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9화. 준비는 이제 다 마쳤단다. (4)
어둠이 내린 강변.
추레하고 낡은 옷을 입은 장정 몇이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엇갈린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나! 본단에서 준 정보인데!”
“아, 아니, 소림은 한참 전에 가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그들이 빠르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거리가 벌어질 리는 없는데⋯⋯.”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 화산검협을 구하는 일 아닙니까? 천우맹주가 이보다 중요하게 여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화산에 산불이 나서 도관이 싹 불타도 신경도 안 쓰고 화산검협부터 챙기러 갈 상황인데 이렇게 느긋하게⋯⋯.”
“알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끄응.”
거지들이 목을 쭉 빼고 상류 쪽을 응시하던 그때였다.
“저, 저기 옵니다, 천우맹!”
“빌어먹을, 왜 이리 늦어!”
저 멀리서 달려오는 무리를 발견한 거지들이 재빠르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어디냐?”
“앞은 아닐 것 같고⋯⋯. 저, 저기다! 분타주!”
무리 중에 섞인 홍대광을 발견하자마자 거지들은 크게 소리를 질러 댔다.
“화음 분타주! 여기! 여깁니다!”
그 요란한 소리에 홍대광이 주위를 살폈다.
“뭐야!”
강변에서 손을 붕붕 흔드는 거지무리가 보였다. 그들이 홍대광에게 일제히 외치는 말인즉 이랬다.
“분타주, 보고를⋯⋯!”
“멈춰서 들을 시간 없으니까 너희들이 와, 이 새끼들아!”
하지만 홍대광은 다 듣기도 전에 신경질적으로 말허리를 잘랐다. 거지들은 움찔하며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분타주! 상황 보고입니다!”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
“⋯⋯여, 여기서요? 여기는⋯⋯.”
거지들이 난색을 표하며 주위 눈치를 살폈다. 이곳엔 홍대광과 함께 온 천우맹도들이 가득하다.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정보를 줄 수밖에 없게 되지 않는가.
이를 모를 홍대광이 아닌데 그는 사정을 헤아려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화를 냈다.
“아니, 뭔 놈의 거지새끼들이 이렇게까지 느긋해! 이 동냥질도 못 해서 굶어 뒈질 놈들이! 빨리 말 안 해?”
“드, 듣는 이들이⋯⋯.”
“말 안 할 거면 썩 꺼져! 바쁜 사람 잡지 말고.”
“끄응⋯⋯.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거지들이 마지못해 앓듯이 입을 열었다.
화음만큼 작은 곳의 분타주가 본단의 인원에게 이리 큰소리를 치는 건 본디 불가능하다.
하지만 홍대광은 평범한 분타주가 아니다. 그는 차기 개방의 방주로 거론되는 핵심 인물인 동시에, 현재 천하에서 가장 관심받는 문파인 화산과 말이 통하는 유일한 거지다.
그러니 본단에서 온 이들이라도 한 수⋯⋯. 아니, 몇 수 접어 주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방주께서 전하신 명인데, 천우맹과 같이 행동하지 말고⋯⋯.”
어쩔 줄 모르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거지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 구파 쪽으로 이동하라고⋯⋯.”
그래도 최대한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애를 쓰며 말했건만, 그 노력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었다.
“뭐? 구파? 나보고 구파에 붙으라고?”
“부, 분타주. 그, 목소리를 좀⋯⋯.”
“근데 이 영감 진짜로 노망이 들었나?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사람까지 보내서 하고 있어? 됐고, 다음!”
“바, 방주께서 내리신 명인데⋯⋯.”
“됐으니까 다음!”
보고하고 있던 거지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원래 홍대광이 평범한 개방도는 아니었지만, 저 화산검협과 어울리면서부터는 정말 앞도 뒤도 없어진 느낌이었다.
“⋯⋯혀, 현재 수로채는 남경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야, 이 거지새끼야!”
홍대광이 냅다 손을 뻗어 보고하는 이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갈겼다.
퍼억!
“아아악! 왜, 왜 때리⋯⋯.”
“이 장강이 몇 갈래로 나뉘어 있기라도 하냐? 다른 방향이라도 있어? 저 배들이 갈 다른 길이라도 있냐고!”
“⋯⋯.”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중요한 정보나 말해! 확 걷어차 버리기 전에.”
“예! 그⋯⋯ 강남 동쪽에 포진하고 있던 흑귀보 잔당들도 남경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흑귀보?”
“예.”
순간 홍대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때 신주오패의 일원으로 불렸던 흑귀보가 지금은 저 장일소의 충실한 종복이 되어 있다.
‘수로채에 흑귀보, 거기에 장일소까지 직접 만인방을 이끌고 남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건가?’
거기에 해남으로 향했던 만인방의 전력 역시 북상하고 있을 테니, 못해도 사패련 전체 전력의 육 할 이상이 남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규모만 따져 봤을 때, 과거 장강참변 당시 흑룡채에 집결했던 인원수를 아득하게 능가한다. 최근 백 년 사이에는 이만한 전력이 한곳에 모인 역사 자체가 없다.
“그 미친놈이⋯⋯. 진짜 해보겠다는 건가?”
이리되어 버리면 더 이상 화산검협을 구해 낼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강북을 거점으로 둔 정파와 강남을 거점으로 둔 사패련이 남경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충돌할 수도 있다.
전쟁.
홍대광의 뇌리에 떠오른 두 글자였다.
남경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중심으로 두 세력이 충돌한다?
‘절대 짧은 충돌만으로 안 끝난다!’
