게 정말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는 건가, 제기랄!”

그가 분기탱천하자 대답했던 거지가 황급히 말했다.

“다, 다시 한번 연통을 넣어 보겠습니다!”

“이 빌어먹을!”

능삼이 들고 있던 죽장으로 바닥을 탕탕 내리쳤다.

“대체 다들 무슨 생각이냐, 대체!”

그의 고함이 전각 밖으로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 * *

청성산.

“사패련 놈들이 현재 거의 남경에 도착했다 합니다.”

“음.”

장로의 보고를 받은 청성파 장문인 벽현자(碧賢子)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장문인. 산문 앞에 거지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슬슬 답을 들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벽현자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야지. 그들에게 청성은 준비가 끝나는 대로 소림의 부름에 응하여 장강으로 출진할 것이라 전하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제자들을 준비시킬까요?”

“그래. 준비는 시켜 둬야지. 보는 눈이 있으니.”

그 말을 들은 청성 장로 벽상(碧想)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출진할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가야지. 가야 하고말고. 청성은 구파일방이자 강호의 정도를 이끄는 문파인데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면?”

“하지만 굳이 급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벽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장문인. 하지만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알고 있다. 아마도 피를 흘리지 않고 끝날 수는 없겠지. 그 패군이 빈손으로 돌아가려 하지는 않을 테니.”

“한데 어찌 그런…….”

벽상이 저어하는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벽현자의 입가에 묘한 조소가 어렸다.

“나의 말을 곡해하는구나. 나는 출진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저 준비를 철저히 한 뒤에 출진하겠다고 한 것뿐.”

“…….”

“어설픈 마음만 가지고 달려가 봐야 도움이 되기 어려울 터이니 만전을 기하자꾸나.”

“……예, 장문인.”

벽상은 일단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납득은 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그를 본 벽현자가 묘하게 웃었다.

“그저 나는 궁금할 뿐이다.”

“……예?”

“긴 강호사, 청성은 지금껏 몇 번이나 적의 공격을 받아 왔다. 때로는 마도가 발호하고, 때로는 사파가 난립했고, 그리고 때로는 새외의 무도한 이들과 싸워 왔지.”

“그게 저희 청성의 자부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글쎄. 상황이 이리되니 불현듯 생각이 들더구나.”

“어떤…….”

“어떠냐? 남경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 아니더냐?”

벽상이 입을 다물었다.

“하남 역시 마찬가지겠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원하러 달려갈 수 있는 곳이다. 무인들이 전력으로 달린다면 불과 며칠 걸리지도 않을 거리지 않으냐.”

“그러합니다만…….”

“한데…… 돌이켜 보면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언제나 제대로 된 하남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온전히 가진 힘만으로 적과 싸워 오셨지.”

벽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벽현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기에.

“그렇기에 궁금하더구나. 우리가 피를 흘릴 때, 지금 저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정말 거리가 멀어 제때 도착하지 못했던 것인지 말이다.”

“장문인…….”

“우습지 않으냐.”

벽현자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앉아 저 멀리 타오르는 불길을 볼 때, 저들은 항상 이런 마음이었겠지.”

우습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침중했다.

“그러니 조금 기다리자꾸나. 저들이 어떤 심장으로 청성산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보았는지 내 꼭 확인해야겠으니 말이다. 걱정할 건 없다. 설마 내가 소림이 무너지길 바라겠느냐? 너무 늦지 않게 갈 것이다. 너무 늦지 않게…….”

하지만 결코, 급하지도 않게.

흐려진 말 뒤에 숨은 의미를 아는 벽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떠냐? 너는 내가 지금 과하다고 생각하느냐?”

벽현자의 물음에 벽상은 잠시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마주하며 그는 담담히 말했다.

“지난 일에 감정을 품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닐 것입니다.”

벽현자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때 벽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인내는 무인의 미덕. 다소 쓰린 속을 참고 버텨 내는 것으로 얻는 것이 크다면, 당연히 권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 허허허허허허!”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벽상을 보던 벽현자가 크게 웃어 버렸다.

저 말이야말로 그가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제자들에게 준비하라 일러라. 아이들은 그리 알아야겠지.”

“예, 장문인.”

밖으로 나가는 벽상을 보며 벽현자가 비틀린 미소를 흘렸다.

“……법정. 그러게, 왜 그리 대단한 척을 하셨소이까?”

벽현자는 지금쯤 법정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저 사패련과의 전쟁으로 가진 힘을 잃은 법정이 그를 마주할 때의 표정이었다.

과연 그때도 과거처럼 오만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죽지는 마시오, 방장. 내 꼭 그대로 다시 보고 싶으니. 하하.”

대전 안에는 그가 흘린 웃음소리가 섬뜩하리만치 느릿하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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