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0화. 준비는 이제 다 마쳤단다. (5)
푸드드득.
호가명의 팔목에 내려앉은 매가 살짝 기우뚱했다. 기껏 먼 길을 날아왔는데 겨우 도착한 곳이 빠르게 달리고 있는 이의 흔들리는 팔 위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몇 차례 호가명의 팔뚝을 쪼아 댔다.
호가명이 미리 준비해 둔 날고기를 슬쩍 건네니 그제야 진정한 매가 태연스레 물어뜯었다.
검지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호가명은 매의 발목에 묶인 작은 통을 열어 서찰을 꺼냈다. 이내 그의 눈이 내리깔렸다.
반개한 눈으로 서찰을 응시하며 무언가 생각하던 그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매 안에서 작은 세필을 꺼내 들었다.
사라락.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 그가 종이를 허공에 두어 번 흔들어 말리고는 재빠르게 말아 매의 발에 달린 작은 통에 밀어 넣었다.
딸깍.
열리지 않도록 뚜껑을 단단하게 봉한 후 매의 등을 길게 훑어 내리고 팔을 들어 올렸다. 아직 먹고 있던 날고기를 놓치고 싶지 않은 듯 몇 번 주춤하던 매가 이내 하늘 높이 날아올라 짙게 내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주목.”
“예!”
뒤를 바짝 쫓고 있던 부관들이 그의 목소리에 눈을 빛냈다.
“포진을 바꾼다.”
“예?”
“중앙의 주공을 중심으로 병력을 좌우로 나눈다. 각 군의 포진은 횡으로 길게.”
생각지 못한 지시에, 부관들이 서로 의아한 시선을 교환했다.
“질문.”
“저⋯⋯ 군사. 횡으로 넓게 전개한다면 추적 속도가 늦어지게 됩니다.”
“상관없다. 놈들 역시 더는 빠르게 이동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 말은 일리가 있다. 저들이 지금까지 지나온 것은 사패련의 입장에서도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영역이었지만, 지금부터는 병력을 집중시켜 놓은 장강 유역에 들어선다.
당연히 그들이 흩뿌려 놓은 사파와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치고 나아가는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거꾸로 속력을 높이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호가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눈빛을 받은 부관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해를 못 한 모양이군.”
“제가 부족하여⋯⋯.”
“진형을 바꾼다는 건 병법이 달라졌다는 뜻이고, 병법이 달라졌다는 건 목적이 바뀌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몰이가 끝났으면 그물을 펼쳐야지.”
다시 앞을 바라보는 호가명의 두 눈엔 부관들에게 보여 주지 않은 섬뜩한 한기가 어려 있었다.
“이제는 포위하고 섬멸한다.”
“예, 군사!”
결의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호가명의 눈꼬리가 짧게 경련했다.
협곡에서 저들을 섬멸하는 데 실패한 순간부터 그의 명령권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저 장일소의 명을 철저히 이행하는 것뿐이다.
그가 장일소로부터 받은 명령은 아주 간단했다.
‘놈들의 뒤를 공격할 것.’
하지만 이를 조금 더 자세히 풀어 내면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놈들의 뒤로 바짝 따라붙어 공격하며 압박할 것.’
그리고 거기에 호가명의 해석을 덧붙이면 의미가 조금 더 달라진다.
‘놈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뒤를 압박해 반드시⋯⋯ 장강 유역까지 몰고 갈 것.’
만일 다른 이가 이 명을 들었다면 당연히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장강까지 가는 건, 강남을 탈출하고 있는 화산 놈들이 가장 바라 마지않는 일이 아닌가?
바라는 것을 하도록 채근하는 걸 두고 ‘압박’이라 할 수 있을까? 바라는 곳으로 가게끔 몰아가는 것을 과연 ‘추격’이라 할 수 있을까?
이건 병법이라 부를 수도 없는 짓이다. 본디 병법의 핵심은 적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하지만 호가명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지시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한 이들도, 이 지시를 내린 이가 패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슬며시 그 손가락을 내리게 될 테니까.
호가명은 알고 있다.
핵심은 바로 ‘압박’이다. 아니, 더 정확한 표현은 ‘통제’일지도 모른다.
놈들에게 바짝 따라붙으며 심리적인 압박감을 지속해서 주입하는 것으로 사패련은 확실한 한 가지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바로 그놈들이 지금까지처럼 갑작스레 미친 짓을 벌이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어처구니가 없지.’
호가명이 지금까지 지켜본 화산검협이라면, 장강으로 오르는 와중에 갑자기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남으로 가 버린다거나, 되레 동으로 틀어 동해에서 배를 타고 절강으로 북상해 버리는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놈이라면 아예 반대로 방향을 틀어 추격하는 만인방을 거꾸로 돌파하고 해남으로 돌아가 버리는 짓도 태연하게 저지를지 모른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놈이 지금까지 말이 되는 짓을 저지른 건 몇 번이나 되던가?
거꾸로 생각하자면, 오히려 그런 짓을 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다.
장강에는 적이 가득하다. 그런데 왜 굳이 화산검협이 그 적들이 넘쳐나는 장강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제아무리 사패련이라 해도 그 넓은 장강을 모두 틀어막기는 어렵기 때문에?
아니다. 화산검협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장강을 틀어막는 것보다 저 바다를 틀어막는 게 몇십 배는 더 어려울 텐데, 왜 굳이 적들에게 편한 방향으로 가 주어야 하느냐고.
평범한 이들에겐 긴 장강을 우회해 돌아간다는 게 불가능한 발상이지만, 화산검협에게는 별것도 아닌 일이다.
