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378화 (1,379/1,567)

1378화. 준비는 이제 다 마쳤단다. (3)

“쏴, 쏴라!”

파아아아아앗!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조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화살! 진짜 지긋지긋해 죽겠네!”

쾅!

그가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검이 빛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허공에 그려진 검영에, 쏟아지던 화살 비는 마치 처마에 부딪힌 빗줄기처럼 튕겼다.

“끄윽.”

화살을 처리하고 착지한 조걸이 옆구리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그러더니 버럭 고함을 쳤다.

“사파 새끼들이 당당하게 칼 들고 달려오지 않고 비겁하게 활이나 쏴? 부끄럽지도 않냐!”

백천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비겁하니까 사파 아닌가?”

저 새끼 머릿속 사파는 대체 어떤 모습인 걸까?

백천은 황당해했지만, 윤종은 조걸을 걱정했다.

“나대지 말고 뒤로 물러나 있어라! 몸도 성치 않은 놈이!”

“에이, 여기 몸 성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똑같지.”

“저 미친놈이⋯⋯.”

조걸은 다시 망아지처럼 앞으로 쌩 달려가 버렸다. 윤종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는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물론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이곳에는 멀쩡한 사람이 멀쩡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적으니까.

문제는 멀쩡하지 않은 사람도 급이 나뉜다는 것이다.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놈이!”

윤종이 눈에 불을 켜고 땅을 박찼다. 조걸에게 나대지 말라고 알아듣게끔 설교하느니, 차라리 삼 개월 된 강아지에게 짖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설교하는 게 낫다.

“타압!”

단번에 조걸보다 앞으로 치고 나간 윤종이 조걸을 상대하던 이의 목을 꿰뚫었다.

조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 사형! 이거 내 건데!”

“입 안 닥쳐, 인마?”

도사답지 않게 험한 말을 뱉은 윤종이 곧장 자세를 낮추며 들이닥치는 사파 놈의 도를 쳐 냈다. 바로 반격을 이어 가려는데, 돌연 그를 타 넘고 검을 내리박는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콰득!

“끄르르륵!”

가슴 정중앙이 시원하게 뚫린 사파인이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허물어졌다. 지체 없이 검을 뽑은 후 쓰러지는 사파인을 밀친 검수가 강하게 외쳤다.

“사숙⋯⋯. 어?”

당연히 백천일 거라 생각했던 윤종은 순간 움찔했다. 화산의 무복이 아니다.

“단숨에 몰아쳐라! 별것 아니다!”

“예!”

윤종의 좌우로, 푸른색 무복 차림의 무인들이 맹렬히 스쳐 지나갔다. 윤종은 순간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광경인데⋯⋯.”

적을 쓰러뜨린 곽환소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뒤로 해남의 제자들이 악착같이 뒤따랐다.

습관적으로 검을 한 바퀴 돌려 피를 털어 낸 윤종은 허리를 곧게 폈다.

‘괄목상대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물론 아직 부족하다. 청명이 놈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하자면 ‘아직 한참 멀었다, 이 애송이들아.’라고 해야겠지.

이는 단순히 윤종이 자만심에 젖어서 하는 생각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저들은 여전히 명검을 손에 쥔 어린아이 같다. 자신이 익혀 온 무학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들은 그 명검을 휘두르고 있다. 제 손에 뭐가 들려 있는지도 모르고 겁먹은 채 떨던 처음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진 모습이다.

“⋯⋯확실히 경험이라는 게⋯⋯.”

“아, 빌어먹을! 말조심하십시오!”

“응?”

중얼거리던 윤종은 날아든 만류에 영문을 모르고 돌아보았다. 조걸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크게 외쳤다.

“사형이 무슨 생각 하시는 건지는 알겠는데, 그렇게 말해 버리면 저 썩을 놈 새끼가 우릴 온갖 지옥에 내다 굴린 게 다 정당화되어 버리잖습니까!”

당연히 청명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건 안 되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암.

“그러니까 그냥 입 꾹 닫으십쇼!”

“⋯⋯알았다.”

윤종이 겸허히 대답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앞을 가로막는 적들이 그리 강하지 않은 건 사실이나, 해남이 저리 나서서 분전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조걸이 놈과 속 편하게 대화를 나눌 틈도 없었을 것이다.

‘침착하게 싸워만 준다면 전력이 안 될 수 없지.’

구파의 말석으로 불린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천하에서 아홉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문파. 말석이나마 구파일방이라 불리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들이 지금처럼만 싸워 준다면 확실한 전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싸우는 것에 마침내 거리낌이 없어지는 순간에는 천우맹을 대표하는 문파 중 하나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특히나⋯⋯.

“검 끝이 흔들린다! 흥분하지 마라!”

“예!”

윤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사람은 확실히 대단해.’

그의 시선은 격렬히 싸우면서도 정확한 지시를 잊지 않는 곽환소의 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사람 때문에 한 번씩 금 장문인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니까.’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문제자라 해도 장문인과 감히 비교를 할 순 없다. 후대의 장문인이 될 이라고는 하나, 이미 실현된 일을 모호한 가능성과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하지만 곽환소의 대단한 점은, 그 사실을 충분히 아는 윤종마저도 때때로 착각하게끔 한다는 것이었다.

과거 소림 비무대회에서 보았던 곽환소의 모습은 이미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지금의 모습이 너무도 강렬해 과거가 모두 잊힐 정도다.