원래 불은 붙이는 게 가장 어렵다. 하지만 한번 붙이고 나면 번지는 건 일도 아니다. 과거 장강참변 때는 강남불침의 조약이 불길에 끼얹은 물이 되어 주었지만, 이번에는 어느 문파도 그런 굴욕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어느 한쪽이 잿더미가 될 때까지 싸우는 길밖에는 남지 않을 터.
‘이게⋯⋯. 이게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었나?’
도대체 무엇이 시작이었나.
구강의 배들이 공격받아서? 아니면 그 장일소가 직접 움직여서?
‘아니⋯⋯. 그 이전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화산검협의 강남행으로 초래된 것이 분명했다. 그가 해남으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해남이 잿더미가 되었을지언정 이만한 전쟁이 벌어지기까진 한참의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작은 일 하나가 한없이 커지는 일이 늘 없으리란 법은 없으나, 이건 그런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우리는? 본단 거지들은 뭘 하고 있느냐?”
“본단에서도 지금 지원 병력을 남경으로 급파했다고 합니다!”
“자, 잠깐. 장강에도 지금 거지들이 와 있잖아.”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홍의단과 청의단까지 추가로 보낸답니다.”
“⋯⋯이런, 미친⋯⋯.”
홍대광의 얼굴이 더 새파랗게 질렸다.
개방 본단이 쥐고 있는 정보는 일개 분타주가 쥘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방대하다. 개방에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파악한다.
그런데 그런 본단에서 지원을 보내고 있다는 건, 남경에서 사패련과 구파가 충돌을 일으킬 확률이 굉장히 높다고 판단했단 의미였다.
“다른 구파에도 지금 모조리 격문이 날아갔습니다. 전원 소집입니다. 동시에 남경 주변의 중소 문파에서도 인원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그놈들이 그런다고 오겠냐고!”
격문 하나 받았다고 쉽사리 도착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면, 끌어모으는 데 이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리가 멀기에 늘 강호의 중심에서 끼어들지 못했던 이들은 아마도 지금의 사태를 코웃음 치며 지켜보고 있겠지. 그 잘난 중심으로 잘 한번 막아 보라며 말이다.
“그래서? 지원은 해 주겠대?”
“아직 격문이 도착도 안 했을 겁니다. 적어도 하루 이상은⋯⋯.”
“야, 이 빌어먹을! 그럼 기껏 와 봐야 다 뒈진 뒤 아니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미리 보냈어야지!”
“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패군이 너무 급작스럽게 움직여서⋯⋯.”
“그걸 대비하는 게 본단이 할 일 아냐? 거지새끼들이 동냥밥 처먹고 뭘 하는 거냐고!”
홍대광의 거센 호통에, 거지 하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변명했다.
“그⋯⋯ 저희도 할 말은 있는 게, 이건 도리가 없었습니다.”
“도리는 서당 가서나 찾아! 이 마당에 도리를 왜 찾아, 도리를!”
“아니, 그게 아닙니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소림을 중심으로 무당과 종남이 다른 문파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 주지 않습니까.”
“⋯⋯어?”
“무당과 종남입니다. 무당과 종남! 아무리 용을 빼 봐야 그 두 문파의 공백을 무슨 수로 채우겠습니까! 그 두 문파가 구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얼만데!”
홍대광이 입을 꾹 닫았다.
구파의 중심은 누가 뭐라 해도 소림이지만, 그 소림을 완벽하게 떠받치던 문파는 무당과 종남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그 두 문파가 나란히 봉문에 들어 버린 것이다.
“그, 그렇긴 한데⋯⋯.”
홍대광이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평소 같았다면, 망할 놈들이 쓸데없이 봉문은 왜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드냐며 쌍욕을 온종일 퍼부었겠지만, 지금 홍대광의 입장에서는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그 두 문파의 봉문에 화산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일이 꼬이려니까!’
홍대광이 괜히 언성을 높였다.
“아니,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일이야! 사람을 보내서 봉문을 풀라고 말이라도 해야지! 그 미친놈들은 문 걸어 잠그고 다른 놈들은 다 뒈지든 말든 구경만 할 거래?”
“이미 본단에서 사람을 보낸 모양입니다.”
“그런데?”
“말을 전하기는커녕 안으로 진입도 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문답무용으로 내쫓는다지 않습니까.”
“⋯⋯돌겠네, 진짜.”
봉문도 상황을 가려야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상황에서까지 고집을 부린단 말인가? 아무튼 저 망할 구파 놈들은 자존심 때문에 일을 망친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말이다.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유 때문에 방주께서 분타주더러 구파에 합류하라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됐어!”
홍대광이 이를 뿌득 갈아붙였다.
설사 왕거지가 직접 정예를 이끌고 구파에 합류한다 해도 그는 그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그의 소속은 구파일방이 아니라 천우맹이니까.
“다 들으셨겠지만, 상황이⋯⋯.”
“지금 흑귀보가 동쪽에서 남경으로 오고 있는 거요?”
하지만 그 순간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당군악이 대뜸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슬쩍 홍대광의 눈치를 본 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일소가 이끄는 만인방의 절반은 서에서 남경으로 향하고 있고.”
“무슨 뻔한 말씀을⋯⋯.”
“남은 만인방의 절반은 북상하고 있군.”
홍대광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그리고 장강 위는 다름 아닌 수로채가 장악해 강을 틀어막는다?”
이해했다. 이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당군악이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아이들이 그 남경으로 향하고 있단 말이로군. 사패련의 세 문파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집결하고 있는 곳, 그 중앙으로.”
살아날 수 없다.
홍대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화산검협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을 숱하게 현실로 만들어 냈다. 그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게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화산검협이라 해도⋯⋯ 저 남경으로 향해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아, 안 돼⋯⋯.”
홍대광의 시선이 황급히 강 너머로 향했다.
강 너머의 세상은 그저 검게 물든 채 고요히 침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