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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81화 (1,382/1,567)

1381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1)

적호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신뢰라…….’

안다. 장일소의 말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생각한 화산검협과 장일소가 말하는 화산검협이 너무도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화산검협은 어떤 이였지?’

사실 그는 화산검협을 잘 알지 못한다. 직접 만나 보지도 못했고 당연히 대화조차 나눠 보지 못했다. 하지만 행적과 세간의 소문만으로도 그가 어떤 이인지 미루어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절대의 신진고수.’

그는 패군과 겨루고도 살아남았고, 심지어 패군과 손을 맞춰 마교의 주교를 무찌르기까지 했다.

제아무리 화산검협을 과소평가하는 이라고 해도 그가 천하에 손꼽히는 고수 중 하나라는 사실까지는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말이다.

‘게다가 천우맹의 중심이지.’

그는 이제 겨우 약관을 넘어선 나이임에도 천하를 두고 다투는 거인들의 장에 당당히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화산검협의 진정한 힘은 그 무력이나 세력에 있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그 협의겠지.’

화산검협이라는 별호가 울려 퍼지는 곳에는 반드시 그 두 글자가 따라붙는다. 그건 그가 지닌 무력도, 그리고 그가 일구어 낸 세력조차도 하찮게 만드는, 가장 강한 힘이었다.

그렇기에 장일소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협의의 화신이나 다름없다고 평가되는 화산검협이 사람을 믿지 않는다니…….

“믿기 어렵니?”

적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믿기 어려운 것은 아니나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가 내세우는 협의는 신뢰가 없이는 이뤄지기 힘들 텐데요.”

“흐응.”

장일소가 작게 코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아니지. 그게 아니야. 완전히 거꾸로 알고 있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말했잖니. 더없이 청렴한 선비는 어쩌면 더없이 탐욕스러운 자일지도 모른다고.”

적호가 짧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화산검협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지.”

장일소가 슬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더니 물었다.

“애초에 돕는다는 건 어떤 행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생각해 보렴. 돕는다는 게 무엇인지. 너는 빈자가 부자를 돕는 걸 본 적이 있더냐?”

적호의 눈빛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도울 필요가 있는가?

“그런 경우는 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닙니까?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적게 가진 자에게…….”

적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지금 장일소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이해한 것이다.

“알겠느냐?”

장일소의 눈빛이 온몸에 걸친 패물들처럼 빛을 발했다.

“돕는다는 건 본디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베푸는 행위다.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누구나. 하지만…….”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누구도 천하 모두를 도우려 하지 않는다. 누구도 제 손에 닿는 모든 걸 도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

“이게 무슨 뜻이겠니. 그가 세상 모두를 자신보다 나약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 자신도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야.”

적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지만, 련주님.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꼭 화산검협만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는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긴단다. 남들은 그저 바라기만 하는 것을 해 버리는 이지. 그건 그가 자신을 더없이 대단하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는 말이야.”

장일소는 말하다 말고 재미있다는 듯 짧게 웃었다. 붉은 입꼬리가 유난히 서늘해 보였다.

“물론 이것 역시 스스로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장일소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화산검협은 괴이하다. 그저 대단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가 이룬 것들은 대단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했던 행위들은 절대 정상적이지 않았다.

“신뢰라는 것은 타인을 인정하는 데서 나오지. 하지만 그놈은 절대 남을 인정하지 않아. 그가 남을 인정하는 범위는, 그 상대가 제 손에 닿는 곳에 있을 때. 딱 거기까지란다.”

“그건…….”

“그래.”

장일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이 갓난아이들을 바라보는 눈과 같지. 또래보다 잘 걷는 아이를 보고 칭찬을 할 수도 있고, 이제 겨우 발이나 떼는 아이가 천자문을 왼다면 감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장일소의 말에 조롱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런 감정을 신뢰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어른은 아이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건 아이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어른은 아이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고, 대단함을 인정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그 미숙함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는 협의지사가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온통 세 살 먹은 아이로 가득해진다면, 절대 선인이라 할 수 없는……. 아니, 오히려 악인이라 불려야 할 적호마저도 협의지사가 될 것이다. 손에 닿는 아이들을 내버려 둘 수 없을 테니까.

지금 장일소는 화산검협 청명의 광증에 가까운 협의가 결국은 사람에 대한 불신. 정확하게는 미숙함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간의 평가와는 완전히 반대로 말이다. 세상은 이 평에 동의할까?

아니, 그 이전에 화산검협이 이 말을 듣는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모르긴 몰라도 결코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

“련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해했습니다…….”

살짝 혼란을 느낀 적호가 고개를 들어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그 전에 하신 말씀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쯧쯧. 이 정도 말을 했으면 알아먹어야 하지 않겠니?”