그는 장강에서 해남까지 적이 득실거리는 사지(死地)을 일직선으로 이동해 해남까지 최단 시간에 도착하는 길을 선택해 버리는 인간이니까.
그가 정말 ‘가장 안전한 탈출법’이라는 목적만을 완벽하게 노릴 생각이었다면 장강을 우회하는 선택이 가장 올바르다.
이 모든 걸 두고 생각해 보자면, 지금 장일소가 내린 지시와 그 움직임의 의도는 더없이 명확하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장일소가 내린 지시. 그리고 장일소의 움직임의 의도는 더없이 명확하다. 바로⋯⋯.
❀ ❀ ❀
“가짓수를 줄이는 거란다.”
커다란 마차 안, 작은 다탁을 사이에 두고 장일소와 마주 앉은 적호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가짓수라 하셨습니까?”
“그래.”
장일소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느릿한 고갯짓도 아니건만, 그 움직임을 보는 이들은 그가 늘 권태와 함께 지내고 있단 생각을 절로 하게 되었다.
“병법에서는 뭐라 하지?”
“⋯⋯저는⋯⋯.”
적호가 살짝 망설이듯 입술을 우물댔다.
그 역시 병법을 모르지 않는다. 수하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만 한다. 장일소가 무력을 갖춘 수하들을 좋아하지만, 무력만 갖춘 수하는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제가 감히 련주님 앞에서 병법을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하하하하핫.”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적호는 안다. 저 웃음은 결코 대답에 만족하여 나온 게 아니란 것을.
보통 아부를 경계하는 이는 있을지언정 아부를 싫어하는 이는 없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치켜세워 주는 것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장일소에겐 그 말이 통용되질 않는다.
더없이 높은 위치란 그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자신의 대단함 역시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기뻐하지 않는다. 숨을 잘 쉰다는 칭찬에 기분 좋아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재미있다니까.”
“⋯⋯제가 실수라도⋯⋯.”
“나는 병법이란 건 잘 모른다. 필요하면 익혔겠지만, 딱히 필요한 적이 없었지.”
적호가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 두 눈만큼은 묻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병법에 통달한 이들을 그리 농락하고 짓누를 수 있었느냐고.
“어차피 병법도 사람이 쓰는 거란다. 그러니 사람만 알면 쉽지. 기억하렴. 적에게 이기고 싶다면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단다.”
“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한 가지는 뻔하지. 적이 싫어할 짓만 골라서 하면 된다는 것.”
그 말에 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장일소의 행동 원리와도 같다. 중간 과정이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돌아보면 결국 장일소는 상대가 가장 껄끄러워할 짓을 연이어 하곤 했다.
“다른 하나가 뭔지 아니?”
“⋯⋯모르겠습니다.”
“흐음. 사실 이게 조금 더 핵심인데, 보통 들어도 잘 이해하질 못하더구나.”
적호의 얼굴에 살짝 기대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 대답으로 장일소가 그간 보여 준 전략의 비밀을 알게 될지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적호의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사람이란 말이다.”
“예, 련주님.”
“자기도 자기를 잘 모른단다.”
“⋯⋯예?”
적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쯧쯧. 너도 똑같구나.”
“⋯⋯그게, 오히려 너무 간단한 말이라 통 이해가⋯⋯.”
“흐음. 좀 더 쉽게 이해시키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래. 이게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겠구나. 사람이란 말이다.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한단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장일소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흔한 일이지. 천하에서 가장 청렴한 선비가 있다면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야⋯⋯ 대단하다고 여기겠지요.”
“어째서?”
“청렴이란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일소가 나직이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그 선비가 정말 원하는 것이 청렴한 자신과 유학의 길일 것 같으냐?”
“예?”
“천하에서 가장 청렴하다는 말인즉, 청렴이 병적이라는 뜻이지. 그런 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보통 청렴 그 자체가 아니라 청렴한 자신이란다.”
“⋯⋯.”
“사람은 누구나 같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간절할 때 대단한 것을 이뤄 내지. 그럼 그 청렴한 자가 진정으로 간절하게 원하는 건 무엇이겠느냐?”
“그야⋯⋯.”
적호의 얼굴이 굳었다.
“명예⋯⋯.”
“그렇단다. 그런 이는 명예를 과할 정도로 원하는 거지. 하지만⋯⋯ 아마 본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거란다. 자신이 세운 원칙을 스스로 잘 지키고 있다고 여기겠지. 자기 자신마저 속이며 말이다.”
적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답을 들어도 어렵다. 결국 한 사람의 속내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 말씀대로라면, 지금 해남을 이끄는 화산검협이 그 협의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단 의미입니까?”
“그건 너무도 당연한 거지. 머리에 병이 있는 아이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건 다른 것이란다.”
장일소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그 아이와 내가 비슷하다는 말을 내가 한 적이 있었던가?”
“⋯⋯몇 번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적호 역시 의문이었다. 천하의 장일소가 어째서 그런 하찮은 이에게 그만한 평가를 내리는 것인지 말이다.
“말 그대로란다. 그 아이와 나는 특히 한 가지 면에서 완벽하게 똑같지.”
“명석함 말입니까?”
“명석함? 하하하하하핫!”
장일소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어 댔다.
“아니, 아니지. 그런 게 아니야. 그 아이와 내가 같은 점은 바로⋯⋯.”
그의 눈이 고혹적으로, 한편으로는 섬뜩하게 호선을 그렸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 이 천하의 누구도, 단 한 톨만큼도 신뢰하지 않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