윤종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화산을 알던 이들이 지금의 오검을 볼 때마다 내보이던 반응이 이젠 확실히 이해되었다. 저 곽환소의 반만큼이라도 변한 모습을 보이면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형, 앞쪽입니다!”

“알고 있다!”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물러나라! 여긴 내 자리다!”

그리고 그런 곽환소의 지시를 받는 해남의 제자들 역시 곽환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 주고 있다.

사람이란 함께 위기를 넘기면 그 전과는 비할 수 없이 끈끈해지곤 한다. 저들이 이 짧은 기간 동안 쌓아 올린 유대관계는 어쩌면 이전에 문파 내에서 함께 보내온 긴 시간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강해지겠군.’

물론 해남이 입은 피해는 쉽게 복구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수많은 것을 잃었다. 든든한 터전이 되어 주었던 해남도를 떠나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제자가 떠나갔다. 남은 제자들도 강남을 돌파하는 와중에 반수 가까이 희생됐다.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지금의 해남은 구파일방이라 불릴 자격을 이미 잃은 걸지도 모른다. 이 이상 피해가 없다고 해도 잃은 힘을 되찾기까지는 수많은 시일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종은 해남이 한층 강해질 것이라 믿었다.

문파를 강하게 만드는 건 조건 같은 게 아니라는 걸 그는 이미 경험했으니까. 터전도, 재산도, 심지어는 명분조차도 중요하지 않다.

한 문파를 강하게 만드는 건 오직 그 문파에 적을 둔 이들이 품고 있는 마음과 의지다.

그리고 지금의 해남에게는 그게 있다. 해남을 떠나올 때는 없었던 그 의지가 말이다.

“그래. 강해지⋯⋯.”

“전장에서 딴생각하지 마라, 이 한심한 놈아!”

버럭 고함을 친 백천이 돌풍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윤종의 눈썹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해남한테 장문제자를 바꾸자고 해 볼까?’

해남에서 안 받아 주려나?

생각하다 웃어 버린 윤종은 검을 움켜잡고 재빨리 백천의 뒤로 따라붙었다.

“사숙, 놈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더 많아질 거다.”

백천이 달려들어 오는 적들을 냉정하게 살폈다.

‘아직은 어중이떠중이야.’

솔직히 딱히 위협은 되지 않는다. 적당히 소집을 받고 온 중소 사파 따위야 굳이 그가 나설 것도 없다. 심지어는 이젠 해남의 상대조차 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건, 적이 얼마나 상대하기 쉬운가가 아니다. 적이 천우맹과 해남의 위치를 특정하기 시작했단 점이다.

이제부터는 다시 험로를 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 우리가 장강에 거의 도달했다는 의미겠지.’

이 위기만 넘기면 강북이 있다. 두 발 뻗고 누워도 누구 하나 공격해 오지 않는, 그 평화로운 땅이 말이다.

지금까지 겪었던 것 이상의 불지옥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지만, 어차피 그걸 뚫지 않고 강북에 도달할 방법 같은 건 없다.

“녹림왕!”

“예, 장문대리.”

“남경까지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전력으로 달린다면⋯⋯.”

임소병이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하늘을 잠시 확인한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길어 봐야 하루입니다.”

“하루라⋯⋯.”

백천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럼 우리의 운명도 하루 안에 결정이 난단 말이로군.’

장강을 앞에 두고 강을 건널 기회를 엿본다는 선택지는 없다. 강에 도착하는 순간 결정해야 한다. 강을 넘을 것인지, 싸우다 죽을 것인지.

‘그리고 후자는 없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저기에 있는 놈들까지만 처리하고, 방향을 튼다!”

“굳이요? 이제 하루 정도 거리밖에 안 남았다는데?”

“앞이 아니라 뒤가 문제다! 쫓아오는 놈들이 있지 않으냐.”

“아⋯⋯.”

조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들이 정말 경계해야 할 이들은 앞을 막아서는 어설픈 사파 놈들이 아니다.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는 호가명이다.

“놈들은 우리가 장강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알지만, 남경으로 간다는 건 모른다. 굳이 놈들에게 방향을 정확하게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알겠습니다!”

“이 소협!”

“예, 장문대리!”

“장문인께도 전달해 주십시오! 그리고 방향이 엇갈리지 않도록 확실하게 표식을 남겨 주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남 장문인 금양백이 장로들을 이끌고 따로 움직여 준 덕분에 숨통이 한결 트였다. 방어란 본래 막아설 곳이 좁을수록 용이하다. 일행을 둘로 나눈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이점이 따라왔다.

‘대단한 사람이야.’

금양백에게 다른 문파 장문인들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은 강한 통솔력은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없는 확고한 신뢰가 있다.

적진의 한복판에서 제자들의 지휘를 타인에게 맡기고, 스스로 별동대를 꾸려 움직인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금양백은 그 역할을 자처했다. 한 사람의 제자라도 더 살려서 강북으로 보내기 위해.

“나도 질 수 없지.”

“예?”

백천은 대답 대신 검을 움켜잡고 앞을 똑바로 주시했다.

“간다! 죽을 각오로 따라와라!”

“예!”

천우맹의 최정예를 이끌며 앞으로 달려 나간다.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의지, 해낼 수 있는 희망, 뛰어넘고자 하는 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런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도 한 사람의 시선은 그저 차고 냉정했다.

‘하루라⋯⋯.’

가장 뒤편에서 앞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청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하루.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또 너무 긴 시간이다. 특히 적진에서 보내야 한다면 말이다.

그 가혹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청명의 두 눈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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