“……송구합니다.”

장일소가 병째 술을 들이켜 입 안을 적셨다. 엄지로 입술에 묻은 술을 살짝 훔친 후에야 그가 답했다.

“말하지 않았니. 사람이란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한다고. 핵심은 그 청명이라는 아이가 자신은 모두를 신뢰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거란다.”

“…….”

“그럼 간단하지. 내가 해야할 일은, 그가 모르는 자신의 본의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를 헤아려 보는 것뿐이란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어렵습니다…….”

장일소는 적호를 가만히 응시했다. 감정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밝은색 눈동자가 사람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너는 아이가 물가에 있으면 어찌 하겠느냐?”

“그야…… 우선은 지켜볼 것입니다.”

“그 아이가 물에 빠지면?”

“……경우에 따라서는 달려갈 수도 있겠지요.”

“그 아이가 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도?”

적호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물론…… 제가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사람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까. 고작 아이 하나 구하는 데 딱히 품이 드는 것도 아닐 테고요.”

“그래. 그렇지, 경우에 따라서는.”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는 듯 장일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묻겠는데, 그 물가에서 많은 아이들이 서로 편을 갈라 싸우고 있다고 하면 어찌하겠느냐?”

“…….”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물에 빠져 수없이 죽을 수도 있다면? 걸음마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미숙한 아이들이 그 결과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멍청하게 위험한 곳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적호가 입을 다물었다.

“너는……. 그래, 너는 어찌할 거지?”

당연히 가야 한다. 누구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사람이라면 가야 한다.

적호의 입에서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아이들이라면…… 달려가야겠지요. 어른이 아닌 아이들이니까요.”

“그래. 그렇지. 당연히 그리하겠지.”

“…….”

“알겠니?”

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화산검협을 끌어들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단다. 그저 커다란 일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돼. 제 앞가림도 못하는 미숙한 것들을 있는 대로 끌어다가 큰 판을 벌이기만 하면 그자는 어떻게든 오려 할 테니까.”

“…….”

“굳이 다른 수고를 들일 필요 없이 말이다.”

물론 화산검협은 분명 장일소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수많은 근거와 계산 끝에 결론을 내릴 테니까.

하지만 지금 장일소는 이미 그 결론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화산검협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본의의 작용 끝에 그리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누군가가 내릴 선택을 당사자보다 더 훤히 꿰뚫고 그에 맞는 계획을 세운다는 게,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장일소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을 듣는 적호의 등골에는 소름이 내달렸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장일소가 병법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연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규격화된 수단 따위는 진의 앞에서 무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럼…… 화산검협은 알아서 오게 될 거란 말씀이십니까?”

“이미 그러고 있지 않니?”

“…….”

“내가 할 것은 그저 그 아이의 선택지를 적당히 줄여 주는 것뿐이란다. 그럼 그 아이가 할 선택은 결국 뻔해지지. 그리고…….”

장일소가 삐뚜름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 아이는 그 자체로 사람을 끌어모은단다.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아이의 존재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 테지. 마치 공터에 모여드는 장작처럼.”

“…….”

“그걸로 된 것 아니겠느냐?”

적호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련주님께서는 본단을 나설 때부터 이런 상황을 그리셨다는 말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움직이는 것만으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모조리 예측하고? 그렇다면 눈에 띄는 거대한 사두마차도 그 까닭에서였단 말인가?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문득 두려웠다. 강대함과 집요함, 그리고 악의.

세상 사람들이 장일소를 두려워할 이유야 수도 없다지만, 지금 적호는 진정으로 장일소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온전히 찾은 기분이었다.

이런 이를 대체 누가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적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결국…… 련주께서 하신 말씀이 모두 옳다면 천하의 누구도 련주를 상대할 수는 없겠군요. 그런 깊은 곳까지 헤아리는 이는 누구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글쎄. 모르지.”

“……예?”

장일소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타인을 평가하는 건 생각보다 쉽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너무도 어렵지. 심지어 나에게도 말이야.”

“…….”

“누군가……. 그래, 누군가가 나 자신도 모르는 나를 알아낸다면. 내 안에 숨어 있는, 나도 모를 진의를 이해하는 이가 있다면…….”

장일소가 제 하얀 목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눈빛이 번뜩였다.

“그자가 내 목을 가져가는 이가 되겠지.”

“…….”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하하하.”

웃음을 흘린 장일소가 술을 들이켰다. 적호는 발끝으로 스며드는 공포감에 바르르 몸을 떨었다.

장일소의 말이 맞았다.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천하의 누구도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천하의 누구도 이 깊은 심연을 들여다볼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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